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부다페스트
셋째 날
- 민속 박물관과 국회의사당
이 날은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일정이 정해진 관광일 경우는 그렇지 못하겠지만 시간을 나름대로 조정해서 활용할 수 있는 나로서는 이런 날은 그냥 쉬는 쪽을 택한다. 더욱이 시차적응이 덜 되어 계속되는 피로에 지친 나로서는 쉴 수 있는 좋은 이유가 되기도 한다. 마침 하바스씨도 개인적인 용무로 외출을 해야 하니 그냥 하루를 쉬는 것도 좋을 것 같았고 비가 개면 강변으로 산책을 나갈 생각을 하였는데 나의 안이한 생각과는 아랑곳없이 하바스부인이 박물관 나들이를 권한다. 하바스씨가 나를 위해 부인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이런 고마울 데가...
마침 아들 아틸라도 쉬는 날이라 함께 나서기로 해서 우리는 점심을 든 후 오후에 나서기로 했다. 혼자서도 트램(전차)을 이용하면서 돌아다닐 수 있었지만 손님 대접을 제대로 해야겠다면서 앞장서 주는 것이었다. 고마운 마음과 함께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우리 속담에도 있는 손님 덕에 이밥에 고깃국이라고 비록 그들의 입장에서도 먼 동방에서 온 손님 덕분에 모처럼 하루를 즐기는 좋은 기회가 되기도 하겠지만 그들의 시간을 뺏는 것은 아닌지 염려스러웠다. 하지만 그런 염려도 잠시 가는 동안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함께 하는 시간 속에서 그들도 나처럼 이 나들이가 즐거운 시간이란 걸 느낄 수 있었다.
민속 박물관 앞에선 어머니와 아들 (캐시와 아틸라)
우리의 첫 목적지는 민속 박물관이었다. 사실 어느 나라이건 민속 박물관은 일반적인 고고학박물관이나 미술관 못 지 않게 관심을 끌며 볼 게 많은 것이 사실이다. 나는 우리의 선조들과 먼 친척 아니면 적어도 이웃이었을 이들의 선조들이 살아온 삶의 흔적에서 우리의 민속유물과 어느 정도의 연관성이 있는지가 궁금하였다. 이들의 조상도 시베리아 루트를 따라 동방에서 이 곳 서양으로 온 것이기에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면 또 하나의 보람과 즐거움이 될 수 있기 때문이었다. 비록 오전보다는 비가 조금 덜했지만 궂은 날씨가 계속 되어서 우산을 들고 나섰는데 다행히 심하게 오지 않았다. 하지만 잔뜩 찌푸린 날씨에 수시로 가랑비처럼 내리는 날씨는 전형적인 유럽의 봄날씨이다. 사실 유럽은 4 월에서 5 월 사이가 우리의 장마처럼 비가 잦은 시기이다. 기온도 우리의 3 월처럼 쌀쌀하기 때문에 한국의 5 월처럼 생각하고 옷을 가볍게 입고 나섰다가는 감기 걸리기 딱 좋은 날씨이다. 그러기에 오죽하면 해가 비치면 집에 있던 사람들조차 모두 다 볕바라기 위해 거리에 쏟아져 나올까. 하지만 이런 날씨일 수록 박물관 구경에 좋은 점도 있다.
박물관은 페스트지구의 대표적 건축물인 국회의사당 부근에 있으며 원래는 최고재판소(우리의 대법원에 해당함) 건물이었다고 하며 개조하여서 민속박물관으로 활용하고 있는데 어디든 그렇지만 관공서 건물이 일반적으로 가지는 권위적인 위용은 대단하여서 박물관 안과 밖 모두가 웅장하고 화려하여서 박물관이라기보다 오히려 궁궐에 가까운 느낌이 들었다.
