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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태옥 Jun 18. 2023

《미치도록 눈부시던》 잔칫날

1세대 시골언니들의 <미치도록 눈부시던> 북콘서트

대체 무슨 일을 벌인겨?     


북 콘서트장 입구가 왁자하다.

“아이고메, 오분임 회장님 오셨어요?!”

역시 지각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하고 이른 출석은 가장 먼 곳부터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다.

해남 땅끝에서 오신 오분임(전 전남여성농민회) 회장이 구술자 9명 중 첫 테이프를 끊는다. 같은 마을 사는 조카 오은숙 씨의 부축을 받은 오 회장은 앞다퉈 아는 체하는 사람들에게 금방 둘러싸인다.

“오메 누가 누군지 하나도 못알아 묵것네”

뒤이어 부여여성농민회 신지연 씨와 함께 ‘호되게 똑똑한 여자’ 성옥선(전 충남여성농민위원회) 위원장이 들어선다. ‘여농(여성농민)기행’ 갔던 2년 전보다 더 젊어지고 활기차 보인다.

경상도 사투리로 다시 행사장 입구가 떠들썩하다. 키 크고 마른 남자가 성주 참외 두 상자를 무겁게 들고 들어서고 그 뒤를 임순분(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 ‘이하 전여농’) 회장과 셋째딸, 이석주 소성리 이장 부부, 박형선 원불교 교무와 소희·태령 씨 등 성주사람들이 몰려온다. 성주 참외를 들고 앞장선 이는 임순분 회장 큰아들이다. 성주 참외 덕에 행사장은 달콤함을 더한다.

김제에서 올라온 장순자(초대 가톨릭농민회 전국부녀분과위원회) 위원장이 훠이훠이 들어서고 오랜만에 마주한 사람들과 바삐 인사를 주고받는다. ‘(유)행복한고구마’ 시그니처 ‘달수 군고구마’와 ‘고구마말랭이, 고구마 칩’을 잔뜩 들고 고구마 유기농 1호 농민 무안 이정옥(초대 전여농) 회장 뒤를 딸과 아들 그리고 또다시 어린 아들과 딸들이 잇는다. 지난 3년 동안 병고에 시달려 홀쭉해진 광주 이종옥(전여농) 부회장과 남편 나상기 선생님이 막내딸의 부축을 받으며 들어선다. ‘앉으나 서나 같은 키’라는 이종옥 선배는 오랜만의 서울 나들이에 화사함을 잔뜩 올렸다.

전국에서 농사짓고, 농민운동 살아왔던 여성농민운동 선후배들의 반가운 안부로 북콘서트 장이 들썩였다.

1세대 여성농민들의 삶을 기록하자며 잠자고 있던 조직을 깨워 재건 한 ‘땅의사람들’ 박남식 회장은 ‘화윤차례문화원’ 제자들과 2시간 전부터 준비한 다과와 다식을 내놓는다.

떡 해 갖고 온다던 무안 고송자(전남여성농민회) 회장은 같이 농사짓는 작은아들이 코로나 진단을 받는 바람에 갑작스레 불참을 알려왔고, 산청 임봉재(전 가톨릭농민회) 회장은 건강이 나빠지면서 서울까지의 긴 여행이 무리였다.


구술에 참여했던 9명 중 7명이 참석한 북 콘서트 《미치도록 눈부시던》은 40년 전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하 전여농)’을 만들기 위해 온 힘을 다했던 사람들의 축사와 축하의 꽃다발이 넘쳐났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독재 시대를 정면으로 맞아내며 논과 밭, 마을과 거리에서 투쟁했던 동지들의 굽어진 허리와 투병의 흔적들을 살피고 안부를 물으며 눈물과 웃음을 연신 찍어낸다.

양옥희 전여농회장과 하원오 전농의장, 추천사를 쓴 정현백 성균관대 역사학과 명예교수까지 모이니 여성농민운동 40년 역사가 꿰어진다.


2019년 겨울 어느 날, 전여농 초대 총무에서 사무국장으로 여성농민운동에 생을 바친 박성자 언니가 사는 평택집에서 박남식, 이종옥, 권미영, 이태옥 등 전직 여성농민 다섯 명이 작당했던 ‘1세대 여성농민운동가 생애구술기’는 그저 한 권의 책이 아닌 40년 ‘한국여성농민운동사’의 한 자락을 펼쳐 낸 듯하다.

