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가령 Jun 20. 2019

놓아줄 것을 잡는 심리

나는 나비 헌터였다.

어린 시절, 내가 자란 시골은 지천으로 들꽃이 피어 있었다. 집 앞에는 마을 할머니들이 심어놓은 예쁜 꽃들이 많아서 나비들이 많이 날아다녔다.

팔랑팔랑 얼마나 예쁜 몸짓으로 날아다니는지, 고요하고도 격렬한 그 몸짓을 보고 있노라면 한 편의 멋진 춤을 감상하는 듯하여 황홀했다.


내가 어릴 때는 방학 때 탐구생활이라는 숙제에 곤충채집도 있었는데, 나는 잠시 잡아보기만 할 뿐 금방 놓아주는 이상한 채집가였다.

희한한 건 예나 지금이나 동물은 무서워하면서도 어릴 때는 곤충 같은 것들은 곧잘 잡았다. 채 같은 도구도 필요 없이 손으로 다 잡았다. 여치나 메뚜기, 나비 같은 것들이 나의 주종목이었는데 처음에는 통 안에 넣어 두기도 했다. 너무 작고 여려 보여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아 살살 잡고 있으면 어느샌가 도망가버리고, 눌리지 않게 손안에 공간을 최대한으로 하고 있으면 손 안에서 움직이는 다리의 간지러움과 따가움에 화들짝 놀라 놓치기도 했다.


그중 제일 공격적인 건 의외로 잠자리였다. 손가락을 뱅글뱅글 잠자리 눈앞에서 돌리면 잠자리가 어지러워서 잘 잡힌다는 아빠의 말을 듣고(믿거나 말거나) 몇 번 시도해봤지만 생각처럼 잘 잡히지 않았다. 그러다 한쪽 날개를 잡았는데 이놈들의 힘은 장난이 아니었다. 날개가 긴 탓에 움직임이 커 몸을 활처럼 휘면서 내 손가락을 따갑게 할켜쥐듯 잡거나 그래도 놓아주지 않으면 엄청난 파닥 거림으로 '이러다 얘들 날개가 찢어지거나 뜯어질 것 같은데' 하는 공포심을 줘서 놓아줄 수밖에 없었다.


그런 사람의 손을 타거나 통 안에 넣은 애들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아 곧 비실비실 힘이 없어지는 게 눈에 띄게 보였다. 통 안에서 공기가 부족해서 죽어가는 건 아닐까? 뭔가 다리를 절뚝이는 것 같은데 내가 실수로 다리를 잘못 잡았나?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며 죄책감에 놓아주게 되고 몇 번을 반복하다 그 후로는 습관처럼 잡기는 해도 잡았다가 바로 또 놓아주었다. 마치 포켓몬스터를 수집하는 것처럼 잡는 순간의 재미는 포기할 수 없었나 보다.


하지만 나비는 나에게 이상한 소유욕을 불러일으켰다. 너무 예뻐서 고 싶었다. 나는 꿈이 구만 가지쯤 되었는데 그중 하나는 제2의 석주명이 되어 나비 그림을 그리고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표본을 만들 수는 없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어린 내 눈에 박제되어 있는 나비는 끔찍했다. 피투성이가 된 것도 아니고 살아있을 때의 그 모습 그대로 펼쳐져 있는데도 전혀 아름답지 않고, 핀이 꽂힌 모습은 왠지 내 팔이 찔린 것처럼 아프게 보였다. 미라를 보면 이런 기분일까.


어린 내 손동작이 둔했을 텐데도 나비는 생각보다 잘 잡혔다. 꿀을 빨아먹고 있을 때를 노려서 그럴 수도 있겠다.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다는데 나는 나비를 참 귀찮게 했다. 그런데 이상한 건 나비가 날아다니는 게 예뻐서 잡아놓고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생각보다 징그러운 모습에 실망했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고 오래 보아야 사랑스러운 건 풀꽃뿐인가 보다. 나비는 멀리서 보아야 예뻤다.

'역시 나비는 날아다녀야 예쁘구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은 생기 있고 생동감이 넘쳐야 아름답다. 나도 그렇다.(나태주 님 죄송)


그러면서도 나비가 날아다니는 걸 보면 방금 먹은 걸 잊어버리고 주는 대로 먹이를 계속 다가 배가 터져 죽는다는 금붕어처럼 또 잡아댔다.

그리고 관찰, 실망, 놓아줌의 반복.

또 놓아줄 걸 알면서도 쉽게 잡히지 않을수록 더 애가 타서 잡고 싶어 했다.


어른이 되어 연애를 하면서 문득 내가 나비를 잡을 때의 마음이 생각났다. 곁에 있을 때는 쉽게 실망하고 싫증을 내면서도 쉽게 잡히지 않거나 나를 떠나려는 시그널을 보내면 애가 타서 붙잡는 내 모습을 본 것이다. 몸만 어른이 되었을 뿐 나는 아직 아이였다. 다행히 그것을 관조하고 깨달은 나를 칭찬한다. 이제는 그런 거짓 감정에 놀아나지 않는다.






생각해보니 그런 작은 것들만 탐을 낸 게 아니었다. 비가 오고 난 뒤 마당이 촉촉하게 젖어있을 때 아주 가끔씩 찾아오는 낯선 손님이 있었다. 정확히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빛깔이 신비로웠고 꼬리가 길고 멋졌다. 하필이면 나 혼자 마당을 기웃거릴 때만 보이고 누군가를 부르면 유유히 날아가 사라져 버렸다. 지금 같으면 바로 폰을 꺼내 사진을 찍고 봤을 테지만 또 날아가 버릴까 봐 소리도 내지 못하고 발만 동동거릴 뿐이었다. 나는 몇 번이나 그 새를 잡기 위해 철 양동이를 던졌으나 늘 실패했다.


아빠에게 말하니 아마 꿩이었을 거라 했다. 나는 아니라고 우겼다. 꿩을 보진 못했지만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그런 흔한 새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신비한 새라서 일부러 내 앞에만 몰래 모습을 보이는 거라 여겼다. 아이들이 그렇듯이 그 시절 나 역시도 내가 만든 동화 속에서 내가 주인공이으니까.


그러고 보면 나는 이상한데 곧잘 꽂히곤 했다. 어릴 때 한창 중국 영화가 유행할 때 하얀 날개옷을 입고 날아다니는 여자들이 너무 예뻐서 하얀 보자기만 보면 머리 위에 두르고 책상 위에 올라서서 뛰어내리고는 했다. 마음은 사뿐히 내려앉아야 되는데 몸은 항상 쿵 하고 떨어졌다.


그리고 강시 영화를 한창 볼 때는 엄마 립스틱을 입술 중간에만 바르고 강시 옷을 사달라며 울고불고 떼를 썼다. 엄마는 대체 강시 옷을 어디서 사냐며 기가 차 했다. 지금처럼 인터넷도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라 더 말도 안 되는 땡깡이었다. 요즘은 할로윈데이있고 온갖 코스프레 복장이 다 있던데 웬만한 상상은 다 실현해볼 수 있는 아이들이 부럽다.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늘 변태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