대법원 건물이었던 것을 짐작케 하는 민속 박물관 내부의 천정화, 그림 속의 정의의 여신이 법의 공정한 심판을 의미하는 저울을 들고 있다
캐시(하바스부인)는 고맙게도 전시되어 있는 여러 물품들을 가리키며 최선을 다해 설명해 주려 애썼다. 그 때마다 아틸라가 영어로 통역을 해 주었는데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람 사는 기본적인 모습은 대개 비슷하여서 이해하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더구나 민속 박물관 안에 있는 것 대부분이 농업이 중심이 되던 지난 시절에 쓰던 물건들이라 몇 가지는 우리의 시골에서 쓰던 농기구와 같은 것도 있어서 흥미로웠다.
그런데 낯선 것 한 가지가 눈길을 끌었다. 언뜻 보면 의자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어린아이를 데리고 들에서 일을 해야 하는 시골 농부들이 만든 어린이 보호대였는데 선반처럼 만들어서 아이의 몸집에 맞게 구멍을 뚫어서 어린아이 한 명이 들어가서 서 있을 정도의 크기로 만든 특이한 형태의 도구였다. 집에 아이를 봐 줄 사람이 있을 경우는 이런 것이 필요 없겠지만 아이와 함께 들에 나가서 일을 해야 할 경우 들고 나가서 그 곳에 아이를 가두는(?) 것이었다. 비록 다른 한 편으로 보면 그 것이 아이를 구속하는 하나의 도구처럼 여길 수 있기도 하지만 일하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일에 지장이 되지 않고 늘 눈길을 줄 수 있는 가까운 거리에 둘 수 있으니 부모와 아이 모두에게 아주 요긴한 것이기도 했다. 그 것이 발달하여 나중에 바퀴가 달리면서 오늘날의 유모차가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상상도 해 보았다.
어린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나무로 만든 도구
그 외 가장 일반적인 사람들의 한 평생을 묘사한 여러 물건들 (출생에서 성장과 혼인을 거치면서 사망에 이르기까지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전시실에서 살아가는 모습과 양식이 조금씩 다르지만 이 세상 어디든 기본적인 삶의 모습은 다 같다는 다시 한 번 느꼈다. 그들도 아이가 출생하면 기뻐하며 예쁘게 키우려고 노력하면서 성년이 되어 결혼을 할 경우에는 그 어느 때보다 화려하고 멋진 예복을 입고 축제를 즐기는 것이라든지 세상을 떠날 때 보이는 간소하면서 엄숙한 분위기를 내는 옷을 입고 애도를 하는 것 등 사람 사는 세상의 기본적인 것은 다 같은 것이라는 단순하지만 가장 보편적인 진리가 아니겠는가.
헝가리의 전통적인 결혼식 모습
즐겁게 구경을 마치고 밖을 나오니 부슬거리던 비도 그치고 걷기에 적당한 날씨가 되어 있었다. 함께 국회의사당 앞을 거닐면서 기념사진을 찍은 뒤 인근의 공원으로 걸어가면서 도시 곳곳에서 살아 숨 쉬는 전통과 문화를 느끼려 애썼다. 우리와는 달리 대부분의 건물들이 돌을 사용해 지은 까닭에 오랜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서 있는 것이 부러웠다. 그러기에 짧게는 백 여 년, 길게는 몇 백 년이 흘러도 약간의 퇴색은 있을지언정 늘 똑 같은 모습으로 꿋꿋이 서있는 이 나라의 건축물들에서 과거와 현재가 잘 어울려서 독특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이 나라 사람들 못 지 않게 옛 것을 소중히 아끼는 마음은 크지만 우리의 전통 건축물들이 불에 잘 타고 잘 허물어지는 나무와 흙으로 지은 건물들이라 이 나라의 석조건물만큼 잘 보존할 수 없는 것에서 아쉬움과 함께 부러움을 느꼈다.
강변에 웅장하게 서 있는 국회의사당 건물은 그 규모의 크기와 그 아름다운 모습에 모두가 찬탄을 하며 사랑하는 부다페스트의 대표적인 건축물이다. 요즘 흔히 말하는 랜드 마크에 해당되는 건축물인데 다른 오래 된 건축물들에 비하면 비교적 새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즉 1884 년부터 짓기 시작하여서 1902 년 완공 되었다고 하니 준공 이후로도 백 여 년이 흐른 셈이지만 다른 이름난 건축물들에 비하면 그리 오래된 건물은 아니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규모와 외부의 장식의 아름다움을 놓고 보면 부다페스트에서 단연 돋보이는 건물이라 하겠다.