손님 맞느라 분주한 미영 언니에게 소리쳤다. “언니 우리가 무슨 짓을 한거야?”     


 ‘미치도록 눈부시던


6월 6일 한창 모내기와 밭작물을 키워내야 할 손길들이 서울 한복판 인사동 상생상회 공유공간에 모였다. 오후 2시, 1세대 여성농민운동가 구술기 《미치도록 눈부시던》 북 콘서트장의 불이 꺼지고 영상에는 지난 5월 6일 돌아가신 전남여성농민회 한한순 초대회장님의 모습이 첫화면에 흐른다. “당신만 믿고 시집왔는데 이건 맨날 호미질이야, 열쇠도 없는 딸딸이 차에 이 몸 싣고 밭으로 가네” 귀는 잘 들리지 않았고, 기억도 까무룩 했던 한한순 회장님은 2020년 2월 광주 광산구 집에서 만난 우리들에게 귀에 익은 노래를 들려주었다. 

다음 소절은 "생각하면 그 얼마나 힘들었던가 나혼자서 길을 가면 눈앞을 가려” 개사 전 유행가 ‘마음 약해서’로 돌아가 버렸지만, 여성농민운동가 한한순은 ‘농약춤’까지 선보이며 기억을 살리려 애썼다. 엄마 등에 업혀 마을 교육이며, 아스팔트 농사지으러 무던히도 따라 다녔을 딸이 “엄마 여성농민가 불러봐”라고 부추겨댔지만 소용없었다.

결국 한 회장님의 유머와 재치 넘치는 입담은 들을 수 없었고 엄마의 뒤를 이어 농민운동가로 살아가고 있는 아들과 함께 기억을 더듬어 보자며 후일을 도모했다. 결국 약속은 지키지 못한채 한달 전 한 회장님을 떠나보냈다. 양 갈래머리를 한 큰애기적 한 회장님 사진에 탄식과 박수가 터져 나온다. 그랬었지 우리 엄마들도 처음부터 엄마는 아니었지, 어린아이였을 때도, 피어나는 청춘일 때도 있었지….

고 김순옥 회장, 고 한한순 회장님 모습이 영상에 흐르자 먹먹해 진다. <미치도록 눈부시던> 을 기획했던 박성자 전여농 초대 사무국장은 이때부터 목이 메었다.

두 번째 구술자 부여 성옥선 위원장을 만나러 간 2020년 2날 어느 날 잠시 들렀던 김순옥 (9기 전여농) 회장님은 신장에 탈이 나서 투석으로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계셨다. 1세대여성농민운동가 생애 구술기의 한 몫을 담당해야 할 김순옥 회장님이 다음 해 돌아가셨다는 부고와 추모의 글들이 온라인을 타고 흘렀었다. 영상엔 그때 찍었던 3컷의 사진이 흐른다. “고통스러워하는 김 회장님을 만나고 돌아서는 발길은 참 많이 속상했었다”라는 멘트와 함께.

엄혹했던 70~80년대를 살았던 선배들이 큰애기 때로 돌아가기도 하고 결혼사진 속 신부로, 투쟁 현장을 달구던 운동가로 변신해가며 화면을 가득 메웠다.

《미치도록 눈부시던》은 9명의 이야기가 아닌 11명의 이야기였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하얀 것은 종이요, 검은 것은 글씨로 이것이 무슨 뜻인지 알고 싶다던 충남의 순자 엄니들과 평생 함께하겠다는 다짐으로 만들어 냈던 전여농 깃발에 함께 한 분들의 삶을 기록하고 싶었습니다. 여성농민운동의 선봉에서 디딤돌이 되어주셨던 선배 동지들의 이야기를 여기에 담았습니다.”

빼곡히 적어온 인사말을 하던 박성자 언니가 “아름다웠던 여행을 마치신 분들도 계시고 건강상 인터뷰가 어려운 분들도 계셨습니다. 그리고 흔쾌히 마음 내어주신 오분임, 성옥선, 임봉재, 장순자, 이종옥, 임순분, 이정옥, 고송자, 박남식 선배 동지들” 이름을 부르다 목이 메어 울먹이고 만다. 자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도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연신 코를 훌쩍인다.


