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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길엽 Sep 18. 2022

사마천  궁형(宮刑) 이야기

타인의 억울한 사정을 변호하다 성기가 잘린 남자












‘남성의 성기를 잘라내는’ 궁형을 당한 사마천의 초상화처럼 수염이 사라지고, 피부가 쭈글쭈글하다. 목소리도 히스테리성으로 변한다고 한다. 사관(史官)의 양심에서 우러나온 변호로 사마천이 가혹한 궁형을 당했다. 젊은 장수 이릉을 옹호하는 발언으로 한 무제를 격노케 한 대가로는 너무나 처절했다. 유명한 '이릉의 화(李陵之禍)이다.                                                 


“이 때문에 창자가 하루에도 아홉 번이나 뒤틀렸습니다. 집에 있으면 멍하니 정신이 나간 듯하고 밖에 나가면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습니다. 치욕을 떠올릴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땀이 등골에서 나서 옷을 적시기 일쑤였습니다.”     

是以腸一日而九回, 居則忽忽若有所亡, 出則不知所如往. 每念斯恥, 汗未嘗不發背霑衣也        


  

사마천이 궁형을 겪은 뒤의 통절한 심정을 보라. 이 문장은 보임안서'(報任安書)에 나온다. 사마천은 죽음보다 치욕적인 궁형을 당하면서도 살아남아 불후의 역사서 사기(史記)를 남겨야 했던 구구절절한 사연을 편지에 담아 남겼다. 보임안서는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라는 뜻이다.  사마천과 벼슬길에 함께 들어섰던 익주자사 임안이 B.C 91년에 당시 태자 유거(劉据) 무고(巫蠱) 사건에 연루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옥에 갇혀 처형을 기다리고 있을 때 사마천이 그전에 받은 임안의 글의 답장이다. 각 문장들이 너무나 탁월하여 세상 사람들의 높은 평가를 받았다.  모든 문장이 세상 사람들에게 교훈을 줄 정도로 뛰어났다.    



이전에 임안이 익주자사 시절 사마천에게 편지를 보내어 유능한 인재를 추천할 것을 충고한 바 있다. 당시 사마천은 궁형을 당한 뒤 감옥에서 나와 황제의 신변에서 기밀이나 문서를 담당하는 중서령으로 있었다. 이런 저런 사정이 있어서 답장을 하지 않았던 사마천이 임안의 투옥 소식을 듣고는 한때 사형선고까지 받고 궁형을 자청하여 목숨을 부지한 자신의 처지를 회상하며 착잡한 심경으로 답장을 썼다. 사마천은 장문의 편지에서 임안을 도울 수 없었던 자신의 처지에 대해 구구절절 이해를 구하는 한편, 자신이 치욕적인 궁형을 당하면서까지 살아남은 까닭과 심정을 토로하고 있다.                

(報任安書)


                                                  

사마천은 고대 중국 한나라 무제 때 태사령 직책을 지낸 사관이었다. 역시 태사령으로 한 무제를 모셨던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중국 고대부터 당대까지의 역사를 기록하기 위해 많은 자료를 수집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마담은 한 무제가 실행한 봉선제 의식에 참여하지 못한 아쉬움을 지닌 채 죽으면서 아들 사마천에게 '사기(史記)'의 완성을 부탁하는 유언을 남긴다. 그리고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저술에 착수했다.     


 

사마천이 역사서 '사기'의 집필에 몰두하던 B.C 99년, 그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사건에 휘말리게 된다. 한 무제의 명령으로 북방의 흉노족 정벌에 나섰던 이릉 장군이 휘하의 병사들과 함께 흉노에 투항한다. 5천 군사를 이끌고 흉노를 정벌하던 이릉이 연전연승할 때는 이릉을 격찬하던 한 무제와 조정 대신들이 갑자기 엄청난 비난을 쏟아낸다. 일개 사관에 불과하던 사마천은 이릉의 과거 전공과 인품을 들어 그의 투항이 수만의 흉노에 중과부적 때문에 불가피했고, 총사령관인 이광리 대장군의 작전과 전략상의 실패도 고려해야 한다고 이릉 장군을 변호하였다.     



 “이릉은 흉노 토벌에서 패전했다고 볼 수 없습니다. 5천의 군사로 8만의 적군을 상대했고, 화살과 군량미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음에도 분투했습니다. 살아남은 부하의 목숨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그들의 목숨을 살리려 투항한 것일 뿐, 이는 단순히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고자 함이 아니라 지금 목숨을 지켜 후에 기회를 얻어 흉노를 멸하고자 한 것입니다.” 


