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누구나 그렇듯 저는 큰 서점 앞에서가슴이 설레입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풍기는 특유의 서점 향기, 그 서점향은 종이의 향인지 어떤 방향제를 뿌리는지 모르겠지만 분명 우리 기분을 한결 평온하게 누그러뜨립니다.
오늘은 책을 보러온 것만은 아닙니다. 오늘은 Flex. 조금 소소하지만 사치부리는 날입니다. 책을 뒤적거리는 것만큼이나 설레게 하는 것은 서점의 팬시점입니다. 아아, 팬시점. 문방구말입니다. 펜들이 색마다 통에 가득 꽂혀있고 캐릭터 스티커도 있고, 어린이 공책부터 스터디플래너와 동전지갑과 양말, 그리고 방석이나 포스트잇이나 머리핀이나 하는 것들을 모아둔 그곳을 좋아합니다. 오늘은 여기 멈춰서 노트를 한권 구매해보는 것입니다. 내 눈에 가장 흡족한 디자인이면 더 좋겠습니다. 이면지에 쓰면 안되냐구요? 그래도 오늘은 노트여야 합니다. 그것도 아주 세련된 노트. 이 노트와 함께 아주 필기감이 괜찮은 펜하나도 같이 사봅시다.
그리고 카페로 들어갑니다.따뜻한 캐모마일이나, 아니면 아예 달달하고 평소에 먹지 않는 조금 화려한 음료를 시켜봅시다. 버블티라든지, 휘핑이 잔뜩 올라간 프라프치노라든지. 그리고 창쪽에 길게 붙어있는 자리에 앉아봅시다. 음료가 나오면 이제 이 노트를 펼쳐봅시다. 그리고 무작정 적어 보는 것입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모든 무기력은 외면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아시나요? 오늘은 정면돌파해보는 날입니다. 무엇이든, 적어보는 것입니다.---이래서 정말 정말 힘들다, 이래서 속상하다 이런 말들을 적어도 좋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좋은 것은 '원하는 것'을 적어보는 것입니다. 어떤 집에 어떤 이와 살고싶다 이런 말도 좋고, 기타를 배우러 가야겠다든지 말입니다. 아무 헛소리도 써도 좋습니다. 가진 돈을 정산을 해보기도 하고, 무슨 영화를 보고 싶은지, 누가 생각이 나는지 앞으로 이런 회사를 차리고 싶다든지. 무슨 허구의 말이든 떠오르는 아이디어든 아주 갈겨서 써도 좋습니다. 마무리는 오늘 또는 내일 할일을 번호매겨 적어보는 것으로 해봅니다. 그러면 놀랍게도 무언가를 실행할 만한 힘이 내 가운데에 솓는 것을 느낄 것입니다.
견딜 수 없는 시간들을 지날 때
인생에서 견딜 수 없는 시간을 지날 때마다 나는 이 노트들에 의지를 하였습니다. 두려울 때마다 노트를 펴고 쓰는 것입니다. 특히 출근하기가 두렵고 무서운 날마다 1층 빵집 테이블에 앉아 적고는 했습니다. '오늘도 무사히 끝난다. 오늘도 무사히 끝난다. 오늘도 무사히 끝난다.' '일터에 좋은 것을 전한다, 일터에 좋은 것을 전한다, 일터에 좋은 것을 전한다...'
자,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는 어디이며, 나는 누구인가. 그래서 할 것인가. 말 것인가. 그것도 아주 갈겨서 썼습니다.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대면하기, 우울해보이지만 사실 불안해하는 나를 달래주기의 과정입니다. 그러면 기분이 한결나아졌고, 명확해졌고, 신기하게 한걸음 나아갈 힘도 생기는 것입니다.
머릿속에 있는 것을 털어내고 나면
이 노트의 효과가 가장 강력하게 발휘되는 때 중에 하나는 불면의 밤을 지날 때입니다. 잠이 오지 않으면 그 즉시 이 노트를 펴서 뭐라고 적는지도 모르는 말들을 적는 것입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대로 종이위에 토해내고 나면 머릿속이 정리되고 잠은 자연스럽게 찾아옵니다. 드는 생각 모두를 잠이 올 때까지 적다보면 어느 순간 '아 졸려 zzZ'라고 적고 불도 켜진 채 잠들어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이렇게 쌓인 노트가 10권 남짓 되어갑니다. 나는 오늘도 가방 한켠에 이 노트를 넣어놓고 언제든 꺼내놓습니다. 그리고 막 돈이라도 쓰고 싶어지는 스트레스가 아주 많은 날이면, 그렇게 창가로 새 노트를 들고 앉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