2019년 전여농 30주년 기념식장에 한한순 회장님이 휠체어를 타고 등장하는 모습에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는 성자 언니는 만날 때마다 1세대 여성농민운동가 삶을 기록하는 것이 버킷리스트라고 이야기 했다. 

‘모르쇠’도 삼세번을 넘기는 어려웠는지 성자 언니의 세 번째 하소연 끝에 “네 해볼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미영 언니도 할거지?”라며 시작한 구술기가 3년이나 걸릴지 몰랐다.

두어 달에 한 번씩 ‘여농기행’ 가고 글로 만들어 내는 작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기획팀의 젠더에 대한 이견과 논쟁까지 겹쳐 급기야 1년여 중단되는 사태를 겪기도 했고 우여곡절 끝에 기록자도 2명에서 4명으로 늘었다. 광주 이종옥 선배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급히 부탁을 했음에도 손잡아 준 예산농부 강희진 작가는 다섯번이나 담양, 광주 등을 찾아 인터뷰하며 함께 기억을 더듬어야 했다. 무안, 광주, 해남 등 가까운 곳에 4명의 구술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뒤늦게 합류하는 바람에 고흥에서 서울까지 가장 먼길을 달려와야 했던 해승이의 흔쾌한 합류도 고마웠다. 


기획 단계 12명에서 최종 9명의 생애사를 책으로 묶어 세상에 내놓으며 벌인 기념잔치는 초장부터 웃다, 울다 ‘난리부르스’ 였다.

5분을 배정했던 성자 언니의 인사말은 눈물에 막혀 다 주워 담지도 못하고 양옥희 전여농 회장에게 마이크를 넘겨야 했다. “실은 좀 섭섭했었다.”라는 말로 시작한 양 회장은 “소문으로 들어야 했던 전여농 선배들의 기록작업에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하고 고마웠다”라는 말로 마음을 전했다. 전여농의 섭섭함은 전직 전여농 회원들로 구성된 기획 및 기록단의 한계로 퉁 쳐야지 어쩌겠는가?

하원오 전농 의장은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농업 농민들의 구호는 변함이 없다”라며 40년 전 농업·농촌·여성농민을 투쟁으로 일으켜 세웠던 1세대 기록작업에 큰 박수를 보냈다. 선배들의 길 따라 오늘 농촌 현장을 굳건히 지키겠다는 약속 또한 이어졌다.

《미치도록 눈부시던》 추천사를 쓴 정현백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박성자, 박남식 선생은 전국여성단체연합 시절 함께 운동했던 동지”라며 “역사학자로서 여성운동가로서 늘 공백으로 남았던 여성농민운동가들의 생애 구술사는 역사학자로서 너무 반갑고 고마운 작업이며, 여성사의 사료적 가치로서도 의미가 크다”라며 반겼다.

최현숙 생애구술작가, 정성숙 여성농작작가 또한 추천사를 부탁하자마자 “너무도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작업을 했다”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거듭되는 칭찬에 올라간 어깨가 하늘을 찌를 기세다.     


그니께 눈부셨던 때는     

 

왼쪽부터 이정옥, 성옥선, 오분임, 이종옥, 임순분, 장순자, 박남식 1세대 여성농민운동가들이 한자리에 섰다. 오랫동안 그렸던 그림이다.

이정옥, 성옥선, 오분임, 이종옥, 장순자, 임순분, 박남식 구술자 7명이 무대에 올랐다.

《미치도록 눈부시던》을 기획하고, 여농기행을 떠나고, 글을 쓰고, 다듬고, 모으고, 책으로 내기까지 수없이 그렸던 그림이다. 고송자, 임봉재 두 분의 부재가 너무도 아쉽다.

무대는 70년대, 80년대 어느 순간으로 돌아간 듯하다.


“선배님들에게 가장 눈부셨던 때는 언제였나요?” ‘답정너’ 같은 질문을 던졌다.

