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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원이 Apr 06. 2020

'지구본 여행'<스리랑카>


                              들어가는 말



  우리는 스리랑카를 '인도의 눈물' 정도로 기억하지 사실 큰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아마 서로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없기에 중요도에서 밀렸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스리랑카'는 지정학적으로는 굉장히 재미있는 곳입니다. 지금부터 최준영 박사의 지구본 연구소의 내용을 바탕으로 스리랑카 여행을 시작해보겠습니다.


스리랑카Sri Lanka

<그림 1>

  스리랑카(Sri Lanka)는 '스리(Sri)' 눈부시게, 찬란히 빛나며 등의 뜻을 가진 형용사와 '랑카(Lanka)'라는 옛적부터 이 나라를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합쳐진 말입니다, 간단히 뜻풀이를 하면 '눈부시게 빛나는 땅'이라는 뜻입니다. 스리랑카는 이 뜻과 아주 잘 맞는 나라입니다. 실제로 보석이 아주 많이 나오는 나라이기 때문이죠. 보석의 종류도 루비, 사파이어, 가넷 등 다양하게 생산됩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상대적으로 다이아몬드나 에메랄드는 많이 생산되지 않습니다. 


자연환경


출처: 구글지도<그림 2>


  우리가 알고 있는 '실론티'가 바로 세계적 홍차 생산지인 스리랑카의 홍차입니다. 그 이유는 스리랑카가 1972년까지 과거 산스크리어로 '사자'라는 뜻인 '실론(Ceylon)'이라고 불렸기 때문입니다. 즉, 실론티는 '실론(Ceylon)'과 '차(Tea)'가 합쳐진 것입니다. 여기에서 스리랑카가 차를 재배하기 좋은 기후를 가졌다는 것을 유추해 볼 수 있습니다.



  차는 비교적 높은 기온과 습도가 유지되고 최소한의 일조량과 연간 강우량이 일정한 곳에서 주로 재배됩니다, 이러한 기후는 주로 적도 부근의 고산에서 볼 수 있는데, 스리랑카나 인도가 이러한 여건을 충족하고 있습니다. 



  스리랑카의 홍차는 주로 섬 중앙 산맥에서 재배되는데, 그곳을 중심으로 남서부의 습윤지대에 주로 밀집해 있습니다. 생산지에 따라 맛이 달라 그 지역의 이름을 붙입니다. 오른쪽 사진에 표시한 곳들이 홍차로 유명한 지역들입니다. 



  스리랑카의 사진을 보면 중남부는 고원지대이며, 그 주변은 넓은 평야가 펼쳐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토지 비율을 살펴보면, 전국토의 32%는 산림지대, 경작이 가능한 토지는 19%, 초원은 7%입니다. 산지의 배후인 북동부는 강수량이 적은 건조 지대로 불모지가 많으며, 전인구의 70%는 국토의 1/4밖에 안 되는 남서부의 습윤지대에 밀집해 있습니다.



  왼쪽 사진을 보면 스리랑카와 인도가 거의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곳은 과거에는 서로 붙어 있지만. 태풍에 의해서 이곳은 섬이 되었다고 합니다. 왼쪽 사진을 확대해서 보면 스리랑카 북서부의 마나르섬과 인도 남동부의 라메스와람섬을 잇는 45km 길이의 단단한 암석 위에 발달한 산호초와 그 사이를 잇는 얕은 여울이 있는데 그곳이 바로 '아담스브리지(Adam’s Bridge)'입니다. 이곳은 평소에는 모래톱 부분이 바다의 표면 위에 있으나, 밀물 때에는 바닷물에 잠긴다고 합니다.


(출처: 두산백과사전(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49031))


출처: 구글지도 <그림 3>

민족과 언어 


<그림 4> 출처: KOTRA 국가개요(http://news.kotra.or.kr/user/nationInfo/kotranews/14/nationDetailView.do?natnS

  스리랑카는 상좌부 불교인 신할리족과 힌두교인 타밀족이 살고 있습니다. 신할리족들은 대부분 서부 및 고지에 거주하며, 타밀족은 주로 북부와 동부에 살고 있습니다. 인도 남부로부터 노동자로 넘어온 타밀족도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통해 인도와 스리랑카와 서로 상관관계가 얽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민족이 다르기 때문에 사용하는 언어도 다릅니다. 그래서 서로 소통하기 위해 공용어로 영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림 1>에 영어가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스리랑카 근현대사



출처: 구글지도 <그림 5>


  스리랑카는 과거부터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중국과 아랍이 중개무역을 하던 장소였고, 스리랑카 아래로 내려가면 인도양이 가깝게 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그림 5> 인도양은 전 세계 물류의 1/4이 지나가는 엄청 중요한 해상로입니다. 특히 호무즈해협-인도양-말라카해협-남중국해-동죽국해로 이어지는 동북아시아의 에너지 수송로 우리에게 있어 그 중요성은 말이 필요가 없을 듯합니다. 실제 중국의 경우 석유 수입의 80%가 인도양을 통해서 들어온다고 합니다. 