국회의사당
국회의사당 내부는 누구에게나 개방하기에 그 안의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관람을 허락하는 시간과 인원이 정해져 있어서 그 것에 맞추려면 두 시간 정도 기다려야 하는데다 이미 많이 걸어서 피곤해 있는 하바스부인의 컨디션을 감안해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하고 그 대신 카페에 가서 잠시 쉬기로 했다. 특히 두 사람의 관광 안내에 대한 보답을 위해 음료수를 대접하고 싶다고 물어 보니 아틸라가 적당한 곳이 있다면서 앞장선다.
마침 아틸라가 안내를 한 그 곳은 국회의사당 앞에서 멀지 않았고 페스트지역의 중심지에 해당하는 자유 광장 옆에 있었는데 꽤 역사가 오래 된 카페라는 것을 색상이 바래고 다시 덧칠해진 탁자와 의자 등 내부의 고색창연한 집기에서 짐작 할 수 있었다. 그 곳에서 아틸라와 나는 맥주를 시키고 하바스부인은 케익과 함께 커피를 들었는데 한 잔의 차가운 맥주가 시차적응에서 오는 컨디션의 난조와 함께 계속 쌓이는 피로를 시원하게 씻어 주는 듯 온 몸으로 상쾌하게 퍼져 나갔다.
우리나라에도 길 가의 커피숍에서 차 한 잔 하는 것이 일상적이기는 하지만 유럽인들이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며 신문을 보거나 혼자서 잠시 여유를 즐기는 것은 빠지지 않는 하루의 중요한 일과이며 누구나 즐기기에 그런지 커피 한 잔의 값은 상당히 저렴한 편이었다. 우리나라와 비교하면 대략 절반 수준이었는데 사실 헝가리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보다 대체적으로 비싼 서유럽의 물가와 비교해도 커피숍에서 맛보는 커피 한잔의 값은 결코 비싸지 않다. 그 이유는 커피가 흔히들 말하는 기호품이기 이전에 물처럼 당연히 마시는 일반 생필품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더욱이 커피숍 안에서 마시지 않고 들고 나갈 경우(테이크 아웃) 비싸지 않는 그 가격에서도 또 절반으로 떨어지니 호주머니 사정이 넉넉하지 않은 배낭여행자에게도 잘 뽑아 낸 커피 한 잔은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곳이 바로 유럽이다.
페스트 지역의 자유광장, 비에 젖은 바닥으로 인해 건물이 물 위에 떠 있는 듯 보인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와 트램을 번갈아 타면서 잠시 시내중심가를 걸어가며 시내 구경을 한 뒤 집에 오니 먼저 집으로 돌아온 하바스씨가 맛있는 저녁을 준비하고서 우리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하바스씨는 무척 가정적이어서 저녁식사의 경우 부인을 돕거나 혹은 혼자서도 잘 준비하는 편이라고 말하며 하바스씨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헝가리 남성들이 가정적이며 집안일을 늘 부인과 함께 한다고 덧붙였다. 아마도 공산주의 국가가 되면서 가정에서의 남녀평등을 먼저 이룬 것이 그 한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 두나 (Duna) 강과 세체니 다리, 그리고 성 이슈트반 성당
저녁을 먹은 뒤 하바스씨와 아틸라와 함께 산책을 나섰다. 부인은 집안일과 설거지를 해야 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를 위해 안내하느라 낮 동안 내내 걸어 다닌 피곤함 때문에 따라 나서지 않았다. 하긴 그 연세에 더 이상 걷는 것도 무리일 것이다. 다행히 비도 완전히 그치고 시원한 바람이 부는 저녁 산책은 상쾌하기 이를 데 없었다. 비록 우리나라의 대도시에 비하면 인구는 작지만 그래도 이 나라의 수도이며 제일 큰 도시인데도 우리의 대도시에 비해 부다페스트는 상당히 좋은 자연환경을 가지고 있다. 한창 녹음이 짙어지는 산과 시내 곳곳에 펼쳐져 있는 울창한 숲이 가득한 공원 그리고 쉼 없이 흐르는 풍부한 수량의 강이 도시를 가로지르고 있으니 언제나 맑은 공기를 마음껏 마실 수 있는 곳이 이 곳이다.