오분임 회장이 “나가 먼저 할라요” 번쩍 손을 든다. ‘마이크만 쥐면 기가났제’의 주인공답게 호기롭게 마이크를 잡았지만, 감격 때문인지 긴장한 탓인지 마이크 쥔 손은 떨리고 목소리 톤은 높았다. “나는 일제징용 살았던 우리 아부지 한이나 풀자고 데모를 댕겼어요. 그란디 여성농민운동 만나면서 많은 것이 달라졌지라. 풀베는 부역도 없앴고, 수세도 우리가 없앴고. 나가 전남도청 앞에서 농산물값 물어내라고 데모하다가 잽혀 가서 한 달간 감옥 살고 나왔는디 그때도 당당했어라. 고생스러웠어도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가 좋았제. 지금도 나는 말하고 잡어. 도시가 꽃이라면 농촌은 뿌리여. 뿌리가 살아야 하지 않것소. 오랜만에 이런 자리에서 여러분 봉께 참 좋소.”


구술시기를 따라 자연스럽게 마이크는 성옥선 위원장에게로 넘어갔다. 성 회장이 자리에서 번쩍 일어선다.

“우리한티 가장 눈부셨던 때는 어려웠어도 옳다는 것 하나만 믿고 운동했을 때여유. 지는 농사도 많지 않았고 농민회 하면 ‘빨갱이’라고 혔던 때라, 공무원 하는 집안 오빠들 모가지 떨어진다고 집안사람들이 협박했어도 굴하지 않았시유, 지금은 나이가 먹어 뒤에 있지만, 마음은 예전과 똑같아유. 여기 계신 분덜도 다 같은 생각 아닐까유? 어려웠어도 그때가 그리운 걸 보면 고생보다 기쁨이 더 컸나봐유.”


지리산 기운 듬뿍 받았던 산청 ‘봉재의 정원’ 주인공인 임봉재 회장 몫을 더해 가톨릭여성농민회 활동을 함께 했던 김제 장순자 위원장에게로 마이크가 넘어갔다.

“나는 에피소드 하나 말할라요. 1985년 8월 전북 부안에서 열린 ‘소값 피해보상 궐기대회’에 참가했다가 경찰서 잡혀가서 5일간 구류를 살았어요. 경찰서장이 제가 있던 여자유치장에 걸린 <주자십훈>을 저더러 낭독하라고 하데요. <주자십훈>을 읽어내려가는데 ‘여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 병든 후에 후회한다’라는 내용이 있길래 ‘남자를 가까이 하지 말라. 병든 후에 후회 한다’로 바꿔 읊었더니 여기저기서 깔깔대며 웃었어요. 나중에 보니 그 <주자십훈>을 떼버렸더라고요. 권력에 굴하지 않고 맞섰던 투쟁 현장이 나에게는 눈부신 때였어요.” 평생 독신으로, 여성농민으로, 생명농사꾼으로 살던 장순자 위원장은 얼마 전부터 눈도 아프고 근력도 떨어져 짓던 농사를 다른 이에게 넘기고 말았다.


《미치도록 눈부시던》 기획에 참여했고 초반 여농기행에 참여했던 이종옥 부회장은 “농민가에 설렜고 농민운동가 나상기 씨와 결혼으로 또 한 번 설렜었다.”라며 유머코드를 잊지 않는다. 여성농민들 곁이면 어디든 달려갔던 이 부회장은 부모 손길이 필요했던 자신의 아이들은 동지들에게 맡겨두고 1년 여를 청주에서 살며 농촌탁아운동 사례를 만들었다. “광주로 삶의 터전을 옮긴 후 전남여성농민회를 만들던 때였어요. 농민회나 여성농민회 하면 빨갱이라고 손가락질하던 시절 지금은 순천으로 통합된 승주군에서 마을교육하고 나오는 나를 연행하려고 경찰차가 대기하고 있었나봐요. “아 잽혀가것구나” 하고 마을회관을 나서는디 마을사람들이 스크럼을 짜고 대기해 두었던 택시에 태워 저를 그곳에서 빠져나가게 해줬어요. 든든한 감동이었고 그 힘으로 살았던 것 같아요.” 16년 동안 유방암과 투쟁 중인 이종옥 부회장은 건강 또한 잘 지키는 것이 여성농민운동임을 강조한다.


2016년 7월 성주가 사드배치 지역으로 발표되면서 임순분 소성리부녀회장은 투쟁현장에 다시 우뚝 서야 했다.

