1999년 가을, 운동회는 온 동네를 움직였다

오늘만 먹을 수 있는 김밥, 오늘만 살 수 있는 다마고치

by 달구비

● 일시: 1999년 9월 어느 날

● 장소: 도호초등학교 운동장 어딘가

● 준비물: 도시락, 돗자리, 체육복, 운동화 등


‘월남마차 타고 가는 캔디 아가씨’ 노래에 맞춰 매일 고무줄 위를 뛰던 때였다. 그날은 허벅지 높이의 줄을 영 넘기지 못해, 머리카락 끝에 땀방울을 매달고 교실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 놓인 가정통신문을 읽는 내내 땀이 뚝뚝 떨어졌다. 혹시라도 젖어 찢어지기라도 할까 봐 멀찌감치 종이를 들고, 곱게 접어 가방 속으로 넣었다.


운동회 한 달 전부터, 나 포함 7명의 개나리반 친구들은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매일같이 연습을 했었다. 파란 깃발과 하얀 깃발을 드는 건 제일 키 큰 친구들이 맡았다. 그 뒤로 줄지어 서서 팔을 힘차게 흔들며 입장했다. 일렬로 맞춘 줄에서 조금이라도 튀어나오는 사람이 생기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이었다. 앞에 선 친구와 몸을 일자로 맞추기 위해 뒤통수를 하도 째려봤더니 눈이 빠질 듯했다. 땡볕 아래 반복된 연습으로 얼굴은 감자처럼 시꺼메지고, 다리는 논에 들어간 장화처럼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드디어 마지막 연습이 끝난 날,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책가방을 벗어던지고 할아버지를 기다렸다. 곧이어 탈, 탈, 탈, 탈 경운기를 몰고 오는 할아버지가 보이자, 단숨에 뛰어나가 흑백의 종이를 내밀었다. 할아버지는 “가정통신문…” 글자를 중얼거리며 곧장 집안으로 들어갔다. 걸어간 자리마다 흙이 떨어져 금세 엉망이 됐지만, 할아버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돋보기를 꺼내 쓰더니 한참을 읽었다.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못 다니게 된 할아버지는 글을 읽고 쓰는 데 우리 반 선생님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그렇지만 이 집에서 가정통신문을 읽을 수 있는 학부모는 할아버지뿐이었다. 그 막중한 책임감에 할아버지는 매일신문을 펼쳤고 한 글자 한 글자 더듬으며 공부하셨다. 안경을 쓰고 신문을 읽는 할아버지의 모습은 가끔 교장선생님과 겹쳐 보였다.


“그게 뭐 이래요?”


할머니가 땀에 젖은 꽃무늬 챙모자를 벗어던지며 물었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가정통신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 “운동회.” 하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할머니는 고무 슬리퍼를 허겁지겁 주워 신더니 마을회관 앞에 세워진 트럭으로 향했다. 나도 운동화를 구겨 신고 따라나섰다. 해가 지고 있었기 때문에, 트럭 아저씨는 떠날 채비를 하려고 시동을 걸고 있던 참이었다.


“김밥 김 하고… 우엉 하고… 또 뭐이나, 하여튼 김밥 쌀 때 필요한 것 좀 주이소."


할머니를 따라 트럭 앞에 선 내 가슴은 두근거림으로 요동쳤다. 아저씨는 트럭 속을 가득 채운 물건들 틈에서 단무지, 김, 우엉, 그리고 뽀얀 자태의 햄을 척척 꺼내 담았다. 할머니에게 건네지는 비닐봉지를 내가 냉큼 뺏어 들었다. 허겁지겁 비닐을 열어 햄이 잘 담겼는지 확인한 뒤 폴짝폴짝 뛰며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할머니에게 몇 시부터 김밥을 쌀 건지 물었다. 다섯 번째 물어봤을 때 할머니는, "빨리 자야 많이 싸지." 라며 불을 꺼버렸다.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통에 어쩔 수 없이 대자로 누워 뻗었다. 심장 뛰는 소리가 북소리처럼 둥둥거려 귓가를 어지럽혔다. 이불을 귀 위로 올려 덮고 한참을 뒤척였다.