집 앞을 나와서 몇 블록을 지나 하바스씨가 앞장 선 길은 강을 따라 이어지는 산책로였다. 이미 이 도시의 맑은 공기를 호흡하고 있으면서도 문득 내가 부다페스트에 와 있는 것인가 하는 실감이 나지 않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 이유는 시차적응이 덜 된 탓에 여전히 머리가 어지러운 탓도 있지만 단숨에 헝가리로 날아온 바람에 (비행기 안에서 잠시 졸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 상공을 날고 있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마치 아직 부다페스트에 오지 않았고 마치 책이나 TV 를 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석양빛을 받고 불그스레한 빛을 띠는 웅장한 국회의사당 건물을 보고 강물의 흐름을 느끼는 순간 이 곳이 부다페스트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실히 깨달았다.
이 나라 사람들은 강의 이름을 "두나"라고 했다. 사실 "다뉴브"란 말은 영어식 이름인데 이 강을 접하고 사는 사람들과 국가들(모두 열 개의 나라를 지나간다)에는 해당되지 않는 이름이다. 즉 강의 발원지인 남부 독일에서 오스트리아를 거칠 때는 "도나우"강이라고 불리며 슬로바키아에서는 "두나이" 그리고 헝가리에서는 "두나"라고 불리는데 그 다음을 거치는 불가리아와 루마니아에서는 "두나리아", "두나브" 라고 조금씩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국제하천이다. 그러기에 정작 강 유역에서 사는 본고장 사람들은 다뉴브라고 부르지 않는다. 다만 고대 그리스 시절 이 강의 존재가 그리스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라틴어로 "다니비우스"라고 불려진 뒤 영어로 번역되는 과정이서 다뉴브라고 부르게 되고 우리에게도 그렇게 알려진 것이다. 마치 우리가 우리나라를 한국 혹은 대한민국이라고 불러도 밖에서는 코리아라고 하듯.
그런데 그런 식으로 우리에게 정작 현지의 발음과는 다른 이름으로 알려진 것이 참으로 많다. 대표적인 것이 부다페스트 다음으로 방문하게 되는 "살츠부어크 (Salzburg)"의 경우다. 우리는 해방 전 일본 제국주의 시절 일본인들로부터 배웠던 독일어 발음에 따라 그 도시를 "잘쯔부르크"라고 하지만 정작 오스트리아사람들은 물론 유럽의 다른 나라 사람들도 그 도시를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언젠가 그 도시에서 만난 기념품 가게의 주인과 대화를 나누며 우리가 쓰고 있는 발음 방식으로 잘쯔부르크라고 하니 마치 바짝 군기가 잡힌 나찌 시절 독일 병사들이 고함치듯 외치는 발음과 같이 딱딱하고 거칠다며 우스워 했던 일이 있다. 우리가 외래어를 현지의 발음에 맞게 고쳐 쓰기로 한 것이 어제 오늘 일이 아니건만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면서도 왜 유럽의 고유 명사의 발음은 아직도 고치지 않고 일제시대 때 쓰던 틀린 발음을 그대로 쓰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래도 이 강은 헝가리만의 강이 아닌 유럽의 여러나라를 흘러 가는 국제하천인 만큼 다뉴브라고 불러도 상관은 없지만 현지의 지명 정도는 이제는 바로 적고 불러야 한다고 본다.
