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길엽 Apr 04. 2024

한창 이쁠 때 아입니까

극장 앞에 여학생들이 줄지어 서 있었습니다. 학교 전체가 체험활동을 나왔는가 봅니다. 여자 중학생 특유의 까르르 까르르 웃는 소리가 참으로 이쁩니다. 그런데 청소 하시는 할머니께서 아이들 보고 조용히 하라고 큰소리를 치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입니다. 할머니께서 어쩔 줄 몰라하는 아이들 옆에 서서 일장 훈시를 하십니다. 


"느그들 중학생이제, 이런 데 오면 조용히 하라고 학교에서 안 갈차 주더나. 와 이리 시끄럽게 해가~ 사람들 정신없이 만드노. 집에서 부모가 안 갈쳐 주드나. 고등학생만 되도 좀 조용한데 중학생들이 되가~ 이리 시끄러우이 도저히 못 참겠다. 좀 조용이 해!"


한 학급 아이들이 두 줄씩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이 참 보기도 좋은데, 할머니께선 아이들 떠드는 소리가 불편했는가 봅니다. 청소하시면서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아이들과 대면하고,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이런 광경에 접할 할머니로선 짜증이 날 만도 하셨겠지요. 그렇지만 아이들이 주눅이 들어 눈치를 보는 모습이 썩 좋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나섰습니다. 


"아이고, 어머니 수고 많으십니다. 그래도 한창 이쁠 때 아입니까. 학교에 있다가 이렇게 밖에 나오니 얼마나 신나겠습니까. 집에 손녀라 생각하고 이쁘게 봐주이소."


그 할머니는 평소에도 안면을 익힌 분이라 제가 그렇게 말하니 계면쩍은 표정을 짓습니다. 좀 있으니 미소로 점점 변해갑니다. 지난 달 꽃 양말 한 켤레 선물해서 그랬을까요. 어쨌든 할머니가 미소를 지으면서 제 말을 수긍하는 듯한 표정을 보이자 아이들도 다시 밝은 분위기로 변합니다. 금방 재잘거리는 소리가 건물 내로 울려 퍼져 나갑니다. 중학교 1학년이니 열네 살 얼마나 이쁠 때입니까. 할머니가 청소하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가니 여학생 몇 명이 저에게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건네 옵니다. 그렇게 인사하는 것도 정말 예쁩니다. 제가 이제 이 나이가 되었고, 그 학생들이 손주처럼 여겨져서 그럴까요. 


세상살이에 특별한 인생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의 갈등이나 논쟁에도 가급적 얽히고 싶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냥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삶이 진짜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시끄러우면 그들 나이에 떠들지 언제 마음껏 떠들어 보겠나 싶어집니다. 어쩌다 공공 시설에서 노년 세대의 말다툼하는 장면을 보면 '이야, 저 나이에도 저렇게 목청이 큰 걸 보니 진짜 건강하시네.'라고 생각합니다. 몸이 불편하면 남과 다투기 전에 자신과의 싸움에서 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어 다리가 불편하면 나들이하는 것이 어려워지고, 스스로 어딜 다닐 생각도 못 하게 되면서 삶에 대해 만사가 귀찮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 같으면 눈꼴사납게 생각했을 장면에도 너그러워집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이 모두 저와 같은 생각을 하면 곤란하겠지요. 대중 교통을 함께 이용하는 시민들 속에 고성을 지르고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을 좋게만 봐주면 우리 사회가 엉망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저는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그냥 나몰라라 하고 외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가 저를 보고 비난해도 그냥 달갑게 받을 생각입니다. 그리고 웬만한 허물을 덮어주면서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살아가려 합니다. 이제 제 삶에서 남은 날이 필시 지난 간 날보다 분명히 많을 터니 현실에 집착하지 않고 그저 물 흘러가듯이 그렇게 살아가려 합니다. 





작가의 이전글 그 사람 참 나쁘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