  이런 매력적인 지정학적 이유로 스리랑카에는 많은 외부 세력들이 들어오게 됩니다. 15세기 이전까지는 인도가 15세기 초에는 명나라의 정화의 함대가 들어왔고, 16세기부터는 서양 세력이 본격적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우선, 16세기 초 포르투갈인들이 일부 해안지역을 차지하게 됩니다. 사실 유럽은 인도의 존재는 알았지만 가는 길을 몰랐었습니다. 이후 대항해 시대의 문이 열리면서 가장 선두 주자에 있었던 포르투갈이 먼저 오게 된 것이죠. 하지만 포르투갈은 17세기에 들어온 네덜란드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네덜란드 또한 이후 1795년에 영국에 스리랑카를 내주게 됩니다. 결국, 스리랑카는 1948년이 되어서야 영국으로부터 독립(자치령)을 하게 됩니다.



  슬프게도 스리랑카는 내전의 발생으로 실제적 평화를 얻은 것은 2009년이 되어서야 가능했습니다. 왜 내전이 일어났는지 살펴보기 위해 다시 식민지 시대로 돌아가겠습니다.



  위에서 스리랑카는 '차(Tea)'로 유명하다고 언급했지만, 사실 차를 본격적으로 재배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입니다. 그전까지는 '커피'를 재배했었습니다. 커피에서 차로 전향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영국이 19세기 초반 커피 재배에 성공하여 40년간 커피를 엄청 생산했었습니다. 그런데 1870년대 말 녹병이 돌아 커피나무가 대부분 죽고 맙니다. 그래서 '커피'를 포기하고 '차'를 생산하게 된 것입니다. 



  '커피'와 '차'는 세계 상품이자 열대나 아열대에 자라는 대표적 작물입니다. 플랜테이션 농업 경영에 아주 적합한 작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식민지 시기 동안에 플랜테이션 농업에 쓸 노동자로 인도의 타밀족을 데리고 오게 되는데 이것이 이후에 타밀족과의 민족 내전의 중요한 원인이 됩니다. 



  영국이 점령했을 당시 다수의 부족은 신할리족이었고 타밀족은 소수 부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지배 당시 신할리족이 영국에 맞서 싸웁니다. 영국의 식민지 정책은 숫자가 많지 않기 때문에 항상 동조자를 찾는 방식을 취했습니다. 그 적자가 바로 '타밀족'입니다. '타밀족'은 영국이라는 거대한 세력을 등에 업고 헤게모니를 잡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2차 대전 이후 영국이 떠나고 상황이 역전됩니다. 다수 부족인 신할리족이 다시 권력을 되찾아 온 것이죠. 이 과정에서 타밀족이 자신들의 자치권을 요구합니다. 신할리족은 식민지 시대의 기억이 있기 때문에 이를 거부하게 되고 타밀족은 1970년대에 들어 자신들의 자치권을 얻기 위해 무장 조직을 결성하여 신할리족에 대항하기 시작합니다. 



  본격적인 무력충돌이 발생한 것은 1983년입니다. 북부 지역에서 일어난 타밀족의 반 정부군이 정부군 습격하였고 이것이 카메라에 찍혀 스리랑카 전역에 방송됩니다. 스리랑카 정부군은 타밀족을 무력으로 진압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3,000명 이상의 타밀족이 살해되고 이에 격분한 타밀족이 대항하면서 본격적 내란이 시작됩니다. 



  이 내전의 과정에서 외부 세력이 개입하게 됩니다. 스리랑카의 분쟁은 옆 나라인 인도에게 큰 파급력을 일으킵니다. 인도 남부 지역에 1억 명 가까이 되는 타밀족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들 또한 자치권을 요구하며 정부의 정책에 맞서고 있었기 때문에 인도는 스리랑카의 타밀 반군이 인도의 타밀족도 부추겨 인도에 대항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걱정이 있었습니다. 실제 인도의 타밀족들은 힌디어 공용어화 정책을 반대하여 자신들의 지역에는 타밀어를 공용어로 지정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걱정은 인도 정부에서는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인도는 같은 힌두교인 타밀족이 아닌 불교인 스리랑카 정부군을 돕게 됩니다. 1987년 인도는북동부 지역들의 인도군 주둔과타밀 반군의 무장 해제를 목표로 인도 평화 유지군을 스리랑카에 보내게 됩니다. 이들은 3년간 전투에 참여하였으나 별다른 성과도 내지 못하고 계속되는 전투로 군기가 풀린 인도 군들이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등의 문제로 결국 1990년에 철수하게 됩니다. 타밀 반군은 내전 개입 결정을 한 인도의 리바즈 간디 총리를 1991년 테러로 암살하게 됩니다. 