세체니 다리 - 19 세기 후반 영국의 기술 지원으로 건설한 부다페스트의 명소
세체니 다리 앞에 장식되어 있는 돌사자상, 다리 건설에 일조를 한 영국의 상징이기도 하다
강의 수질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석회질이 많이 섞여 있는 듯 회색빛이 은은히 감도는 녹색으로 보였는데 언뜻 보면 탁해서 오염이 심한 강물로 보였지만 하바스씨의 말로는 강 속에는 많은 종류의 물고기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하긴 우리의 옛 말에도 물이 너무 맑으면 고기가 살지 않는다고 하였듯 이렇게 탁한 강물이어서 그 속에 많은 고기들이 살고 있을지 몰라도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다. 저녁이어서 강태공들이 집으로 돌아가서 그런지 아니면 자연보호를 위해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낚싯대를 드리운 사람은 어디든 보이지 않았다.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며 한 이 십 분 정도 걸어가니 세체니 다리가 보였다. 부다페스트에서 가장 이름난 이 다리는 그 어떤 다리보다도 멋있고 아름다운 구조물이다. 비록 새로 지은 날렵하고 멋진 다리도 있지만 현수교와 비슷한 모습을 지닌 이 다리의 양쪽에 버티고 서있는 돌탑의 육중하고 훌륭한 조각 덕분에 다른 다리에 비해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다리인데 이 다리를 건너면 페스트 지역의 가장 멋진 성 이슈트반 성당과 바로 이어진다. 지어진 연대는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지만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는 다리인데 다리 입구에 있는 초석에 새겨진 동판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 동판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시절 이 나라와 가장 가까운 우방이었던 영국이 다리 건설에 적극적으로 협조를 해 주어서 영국의 기술자가 설계를 하고 직접 건설을 지휘했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다리 양 쪽에는 대영제국 시절 영국의 상징물인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는 것이다.
강을 건넌 뒤 우리가 지나 왔던 부다 지구 쪽으로 바라보니 부다 캐슬과 마챠시성당, 그리고 어부의 요새 등 모든 건물들이 야간 조명과 어우러져 아름다운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어느 도시이든 낯보다 밤경치가 아름답게 느껴지는 법이지만 모든 것이 다 그대로 역사적 유물이며 훌륭한 건축물로 이루어진 부다페스트의 야경은 지금껏 보아 왔던 많은 도시들보다 훨씬 아름답게 느껴졌다.
성 이슈트반 성당 앞에서 하바스씨와 아틸라와 함께
세체니 다리와 이어진 오래된 거리를 걸어가니 페스트지구의 가장 높은 건물이 눈앞에 한 걸음 더 성큼 다가왔다. 바로 성 이슈트반 성당이다. 커다란 돔과 두 개의 첨탑을 가진 이 성당은 부다페스트 제 1 의 성당이다. 초대 헝가리 왕이었던 이슈트반을 기리는 이 성당의 돔 높이는 96 미터 인데 헝가리인이 896 년에 이 땅에 정착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그 높이를 정한 것이라 한다. 성당 내부에는 기독교를 이 땅에 널리 알리는데 공이 컸던 국왕 이슈트반의 유체의 일부분과 유품이 보존되어 있다는 이 성당은 1851 년에 짓기 시작해서 1906 년에야 완공하였다고 하며 내부를 잠시 들여다보니 저녁 시간인지라 관광객은 거의 없고 신자로 보이는 몇 사람만이 예배의자에 앉아서 묵상에 잠겨 있는 것이 보였다.
그 곳을 나온 우리는 길 건너편 칵테일 바에 들어갔다. 그 곳이 하바스씨의 단골집인 듯 주인과 종업원이 하바스씨와 아틸라를 아주 반갑게 맞이하면서 인사를 나누며 함께 웃는다. 그들의 격의 없는 모습은 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즐거워 보였으며 하바스씨가 내가 한국에서 왔다며 그들에게 소개하니 모두들 한층 반갑게 대해 주었다. 그 느낌이 그저 단골손님을 따라 온 낯선 손님에게 예의상 반갑게 맞아 주는 것만이 아닌 것을 그들의 따뜻한 환대에서 알 수 있었다. 그러기에 맥주 한 잔을 즐기는 동안 그들은 줄곧 한국에 대해서 많은 것을 물으며 귀를 기울였다. 우리나라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이 예전과 다름을 느끼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