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에버노트 얘기는 아니고
문자가 왔다.
결제금액 85,000원.
에버노트 프리미엄 일 년 이용권이 갱신되었다.
작년 3월 말 에버노트 강의를 들었고
그 후 내 삶은 많이 달라졌다.
오랜 고민이었다.
'기록하는 방식을 바꿀 수 없을까?'
사람은 한 번 정한 방식은 잘 바꾸지 않는다.
가던 길로만 다니고, 먹던 메뉴만 먹고, 만나던 사람들만 만난다.
나도 그랬다.
나름대로 용도를 나눈 여러 권의 노트에 손글씨로 정리를 오랫동안 해왔다.
체계적이라 할 순 없었다. 그저 차곡차곡 쌓아둘 뿐.
잔뜩 어질러진 방에서 잠을 자는 것 같은 찜찜함이 늘 따라다녔지만 바꾸지 못했다. 불편함이 익숙함을 이기지 못했던 탓이다.
내가 불편하다고 느꼈던 부분은 다음과 같다.
1. 빠르게 찾아볼 수 없다
어떤 내용을 적어둔 것이 생각나서 노트에서 찾으려 하면, 그게 어느 노트에 있었는지 기억을 하지 못하거나, 기억을 하더라도 정확히 그 페이지를 찾는 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린다.
2. 편집이 어렵다
정리를 하다 보면 편집의 필요성을 느낄 때가 있다. 분류를 다시 하거나, 구성을 바꾸거나, 여러 내용을 함께 보려 하거나. 이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보기 편하게 정리하고 싶어도, 정리되지 않은 채로 계속 사용해야 한다.
3. 시공간의 제약이 있다
보고 싶을 때, 보고 싶은 장소에서 꺼내 볼 수 없다. 세상 모든 것이 연결된 초연결 시대에 익숙해져 버렸기에, 시공간의 제약은 상당히 큰 불편함으로 다가온다. 일의 능률도 떨어진다.
4. 분실의 위험이 있다
노트를 어딘가에 놓고 온다거나, 그럴 일은 없겠지만 집에 불이 나기라도 하면(!) 몽땅 사라져 버린다. 물리적 실체로 존재하기에 이러한 위험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이토록 연약한 노트에 내 소중한 것을 계속 담아두려니 불안하다.
보다시피 내가 문제라고 느꼈던 것들은 모두 아날로그 방식의 특징이다.
아날로그의 단점은 곧 디지털의 장점.
에버노트를 쓰는 이유는 길게 말할 것도 없이, 위에서 나열한 불편함들을 에버노트가 모두 해결해 주기 때문이다.
나는 그중에서도 검색이 가능(searchable)하다는 것을 에버노트의 강점으로 꼽고 싶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에버노트를 써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예전엔 기록 자체로 만족해야 했다. 차곡차곡 쌓는 뿌듯함은 있었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나는 오직 쌓아두기 위해 기록하는 게 아니었다. 필요할 때 꺼내서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편하게 꺼내볼 수 없다면 의미가 없었다.
물론 아날로그도 효율적으로 쓰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고, 디지털로 넘어오게 되었다. 그리고 언제든 원하는 부분을 골라서 볼 수 있는 ‘검색’기능은 내 삶에 큰 자유도를 선사해 주었다.
일 년을 쓰다 보니 이제는 에버노트의 편리함에 매번 감탄하거나 하진 않는다. 그 대신 에버노트 안에 담긴 것들의 소중함에 대해 생각한다.
에버노트에는 내가 보고 듣고 느끼고 경험한 거의 모든 것이 들어있다. 언제든 꺼내 볼 수 있는.
그러다 문득 재밌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안에 담긴 내용들은 얼마만큼의 가치가 있을까? 누군가에게 판다면 얼마에 팔릴까?
내 에버노트를 굳이 사려고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질문을 바꿔보았다.
나에게 얼마를 준다면 이걸 모두 포기할 수 있을까?
돈을 받는 대가로 나는 에버노트와 그 안에 기록된 것들을 전부 잃게 된다면?
위 질문에 대한 답이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내 에버노트의 가치를 말해 줄 것이다.