  인도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타밀 반군이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전 세계에 퍼져있는 타밀족과 소련의 지원으로 정부군과의 군사적 차이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군이 육군, 공군, 해군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고 하니 지원 규모가 상당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렇게 격렬했던 내전은 2000년대 들어서야 조금씩 타협을 보기 시작합니다. 물론 그전부터 평화 협정을 진행해왔으나 전부 실패로 돌아갔었습니다. 2002년 노르웨이의 중재 하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됩니다. 그러나 평화협정이 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협정대로 무장 해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타밀족 내에서도 강경파와 온건파가 나뉘어 내분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2004년 강경파의 압박으로 온건파인 카루나 무라다타란 반군 대령이 군사를 데리고 스리랑카 정부군에게 항복하면서 상황이 급격히 반전됩니다. 그때부터 중국과 미국 등의 지원을 받고 2006년 스리랑카 정부는 내전을 종결짓기 위해 다시 타밀 반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고 2009년 항복을 받아냄으로써 내전이 종식됩니다. 



지정학적 요충지


출처: 구글지도 <그림 6>

 

 내전이 끝나고 중국이 본격적으로 스리랑카에 투자를 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내전에서 중국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입니다. 왜 중국이 이렇게 투자하려고 할까요? 이곳은 물류와 에너지 수송로이자 인도를 견제하기에 최적화된 지정학적 요충지이기 때문이죠. 



  왜 그런지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 <그림 2>의 인도와 스리랑카 사이는 수심이 얕아 배가 지나갈 수 없기 때문에 무조건 남쪽으로 내려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스리랑카는 남쪽은 수도인 콜롬보를 포함한 주변이 수심이 깊어 항구로 사용하기에 아주 적합합니다. 



2. 인도의 '카보타지법'라는 인도 연안에는 해외의 큰 배들이 인도에 접항하는 것을 막고 화물을 운송하는 인도 국적선만 가능하게 하는 법이 있습니다. 이 법으로 인해 인도에 들어가는 다른 나라의 화물선들은 주변 항구에서 환적을 하여 인도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 역할을 할 수 있는 항구를 가진 나라가 몇 개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스리랑카'입니다. 



3. 스리랑카는 동북아시아의 주요한 해안로이기도 하지만 <그림 6>을 보면 서쪽에 중동과 아프리카까지 접할 수 있는 곳입니다. 인도-중동-아프리카까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4. 중국 입장에서는 중동과 아프리카는 서양 열강이 꽉 잡고 있어 진출하기 힘들지만 스리랑카와 같은 곳은 상대적으로 진출하기 편합니다. 



  이러한 이유로 중국은 일대일로의 핵심지역 중 하나로 스리랑카를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도 물론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중동에 신경을 많이 쓰고 있어 이곳까지 저지하기에는 한계가 있기에 현재는 지켜보고 있는 상태입니다. 



  중국은 내전이 끝난 2009년부터 본격적인 투자를 시작합니다. 콜롬보 남쪽에 항구 도시를 건설하겠다는 목적이었죠. 이 과정에서 상당한 돈을 지원하고 그로 인해 스리랑카는 중국에 엄청난 채무를 지게 됩니다. 이것이 어느 정도 진행되자 2014년 중국 핵잠수함 창정(長征) 2호와 잠수함 지원함 창싱다오(長興島)가 2차례에 걸쳐 스리랑카 항구까지 오게 됩니다. 



  이것을 보고 인도가 놀라게 됩니다. 이때 인도가 스리랑카에 개입하게 되고 인도가 밀고 있던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중국 사업을 중단시켰었지만, 이미 인프라 구축 등의 이유로 중국에 80억 달러라는 어마어마한 빚을 많이 지고 있던 스리랑카는 인도가 지원해 주지 않자 결국 중국에 사업을 속행하게 합니다. 



  그 이후에도 계속되는 적자에 인도양 거점 항구인 남부 함반토다항 지분의 80%중국 국영 항만기업 자오상쥐(招商局)에 넘기고 99년간 항구 운영권을 주게 됩니다.이렇게 중국은 스리랑카에 항만, 정제소, LNG 저장소, 항공료 저장소 등 군시설에 가까운 인프라를 건설해나가면서 중국 해군의 인도양 거점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습니다.



※ 참고 기사(간략하게 적겠습니다) 


1. 아시아 투데이 (http://www.asiatoday.co.kr/view.php?key=20170730010014960)


2. 매일경제(https://www.mk.co.kr/news/world/view/2019/05/313021/)


3. 중앙일보(https://news.joins.com/article/21801579)


4. 코트라(https://news.kotra.or.kr/user/globalBbs/kotranews/6/globalBbsDataView.do?setIdx=322&dataIdx=98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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