“대구에서 나고 자란 여자에게 시골살이가 수월했겠어요? 그래도 어찌어찌 소성리 까만 하늘의 별에 반해 시골살이를 시작했는데 여성농민교육에 한번 가보고는 ‘이게 사람 대접받는 것이다.’ 싶었어요. 그동안 애기엄마, 누구의 각시로만 불리다가 여성농민교육에 온 여자들이 죄다 이름을 부르는 거예요.” 임순분 씨라고 불리고, 임순분 이라고 기록되는 것을 보면서 여성농민운동을 시작한 임순분 부녀회장은 1992년 2대 전여농 회장까지 맡았다. 2017년 4월 26일 전쟁무기 사드가 불법으로 소성리 달마산 근처에 배치된 이후 여성농민운동을 함께 했던 소성리 부녀회원들과 매일 평화투쟁을 치르다 보니 어느덧 한반도 평화운동 중심에 서 있더란다. 임순분 회장이 조용히 덧붙인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여성농민운동이에요.”

박정희 유신독재와 전두환, 노태우 시대를 정면으로 마주하며 구류도, 구속도 마다 않고 거침없이 마이크를 잡고 투쟁가를 불렀던 그때가 그리도 눈부셨다는 1세대 시골언니들이다.

무안에서 유한회사 ‘행복한고구마’를 일구고 있는 이정옥 회장이 마이크를 받는다. 1979년 부당한 ‘을류농지세 거부투쟁’을 하면서 농민운동에 참여하게 됐다는 이정옥 회장은 1980년 이화여대에서 열린 여성교육에 참여하면서 알게 된 ‘다람쥐 꽃신’ 이야기에 눈이 번쩍 떠졌다고 한다. “미국이 줬던 우유며, 밀가루가 우리 쌀과 농산물을 대체하기 위한 ‘꽃신’이었더라고요. 맨발로 걷지 못하게 다람쥐들을 길들였던 거지요.” 그 후 이정옥 회장은 아이 둘러업고 마을 교육을 다녔다. ‘여성농민 조직을 따로 만드는 것은 분파라며 문제를 제기하던 농민회 남성 동지들과 논쟁하며 1989년 12월 18일 전여농 결성대회를 했던 그때가 설레고 눈부셨던 인생의 ‘절정’이었음을 고백한다.


“2019년 전여농 30주년 행사에 가서 저는 그랬어요. 제게는 전여농 50주년이라고요. 1989년 12월 18일이 있기 전 20년의 활동을 더해야 전여농 30년이 완성된다고 생각해요.” 박정희 유신정국인 1972년 발효된 긴급조치 1호가 자신에게는 사회운동의 시작점이 되었다는 박남식 회장은 전여농 창립일에 어찌나 좋아서 손뼉을 쳤던지 사나흘 몸살을 앓았다. 농촌 현장에서 농사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함께 어깨 걸어줄 후원조직도 중요하다고 생각한 박남식 회장은 ‘땅의사람들’을 만들어 전여농 전·후를 후원했다. 국내외 후원자를 조직하고 농민행사가 열리면 부스를 열어 부침개며 국수를 팔아 후원금을 마련하며 여성농민운동의 길잡이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독재 시절, 농민운동-여성농민운동으로 강을 건너온 9명의 구술자들은 입 모아 말한다. “권력과 편견에 맞서고, 가부장을 넘어 여성농민조직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그때가 가장 눈부셨다”라고.     


 라떼는 말야소 쟁기질 해봤소?     


 2부 행사로 진행된 1세대 시골언니와 힙한 MZ시골언니와의 ‘라떼는 베틀’은 멋짐이 폭발하고 폭소와 감탄으로 물들었다. 김제 장순자 위원장과 무안 이정옥 회장이 1세대를 대표하고 화천에서 남편과 함께 농사짓는 30대 송주희 씨와 남양주에서 아버지와 농사짓는 20대 김한솔 씨가 MZ 시골언니를 대표해 베틀에 나섰다.

세대차이를 어떻게 세대공감으로 바꿔 나갈지 무대에 오른 이도 지켜보는 이들도 흥미진진해졌다.