에버노트에 있는 것들 중에 내주기 아까운 것들이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보았다.
독서목록. 에버노트의 내부 링크 기능을 이용해 여러 개의 노트를 하나의 표에 모아놓으면, 책꽂이에서 책을 바로 꺼내 보는 것처럼 찾고 싶은 내용을 금방금방 찾아볼 수 있어서 편리하다.
에버노트는 스택-노트북-노트의 3개의 층위로 데이터를 관리할 수 있다. 나는 영어를 하나의 스택으로 만들어서 관리하고 있다. 이것은 단어장 노트북인데, 영어 공부에 유용하게 활용하고 있다.
인터넷을 보다가 저장해 두고 싶은 페이지가 있을 때, 에버노트의 스크랩 기능을 이용하면 Ctrl +C -> Ctrl +V 수준으로 간단히 해결된다. 태그를 여러 개 만들어 놓고 스크랩할 때마다 태그를 붙여 주면, 나중에 태그별로 분류해서 볼 수 있다.
To do list 어플은 여러 가지가 있다. 이 부분은 딱히 에버노트만의 특장점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저 난 에버노트를 많이 쓰기 때문에 할 일 목록도 에버노트로 관리하고 있다.
이 외에도 그때그때 떠오르는 아이디어나 생각들을 에버노트에 적어 두고, 나중에 글을 쓸 때 활용하기도 한다. 그리고 하루 동안 있었던 일도 가벼운 일기처럼 에버노트에 기록해 두고 있다.
이 모든 것을 나는 얼마를 받고 내줄 수 있을까.
계산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고민 없이 No! 할 수 있는 금액과
눈이 휘둥그레지면서 Yes! 할 수 있는 금액
그 사이에서 적정선을 찾았다.
1억 원을 불렀다.
나는 거절했다.
삶의 기록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감안하면 택도 없는 금액이다.
나는 10억 원을 제시했다.
10억 원은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돈이다.
지금 당장 10억 원을 받는다면 오케이 할 수 있겠다.
그런데 이번엔 주는 쪽에서 거절했다.
몇 번의 대화가 오간 끝에 합의점을 찾았다.
나도 제 값을 받았다는 느낌이 들면서, 주는 쪽에서도 손해 봤다는 생각이 안 드는 금액. 3억 원이다.
나는 3억 원을 받는 대가로, 에버노트를 다시 백지상태에서 채워나갈 수 있으리라.
하지만 나는 팔지 않았다.
가격만 확인한 채 돌아섰다.
에버노트에 들어 있는 것은 내 삶 전체였다.
내 삶을 팔아넘기려 했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삶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 같다.
앞으로 얼마를 줘도 팔지 않을 것이다.
가끔 궁금할 때 얼마를 부르는지 슬쩍 확인만 해보는 걸로.
돈을 얘기하다 보면 결국 삶의 얘기로 귀결된다.
사람의 삶에 가격을 매기려는 발칙한 시도는 상상으로 족하다.
3억 원이든 5억 원이든 그게 뭐가 중요하랴.
이미 소중한 것을 많이 갖고 있으니 나는 부자다.
이곳을 앞으로 더 빛나는 것들로 채워 나가리라 다짐했다.
나는 얼리어답터와는 거리가 멀다.
에버노트를 쓰기 시작하면서 '이 좋은 걸 왜 진작 쓰지 않았을까' 생각했지만 사실 에버노트는 나온 지 오래된 서비스다. 신문물이 아니다. 지금은 더 편리하고 다양한 기능으로 무장한 생산성 도구들이 여럿 나와있다.
하지만 일 년 동안 에버노트를 쓴 경험은 내게,
새로운 것들을 적극 탐색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가르침을 주었다.
관성에 매몰되지 않고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태도는 삶에서 많은 부분을 바꿔놓을 것이다.
에버노트에게 하나 더 고마운 것이 있다.
에버노트 강의를 통해 콘텐츠 코치님과 만났고,
이후 콘텐츠 과정을 수강하면서 브런치에도 발을 들이게 되었다.
에버노트가 없었다면 이 브런치 글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