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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가령 Jun 26. 2019

나는 사남매 중 둘째입니다(2)

 어렸을 때의 환경과 타고난 기질은 사람의 성격을 만드는데 서로 얼마만큼의 영향을 줄까? 난 같은 환경에서 자란 우리 사남매를 보며, 둘 다 영향이 크겠지만 타고난 기질 쪽이 단 1프로라도 더 많지 않을까 생각한다. 달라도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언니는 세상 그런 순둥이가 없는 사람이다. 학창 시절 목소리가 커서 같이 장난치고도 꼭 혼자 걸려 혼이 났던 나와 반대로 아주 조용한 성격이다. 릴 때 사시가 있던 언니는 방학이 되어 큰집에 갈 때마다 큰아빠에게 침을 맞고는 했는데 눈이며, 머리며 침을 꽂고도 '아'하고 소리 한 번 낸 적이 없다며 그렇게 순한 애가 없다고 어른들이 말했다. 사촌들과 나는 장난을 치면 큰아빠에게 방해가 되니 "침놓는 동안은 얌전히 있어. 가까이 오면 이만한 침놔준다" 하고 엄포를 놓고는 시작했다. 나는 까불다가 침을 맞을까 봐 그 옆에서 쥐 죽은 듯 얌전히 있었다. 정작 언니는 편안히 누워 있었지만 침이 하나하나 꽂힐 때마다 그걸 바라보는 내 얼굴이 아픈 애처럼 구겨졌다. 언니는 침을 다 맞고 나면 잘 참았다고 장하다며 어른들이 용돈을 쥐어주고는 했는데 그러면 나는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고 한다.

 "나는 안 주고..."

 어릴 때부터 난 욕심쟁이였나 보다.


 중학교에 입학했을 때 언니는 3학년이었는데 그때 우린 2, 3학년 교실엔 함부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언니에게 볼 일이 있어 잠시 올라갔는데 얘기를 하는 동안 당시 일진이었던 언니 한 명이 웃으면서 다가왔다. 곱슬머리가 엄청 심해서 올빽으로 쫙 묶고 다니던 언니였는데 소문이 무성한 언니였다. 그 언니가 우리 언니에게 아주 상냥하게 말을 걸어왔다.

 "○○아, 이거 숙제 좀 해주라. 알겠지? 꼭 부탁해."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서 그 무서운 일진 언니가 사라져 갈 때 뒤통수에 대고 일부러 들으란 듯이 외쳤다.

 "니가 그걸 왜 해줘?"

 그러자 뒤를 돌아 흘끗 나를 쳐다보는데 사실 쫄았다. 하지만 곧 쿨하게 그냥 자기 갈 길 가버리는 것이다.

 "쟤가 맨날 쌤한테 걸려서 불려 가기 때문에 숙제할 시간이 없어서 그냥 내가 대신해주는 거야. 난 어차피 이미 다했으니까, 시간도 있고. 니가 신경 쓸 일 아니야."

 이건 뭐 최소 등신이다. 말로만 듣던 숙제 셔틀이다.

 지금 그 년을 만나면 머리를 다 쥐어뜯어놓을 자신 있는데. 그땐 왜 그러지 못했는지 용기를 못 낸 게 한이 된다.


 그렇게 가족 대부분이 순하고 엄마, 아빠부터 그냥 좀 손해보고 살아도 괜찮다 주의다. 지금은 차리는 양이 많이 줄었지만, 예전엔 제사 때가 되면 엄마는 엄청난 양의 제사 음식을 해서 늘상 명절에 차리는 것만큼 힘이 들었다. 다음 날 찾아온 마을 할머니들 상도 차려 내드려야 하고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들에겐 음식을 싸서 직접 가져다 드리기도 했다.

 그리고 엄마는 온 마을 할머니들의 심부름꾼이었다. 틈만 나면 이리저리 불려 다녔다. 더 화가 나는 건 그 덕에 우리까지 잡심부름꾼이 되는 것이었다. 엄마를 찾으러 왔다가 우리를 데려가기도 하고 허구한 날 집으로 심부름을 부탁하는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이놈의 전화 코드를 뽑아버리던지 해야지! 뭐 이렇게 당연한 듯 우릴 자꾸 불러? 우리가 자기들 종놈인 줄 아나?"

 "할매들 힘이 없는데 우짜겠노. 가서 좀 도와 드려라."


 우리 집은 마치 마을 회관 같았다. 온 마을 사람들이 불쑥 들어와 뭔가를 가져가곤 했다. 제대로 돌려놓지 않는 경우도 일쑤였다. 어릴 땐 당연한 듯 그렇게 살아 익숙해서 잘 몰랐는데 도시에 나와 살면서 활짝 열린 우리 집 문이 무서웠다. 지금은 마을이 한옥스테이를 하면서 낯선 방문객들도 많아다.

 "아빠, 우리도 이제 대문 좀 잠그자. 여기가 무슨 제주도도 아니고. 현관문 같은 것도 만들었으면 좋겠어. 도둑 들겠다."

 "가져갈 것도 없다 이놈아. 원래 꽁꽁 걸어 잠그면 뭐 있나 싶어서 도둑놈도 더 온다."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다.

 

 내가 어릴 때 우리 마을로 이사 온 아저씨에겐 땅도 내어주고 그 위에 집을 짓게 하더니 밭도 얼마간 내어주었다. 고모 말로는 그런 식으로 다른 집에도 조금씩 내어준 땅이 몇 있다고 했다. 지금은 그 집에서 원래 자기네 땅이었다며 집터를 점점 넓혔다고 한다. 촌의 땅이고 예전엔 정확한 측정도 안되었는지, 아빠는 '어차피 그냥 얼마 안 되는 땅인데 뭐' 하는 생각이고 나머지 친척들만 속이 타는 듯하다. 클수록 내 속도 탄다.