머리꼭대기까지 덮어쓴 이불은 처음으로 암탉이 울기도 전에 젖혀졌다. 할아버지가 웬일로 일찍 일어났냐며 나를 쳐다볼 때, 검은 하늘은 어느새 회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부엌엔 이미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가득했다. 윤기 나는 김밥이 쟁반 위에 쌓여 있었고, 내 모습을 본 할머니가 김밥을 도마 위로 가져가 숭덩숭덩 썰었다. 김밥이 접시 위에 담기자마자 곧장 내 입으로 향했다. 쫀득거리는 밥알과 짭조름한 햄이 뒤엉켰다. 나물만 먹어 싱거워졌던 내 입속은 이내 자극적인 맛으로 가득 찼다.


김밥 몇 알을 입에 넣고, 윗마을에 사는 친구 아름이와 미역공장에서 만났다. 미역공장은 아주 옛날에 운영했다가 문을 닫은, 나보다도 훨씬 오래된 폐건물이었다. 나는 아랫마을에 살기 때문에 중간에 있는 미역공장에서 만나서 학교까지 늘 함께 걸었다. 그날만큼은 논두렁에 있는 돌에 발이 치이고, 진흙에 발목이 빠져도 전혀 힘들지 않았다.


“넌 도시락 뭐 쌌어?”

“김밥이랑 유부초밥.”

“우와, 유부초밥은 뭐야?”

“일본 사람들이 먹는 거야.”


그 말을 끝낸 아름이의 어깨가 으쓱댔다. 김밥도 맛있는데 유부초밥은 얼마나 맛있을까? 게다가 일본 사람들이 먹는 거라니. 나에게 나눠주는 걸 잊을까 봐 아름이 손을 꼭 잡았다.


학교 입구에 다다르자, ‘가을 한마음 대잔치’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그 밑으로 길게 줄지어선 돗자리에 아름이와 나는 입을 떡 벌리며 걸음을 멈춰 섰다.


돗자리 위에는 본드 풍선, 다마고치, 물총, 요요, 뽑기가 줄지어 있었다. 몇 개인지 세어보다가 20개가 넘어가면서부터 포기했다.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다마고치가 제일 시선을 사로잡았는데, 화면 안의 귀여운 캐릭터가 제발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았다. 설레는 마음을 겨우 움켜쥐고 학교에 들어서니, 운동장 위로 만국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운동장 구석에는 ‘올림피아’라고 쓰여 있는 냉장고가 보여, 허겁지겁 다가가 안을 살펴본 내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큰 통에 갈색, 하얀색, 분홍색 아이스크림이 가득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내 입에도 달콤하고 차가운 맛이 번지는 것 같았다.


나도 모르게 흘러내린 침을 손등으로 닦으며 아이스크림 냉장고에 매달린 채, 시선은 돗자리의 다마고치로 향했다. 몸은 아이스크림, 눈동자는 돗자리. 기이한 포즈였다. 다른 친구들도 손에 동전을 쥔 채 아이스크림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냉장고 앞 제일 가운데로 자리를 옮겨, 발끝에 힘을 주고 섰다.


점점 더 많은 친구들이 모이자 몸은 그대로 냉장고 앞에 선 채, 낯익은 경운기를 찾기 위해 정문 쪽으로 고개만 살짝 돌렸다. 아직 조용하기만 한 정문을 보며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쓸었다. '할머니한테 이 급한 상황을 알려줘야 하는데...' 어떤 맛 아이스크림을 먹을지 고민하면서, 다마고치의 이름까지 짓느라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그때 익숙한 아름이네 아빠의 트럭이 들어오고 있었다. 아름이는 내 손을 던지듯 놓고 사라졌다. 그 뒤로도 경운기들이 탈탈거리며 연달아 들어왔지만, 우리 집 빨간색 경운기는 아직이었다.


곧이어 조용하던 학교는, 어른들의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여름을 덮친 태풍으로 벼가 많이 쓰러졌다는 이야기가 여기저기서 오갔다.

운동회를 빙자한 마을 잔치가 시작되고 있었지만, 내 눈은 여전히 학교 정문을 향해 고정되어 있었다.


제발 우리 집 빨간색 경운기가 빨리 나타나 주기만을 애타게 기다리면서.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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