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참 나쁘네
아내의 출퇴근길 반드시 승용차로 모시는 이유
퇴직 후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하나 생겼습니다. 아내 출퇴근길에 승용차 운행입니다. 현직에 있을 때도 어떻게든 아내 출퇴근을 위해 차량을 운행했지만 퇴직 후엔 저의 고정적인 업무가 되었네요. 평소에 둘이 대화할 시간이 별로 없는데 출퇴근길 차 안에서 그간 못다한 이야기를 많이 주고 받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저보다 아내의 말이 조금 많습니다. 그렇다고 수다를 많이 떠는 스타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아내는 출근길보다 퇴근길에 할 말이 많은 듯합니다. 10분 전부터 아내 직장 입구에 차량을 주차하고 대기하고 있으면 저쯤에서 아내가 피곤한 몸과 마음을 끌고 걸어옵니다. 오늘 하루도 수고 많았다고 한마디 건네면 아내는 그에 대해서는 별로 답하지 않고 하루종일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온갖 불만을 쏟아냅니다. 아마 오늘은 평소보다 업무에 많이 치여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는가 봅니다.
"오늘은 점심 먹을 시간도 없더라. 아이들이 줄줄이 대기하고 있다가 상담한다고 하더라. 아무리 그래도 내 밥 먹을 시간은 줘야 하는 거 아이가. 그라고~"
온갖 불만을 저에게 쏟아냅니다. 저는 잘못이 전혀 없는데 말입니다. 그래도 아내 속상한 사정을 들어주면서 맞장구도 열심히 쳐줍니다. 아이들과 더불어 직장 윗사람에 대한 불만을 들으면 제가 더 크게 그들을 비난합니다.
"그 사람 참 나쁘네. 그리고 그놈들도 아주 나쁜 놈들이고."
얼굴도 모르는 그 아이들을 도매금으로 몰아서 아내보다 더 크게 비난합니다. 하루 종일 업무에 시달리다가 퇴근 시간에 대기하고 있는 저를 보자마자 하소연, 넋두리, 불만, 비난을 마구 쏟아내면서 아내가 아주 신이 났습니다. 게다가 저도 그 분위기에 가세하였으니.
그리고 한참 불만을 쏟아내다가 갑자기 잠이 온다며 졸기 시작합니다. 안쓰럽기도 해서 위로도 해줍니다. 불과 15분 정도 짧은 시간인데도 아내가 말한 내용은 참 많습니다. 아내가 즐거워할 만한 유머나 제가 예전에 망가진 이야기를 적절하게 섞어 아내를 웃기게 하려 해도 제 유머 실력이 형편없어 그것도 역부족입니다만 그래도 아내가 재미있어 하면서 웃으니까 다행입니다. 웬만하면 제가 아내 출퇴근길에 동행하려 합니다. 급하면 택시라도 잡아 타고 가면 되겠지만, 그렇다고 택시 운전수에게 하소연하거나 불만을 털어놓을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그렇게라도 제가 옆에서 아내 불만을 들어주면 스트레스가 조금이라도 풀릴 것 같았습니다. 저녁 모임이 있는 날엔 아내 퇴근길에 차로 집에 모셔 놓고 다시 시내로 가기 때문에 모임에 지각을 자주 하는 편입니다. 처음엔 오해도 많이 받았습니다. 시간 관념이 없다면서 약속 시간에 맞춰 오라고 농담삼아 건네는 말들이 많았습니다. 요새는 제 상황을 이해해 주는 편입니다.
저의 장점은 경청(傾聽)이라고 자신있게 말합니다. 특히 선배 시니어세대들의 하소연을 잘 들어준다고 나이 많은 분들이 좋아들하십니다. 그래서 아내의 말도, 하소연도 넉넉하게 들어주려 애씁니다. 아내가 누군가를 비난하거나 불만을 터뜨리면 저도 덩달아 따라 합니다. 물론 저는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도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아내도 기분이 해소되는지, 약간 쑥스러워하기도 합니다. 괜히 오버해서 생판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욕하게 해서 좀 그렇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면 다시 둘이 싱겁한 농담을 주고받기 시작합니다. 요즘 아내가 저에게 많이 던지는 말은 이것입니다.
"내가 결혼할 때 눈에 콩깍지가 씨있지. ㅋㅋ"
그러면 저는 먼산을 쳐다보는 척하며 슬쩍 아내의 시선을 피하면서 허허 웃음으로 상황을 넘기려 합니다. 그런 말을 들어도 이미 여기까지 너무 멀리 와버렸는데, 이제 와서 그런 말 해봐야 무슨 소용일까 하면서도 말없이 아내의 싱거운 농담을 외면합니다. 이제 이 나이에 그런 말을 주고받아도 화를 낼 이유가 없지요. 그 긴긴 세월 저와 우리집 아이들 3남매에게 헌신한 아내가 웃자고 던진 농담임을 알기 때문이지요. 설마 다시 그 젊은 시절로 다시 돌아가 결혼 자체를 물리길 원하는 것은 아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