“밭에 나가서 음악 들으며 농사일을 하면 몸은 고돼도 마음은 충만해진다”라는 20대 농부 김한솔 씨가 “라떼는 말이야” 포문을 연다.

“제가 사는 면에는 청년농부가 저 밖에 없어요. 저를 알리지 않아도 저절로 유명한 스타가 되어 있더라고요. 20대에 저절로 스타가 된 사람 나와보세요.”

청년여성농업인 송주희, 김한솔 씨가 40년 선배 시골언니들에게 "라떼는 말야" 베틀을 걸고 있다. 이토록 '눈부신 무대'라니.

‘20대 스타’라는 말에 이정옥 회장이 마이크를 잡는다. “라떼는 시골에서 연예하기가 쉽지 않았는디, 40년 전 촌 동네가 쩌르르하게 달콤한 연애로 스타가 되본 사람 있음 나와 보씨요.”

첫 ‘스타베틀’은 박수와 웃음소리로 보아 무승부인 듯하다.

서울에서 대학 졸업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부모님과 농사짓다가 남편까지 농민으로 만들었다는 당찬 청년농부 송주희 씨가 “라떼는 말야” 마이크를 잡았다.

“농사 1년 차가 되니까 트랙터를 몰고 시내를 활보해보고 싶었어요. 청바지에 남방 기깔나게 차려입고 선글라스 끼고 한 손은 트랙터 창문에 떡 하니 올린 채 한 손으로 트랙터 운전대 돌리니 지나던 사람들이 박수 치더라고요. 박수받으면서 트랙터 타고 시내 누벼본 사람 있나요?”

“여보쇼 아우님” 송주희 씨에게 마이크를 건네받은 장순자 위원장이 조용히 말을 잇는다.

“제가 아우님만 한 청년일 때는 트랙터도 없었고 경운기도 겨우 생겼어요. 그래서 말인데 논밭에서 소 쟁기질 해봤어요?”

장순자 위원장의 KO 펀치 급 ‘소 쟁기질’에 좌중이 뒤집어진다. 청년농부들은 ‘소쟁기질’에 당해낼 도리가 없어 보였다.

다시 송주희 씨가 마이크를 잡는다. “제 SNS 팔로워가 8,000명이에요. 제가 밭에서 라이브 한번 켜면 1,000여 명의 팬들이 동시 접속해요. 그리고 직거래판매로 이어지지요. 8,000 팔로워 가져보신 적 있나요?”

1세대 시골언니들이 온라인에 취약하니 속절없이 무너지는 듯했으나, 이정옥 회장이 마이크를 잡는다. “고구마 유기농 1호 농민으로 2004년 농업회사를 꾸려 낮에는 고구마밭에서 일하고 밤에는 홈페이지 관리하면서 지금은 8~9,000명의 소비자가 찾고 백화점에 납품도 한다.”라며 반갑게 화답한다.

이쯤 되니 대결보다  “우리 같이 뭘 같이 좀 해볼까”하는 동지애가 싹트는 듯하다. 

힘들었던 이야기들은 자랑거리가 되었고 세대는 다르지만, 식량을 책임지는 여성농민으로서의 자부심은 ‘시골언니들’의 공감과 연대를 굳게 했다.

보물같은 후배농부들을 바라보는 1세대 시골언니들의 눈길이 사랑스럽다.

《미치도록 눈부시던》을 읽으면서 ‘많이 울었다’는 김한솔 씨는 선배들의 노력과 헌신 덕분에 편하고 덜 외로운 농부가 될 수 있었음에 감사함을 전했고 송주희 씨는 언니들의 역사를 이어 뒤에 올 후배 농부들에게 새로운 역사가 되겠다고 다부진 약속을 건넸다.

이정옥 회장은 “전여농 초대회장 할 때가 서른다섯 살 철없던 때였지만, 지나고 보니 그때 최선을 다하는 것이 중요했다”라며 후배 농부들을 격려했다. 

“80년대 초 농민회에서 쌀 생산비를 조사할 때 어머니가 농사는 따지는 것이 아니라고 했어요” 마지막으로 장순자 위원장이 말을 잇는다. “농사는 따져보면 간장값밖에 못 건지니 돈 계산 하지 말고 지어야 한다는 말씀이었는데 한편으로는 농사짓는 일이 돈으로 계산할 일이 아니라는 말씀이기도 했어요. 그러니 우리 모두 너도나도 농사짓겠다고 농촌으로 후배 농부들이 몰려올 수 있도록 노력해 봅시다.”