                                                                     

조정 대신들이 한 무제에 영합하여 대부분 이릉을 비난했지만, 사마천은 평소 친하지도 않았던 이릉을 옹호했다. 하지만 그의 변호 내용이 타당한가 여부와는 상관없이 한 무제를 격노하게 한다. 당시 전군을 지휘한 이광리 대장군이 한 무제가 가장 총애하는 후궁 이부인의 오빠였다. 따라서 사마천의 간언에 따르면 패배의 실질적인 원인이 이광리에 있다는 것이 된다. 다혈질의 강성 군주 한 무제는 사마천을 당장 처형하라고 명령한다. 당시 사형수는 속전 50만 전을 내거나, 궁형을 자청해 내시가 되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는데, 월급이 600전에 불과한 사마천이 50만 전이 없어서 궁형을 선택하여 비굴하게도 목숨을 구걸하게 된다. 당시 관리들이 자진할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 사마담의 유언을 지키기 위해 궁형을 받으면서까지 역사서를 쓰려 하였다. 결국 사마천이 극한의 고통과 모욕의 궁형을 당하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 49세였으니 그야말로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선 것이었다.              


 

"또한 저 천한 남녀종들이나 미천한 첩도 능히 자결할 수 있습니다. 이에 비해 제가 부득이하게 자결하지 못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겠습니까? 제가 속마음을 감추고 욕됨을 참으며 구차하게 목숨을 보존하면서, 더러운 흙먼지의 감옥에 갇힘을 사양하지 않은 것은, 나의 마음 속에 다 드러내지 못한 것이 있음을 한스럽게 여겨서입니다. 곧 만일 제가 비루하게 죽어버린다면 후세에 문장이 드러나지 않을 것이 한이 되기 때문입니다."


且夫臧獲婢妾, 由能引決, 況僕之不得已乎, 所以隱忍苟活, 幽於糞土之中而不辭者, 恨私心有所不盡, 鄙陋沒世, 而文采不表於後世也.    


                                                                                                                -보임안서 중에서-


    

사마천이 당시 형벌 중에서도 가장 수치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던 궁형을 자청하면서까지 목숨을 부지하려 했던 이유는 어떻게든 살아남아 선친의 유지인 '사기'의 집필을 마무리 하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기원전 96년, 사마천은 집필에 착수한 지 20년 가까이 긴 세월에 사기를 완성한다. 위로 황제(黃帝) 시절부터 한 무제 때까지의 3천 년 고대 중국 역사를 총망라한 '사기'를 완성한다. 불후의 명저로 평가받고 있는 '사기'는 12본기, 10표, 8서, 30세가, 72열전 등으로 구성된 총 130권, 52만 6,500 자의 최초의 기전체 역사서이다. 


         

그러면 사마천이 겪은 궁형은 어떤 형벌인가. 궁형(宮刑)은 남성의 성기를 거세하는 형벌이다. 고대 중국의 오형(五刑)의 하나이다. 오형이란 묵(墨), 의(劓), 월(刖), 궁(宮), 대벽(大辟)의 5가지 형벌로, '묵'은 죄명을 먹으로 얼굴이나 팔뚝에 새기는 것, '의'는 코를 베는 것, '월'은 발뒤꿈치를 끊는 것, '대벽'은 목을 치는 참수형이다. '궁'은 오형에서 대벽보다 가볍게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대벽 이상의 수치스럽고 모욕적인 중형으로 여겨졌다.        


   

남자의 궁형에는 음경과 고환 둘 중 하나만 도려내거나, 음경과 고환 모두 도려내는 방법이 있다. 부형(腐刑)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성기를 절단한 환부에서 오랫동안 살이 썩는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궁중의 내시들이 입궁할 때 어린 아이들이라 생존율이 그리 낮지 않았지만, 사마천은 평균수명에 해당하는 49세였으니. 또 환관이 되기 위해 거세 수술을 받고 잠실같이 어둡고 조용한 방에서 상처가 아물 때까지 지내는데 이를 '하잠실'(下蠶室) 즉 '잠실로 내려보낸다'고 하여 궁형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다. 여자에게 궁형을 내리는 것은 유폐(幽閉)라고 했다. 여자에 대한 궁형이 어떻게 실행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진 자료가 없는 듯하다.    


 

남이 억울한 상황에 처했을 때 누군가 그를 위해 변호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현대 사회에서도 이웃이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내가 나서서 그를 도우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다. 재판에서 누군가의 억울한 사정을 풀어주기 위해 증언대에 섰다가 법정 밖에서 칼부림당하는 예를 보라. 사마천처럼 궁형을 당하면서까지 누군가의 억울한 사정을 변호하기란 더욱 어려운 일이 아닌가. 세상 사람들은 그를 최고의 사가(史家)라고 극찬하지만, 사마천 자신은 궁형 때문에 평생 고통과 수치 속에 비참하게 살았다. 사마천이 단순히 이릉을 옹호한 것이 위대한 것이 아니다. 궁형이라는 감내하기 어려운 엄청난 고통 속에서 불후의 역사서 『사기(史記)』를 20여 년에 걸쳐 세상에 내놓은 그의 삶이 참으로 위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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