 "엄마, 나중에 유산 줄 거면 아빠한테 말해서 그냥 지금 좀 줘."

 말하면서도 웃겼다. 마치 예전 티비에서 도박에 빠진 아들이 늙은 엄마를 밀치며 장롱에 꼭꼭 숨겨둔 집문서, 논문서를 찾아 도박장으로 가는 장면이 떠올랐다.

 "기가 차고 코가 차네, 니 땅이 어딨노. 있어도 다 제사 지내줄 아들한테 가는 거지."

 "참나, 예전에 아빠가 술 취했을 때 우리 싸움날 일 없게 얼마 안 되는 콧구멍만 한 땅이라도 동서남북 딱 4등분 해서 나눠준다고 했었거든?"

 "땅도 뭐 있어야 주지. 땅이 어딨노."

 "저기, 큰 논이랑 어디 어디 쪽에 논이랑 밭이랑!"

 "그거 뭐 돈 얼마 한다고. 그리고 그게 우리 거가, 고모 거지."

 "거짓말하지 마. 고모들 서울에서 잘만 살고 있잖아. 근데 저 땅까지 고모네 거라고?"

 "그래, 그냥 우리가 빌려 쓰고 있는 거지"

 "와 나, 환장하겠네! 나 옛날에 스무 살 때 점집에서 어떤 할머니가 너거 애미 애비는 유산도 못 받고 귀신 밥만 맡아서 제사만 실컷 지내네 했었는데 그게 진짜야?"

 "그 카드나? 잘 보네."

 "와, 다시 가고 싶네, 근데 너무 오래돼서 어디였는지 기억이 안 나."


하지만 정작 땅이 있다 해도 정말 돈이 되지 않는 땅이다. 우리 마을은 한옥마을로 문화재를 보존하고 있는 곳이라 개발될 리는 없을 테니까.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나으니까, 무당도 귀신 밥 먹고 살아서 과거는 잘 맞춘다고 했는데 제발 안 맞았으면 좋겠다. 그런데 정말 아빠가 양자로 온 할머니에게는 원래 딸이 둘 있는데 그 고모들은 서울에서 큰 주유소도 하고 떵떵거리며 잘 산다.


 내가 어릴 때 할머니가 말씀하시길, 할머니 어릴 때는 집에 돈이 많아서 거지들이 지나가면 담장 너머로 돈을 던져 주고는 했다 하셨다. 마을 사람들이 할머니 살아생전에 그렇게 찾아오고 했던 것도 돈 때문이었을까. 아님 옛날 사람들이라 양반 가문에서 벗어나지 못한 관습 때문이었을까.

 그리고 그 무당 할머니가 조상들이 너무 잘 살아서 다 해 먹은 바람에 후손들이 안 풀린다느니 어쩌니 그런 말도 했었는데 제발 아니길 빈다.






 우리는 조의제문으로 세조의 왕위찬탈을 비난하는 글을 지어 무오사화의 원인이 된 김종직의 후손들이다. 김종직은 부관참시(죽은 뒤, 큰 죄가 드러난 사람을 극형에 처하는 것으로 무덤을 판 뒤 시체를 베거나 목을 자름) 당하고, 화를 면한 몇몇의 후손들은 도망쳐 지금 우리가 사는 마을로 정착했다고 한다. '꽃피는 아름다운 골'이란 뜻의 '개화실'에서 현재는 '개실마을'로 불려지고 있다.


 조상의 피를 이어받아서 내가 입바른 소리를 밉게 잘하나 보다. 하지만 그런 말로를 닮고 싶지는 않다. 우리 마을은 5대에 걸쳐 효를 행한 것으로도 유명한데 유명한 효 이야기는 다 갖다 붙인 느낌도 든다. 유명한 이야기는 '모친이 병환 중에 꿩고기 산적이 먹고 싶다 하니 부엌으로 꿩이 날아들고, 잉어회가 먹고 싶다 하니 연못에서 잉어가 튀어나왔다'는 것이다. 그 연못은 '이출지'란 이름으로 아직 남아있다.

 '효'의 피는 아무래도 내가 전혀 못 받았나 보다.


 나는 요즘은 다들 제사도 합치고 줄이고 없애는 추세라며 우리도 그렇게 하자고 했다. 그리고 벌초 같은 건 나중에 우리가 어떻게 하냐면서 선산을 없애고 납골당 같은 데로 옮기자고 했다.

 "무덤에 누워있는 게 더 무서울 거 같아. 난 혹시나 일찍 죽으면 그냥 수목장 해 줘. 낭만적이게 나무로 다시 태어날 거야. 대신에 사람들이 쉽게 못 베게 엄청 크고 비싸 보이는 나무에다 뿌려줘. 엄마, 아빠는 원하면 산소에 묻어줄게. 그리고 엄마, 아빠 둘 정도는 원하면 제사도 지내줄 수 있어."

 "우리 집안엔 니 같은 아는 없는데, 참 희한하다."


 언젠가 설에 차례 지내러 온 아재들이, 풍수지리 하는 사람이 우리 마을은 저기 앞에 산이 막고 있어서 안 좋다고 했다 한다. 그 몇 년 도 이후에 큰 인물이 날 거라 했다는데 지금 태어난 사람들 사주 다 풀어봐도 그런 인물이 없다 한다.

 나는 아재들에게 말했다.

 "그 큰 인물 아무래도 저인 거 같은데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제가 대기만성형이라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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