세대대결로 시작한 ‘라떼는 말야’ 베틀은 훈훈한 ‘세대공감’으로 치닫는다.      


 여성농민농민이다.     


“1.5세대 구술작업 시작해야하는 것 아냐?”

“그러게 누군가 하겠지?”

“1년에 한 번은 언니-동생 시골언니들 만남의 장을 만들어 봐요.”

“그러게 참 좋네”

“오랜만에 이런 시간 힘이 나네요.”


예산에서 토종씨앗박물관 운영하는 김영숙 선배와 마늘쫑주먹밥, 두부채소카나페, 후무스샌드위치  등 오감 만족한 성찬을 차려낸 녹색당 성미선 선생 덕에 격조 높은 밥상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아쉬움과 기대의 말들을 쏟아진다.

소란함을 뚫고 박남식 회장이 마이크를 잡고 이석주 소성리 이장님을 무대로 불러낸다. 

임순분 회장이 남편을 잃고 우울과 무력감과 싸울 때 소성리 평화투쟁 현장으로 끌어내, 우뚝 서는데 큰 힘이 된 이석주 이장에게 ‘땅의사람들’은 ‘덕분에(愛)’상을 시상했다. 


부상으로 드렸던 여름 중절모자가 잘 어울린다. 임순분 회장과 마지막까지 소성리 평화를 지킬 사람이다. 소성리에 다녀와야 겠다.

밥 먹다가 홍두깨 맞은 이처럼 무대로 불려 나온 이석주 이장은 “임순분 회장 덕에 임 회장 남편과 자신도 농민교육도 받고 농민운동을 할 수 있었다”라며, “소성리 사드반대 평화투쟁의 든든한 동지인 임순분 회장과 전국의 동지들과 평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겠다”라고 다짐한다. 

“그때는 나를 어둠에서 투쟁으로 끌어내 줘서 고마웠는데 지금은 매일 미군과 국방부, 경찰을 상대로 평화 투쟁하려니 힘들어서 원망스럽기도 하고, 이장님 혼자 하려니 힘들어서 나를 끌어들여나 싶어 원망의 마음도 슬며시 든다”라는 임순분 회장의 ‘진담 같은 농담 가득한 축하의 말’에 큰 박수와 환호가 쏟아진다. 부상으로 준비한 여름 중절모자는 이석주 이장에게 썩 잘 어울린다. 


다시 해남으로, 고흥으로, 광주로, 성주로, 무안으로, 안동으로, 부여로, 포천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다음에는 좀 더 건강하게 만나자고 지키기 어려운 다짐들을 한다.

86세 오분임 회장이 해남 땅끝으로 발길을 놓으며 후배들에게 당부한다.

“나는 150살까지 살랑게, 다들 200살까지 살아서 농촌과 농업이 살고 여성농민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꼴 보고 죽읍시다. 다들 건강 하씨요.”     


자식 치고 곡식 치는 땅의 어머니, 

저 억센 땅에 씨를 뿌리는

세상의 젖줄이다.

흙가슴 열고 일어서는 

여성농민 농민이다.  


‘여성농민가’가 《미치도록 눈부시게》 북콘서트장을 힘차게 휘젓는다. 

책 디자이너 우형옥 씨와 권미영 · 강희진 · 이태옥 · 이해승 씨 등 4명의 엮은이가 인사말을 하고 있다. 
힘나는 채식밥상 차려주신 예산 토종씨앗박물관 김영숙 선배, 녹색당 성미선 선생님, 손정희 선생님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공유부엌에서 묵묵했던 김선화, 이해승 씨 고마워요~
박남식 회장님이 활동하는 '화윤차례문화원' 제자들 덕에 따뜻한 차와 맛과 멋이 깃들인 다과를 맛볼 수 있었다.
여성농민노래단 '청보리사랑' 가수이자, 전북 진보당 오은미 의원이 공전의 히트곡 '친정엄마'와 '여성농민가'를 부르며 축하무대를 달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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