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오기 전부터 다치고 난리네.
만삭의 내게 주어진 한 달이라고 생각했던 시간이 조기출산으로 사라졌다. 나는 대구였고 신혼집은 서울이었다. 산후조리원에서 일주일 정도를 보내고 서울로 올라간 신랑을 원격리모컨으로 써야만 했다.
한 번밖에 보지도 못한 집을 찍은 동영상을 토대로 집을 꾸며야 했다. 미션이 너무 했지만 다른 방도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전이 들어오는 날, 끼여 받은 공짜 큐커를 들다 신랑이 허리를 다쳤다. 그게 시작이었다. 그 후 2년간 우리 가족은 돌아가며 때론 중복으로 아픈 날들을 공유했다. 지금도.
산후조리원에서 첫째 아이의 사경이 발견되어 생후 한 달부터 대학병원에 다녔다. 추운 겨울 늦지 않으려 주차장에서 바로 내려 신랑을 주차를 하고 나는 아이를 안고 치료실까지 뛰어내려 가기를 몇 달이 지났고 그 사이 신랑의 통증은 허리에서 손목으로 바뀌어있었다. 식당을 운영했던 신랑이 너무 많이 써서 그런 것 같다는 얘기에 아이의 배변처리와 목욕은 온전히 내 몫이 되었다. 그렇게 아이의 사경이 2월쯤 끝났다. 그때쯤부터 자는데도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다. 어련히 육아의 고통쯤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한 통증이 새벽의 나를 깨우기 시작했고 눈물은 우울증으로 번져갔다. 아프니 예민해졌고 긍정의 회로는 통증 앞에 무기력했다.
평화로운 요기니로 살던 나는 일주일에 서너 번은 부부싸움을 했고 그 끝은 아이를 데리고 대구로 가겠다는 화만 남은 40대 엄마였다.
우울증과 함께 온건 디스크파열이었고 수술을 했다. 그 과정에서 막힌 경혈들을 뚫느라 수기마사지를 받으러 다녔고 2년이 지금도 그때 틀어진 골반을 맞추느라 일주일에 서너 번 재활운동을 하고 있다.
그 사이 돌을 맞은 아이를 싱크대에서 씻기다 전날 두고 잊은 믹서기 칼날을 아이가 들고 놓치며 날카로운 칼날이 아이의 발등으로 지나갔다. 응급차를 타고 대학병원으로 가서 잡히지도 않는 혈관에 바늘을 서너 번씩 꽂아대느라 자지러진 아이를 안고 온몸이 바스러지겠다 싶었다. 신랑은 아주 큰일 도 아닌데 울고불고 나리였다며 이제와선 나를 놀려대지만 나는 지금도 아이의 자지러지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이제 끝인가? 이때부터 나는 햇볕이 들지 않는 집을 원망하며 집터의 문제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되는 일이 없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건 흉하다는 증거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어떻게 이렇게 연타로 계속 큰 병원에 갈 수 있는 건가! 집에 막걸리를 붓기도 하고 소주를 매일 한잔씩 놓기도 했다. 지금 같으면 머랄텐데 그때 내가 지푸라기를 잡는 모양새였던 건지 신랑은 내 마음 편한 대로 하라고 했다.
그리고 겨울, 손목이 좀 나으려던 신랑은 술 잘 먹고 와서 넘어지더니 꼬리뼈가 부러졌다. 이젠 어이가 없었다. 그리곤 꼬리뼈가 나을 때쯤부터 오른쪽 어깨가 아프다하곤 스테로이드를 맞고 왔다. 이건 뭐 일부로 이렇게 아프기도 어렵겠다 싶었고 꾀병이 아니면 설명이 안된다고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끝이 아니었다. 몸은 아픈데 임신은 너무 잘되었다.
다음 해 여름 나는 둘째를 낳았고 첫째에 이은 제왕절개였다. 신랑은 그 사이 이번엔 왼쪽 어깨가 같은 증상을 보였고 용하다는 한의원에 몇 달을 다녔는데 어느 날부터 나아버렸다. 그렇다면 이제 정말 끝인가?
노노. 그럴 리가 없었다. 그 정도로 집터욕을 할 수 없지. 신랑의 스테로이드로 막아놓은 오른쪽 어깨가 다시 터졌고 지금 다시 그 한의원으로 출근을 하고 있다. 그때 한의사 선생님은 미국으로 가버렸지만 후배분이 이어받으셨단다.
그렇게 이 년간 수도 없이 병원을 들락거리며 둘에서 네 가족이 되었다. 혼자일 땐 내 몸만 챙기면 되니 별 탈 없던 일상이 여럿이 되니 혼란이 되기 시작했다. 불필요한 것들을 덜어내지 않으면 일상을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고 시작한 것이 미니멀라이프이고 지금도 진행 중이다. 아주 똥손인 나는 간도 못 맞추고 요리도 잘못하지만 공기가 더 많아 보이는 냉장고에서 매끼 샐러드를 내며 가능한 집밥을 준비를 하려고 한다. 이상하게 꽉 찬 냉장고는 내 마음도 답답하게 한다.
여전히 우리 집은 햇볕에 안 들어오지만 산후우울증을 독하게 겪은 나는 비타민D를 빼먹지 않고 먹고 있고 첫째 어린이집에 빠방이로 등원을 시키며 햇볕을 받고 돌아오는 길에 놀이터의 운동기구에 몸을 싣는 루틴을 가지게 되었다. 신랑은 양의뿐 아니라 이제 한의에도 관심을 되어 스테로이드가 아닌 운동과 자세를 신경 쓰는 것 같다.
물론 집터가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줄줄이 아픈 걸 수도 있다. 그렇지만 우리 가족은 현실적으로 몇 년을 이 집에서 살아야 한다.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일들을 하기러 했다. 좋아하는 식물을 창가에서 키우고 아나바다가 열리면 안 쓰는 물건들을 정리해 주고 하나의 물건을 살 때 며칠을 생각해 보며 다양하고 깊이 있는 쓰임을 고민한다. 환기와 청소를 매일 하며 적어도 더러워 아프진 말자고 생각한다.
마치 모래주머니 같다는 생각을 한다. 기분과 몸을 가라앉게 하는 집. 결코 상쾌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지금의 우리 가족에게 가장 알맞은 형태일 수도 있겠다 싶고 이러한 과정이 필요하니 온 것이 아닐까 싶다. 작은 집에서 잘 살아간다면 큰집에서도 잘 살 것이고 아픈 것들을 잘 관리해서 건강을 우선하게 된다면 모래주머니를 때 내었을 때 날아갈 듯 살아가지지 않을까. 지금은 모래주머니를 달고 체력과 마음의 힘을 기르는 때인가 보다.
이 글을 쓰는 30분 새 첫째가 일어나 충전 중인 탭을 발견했고 둘짼 젖을 물고 있다. 글을 수정할 시간도 없으니 바로 올려야겠다. 이렇게 자 또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