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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DanielC Jun 23. 2019

굿바이 크루얼 월드_02

단편소설집

작년 여름이 시작될 무렵, 오후였고 하늘에는 얇은 먹구름이 끼어 있었다. 나는 도심 한복판의 건물 화장실에 앉아 있었다. 사촌을 대신해서 예비군 훈련을 받고 수고비를 타낸 직후였다.


-부킹의 황제, 황영조를 찾으시면 확실한 파트너를 보장합니다


화장실 문짝에 붙어 있는 스티커를 보고 찾아간 나이트클럽에서 너를 만났다. 웨이터 황영조는 나를 쓱 훑어보고는, 환상적인 타입을 찾으시는군요,라고 말한 뒤 너에게 나를 소개했다.


우리들은 그렇게 만나서 거의 매일이다시피 황영조의 나이트클럽에서 춤을 추었다. 나는 장마가 시작되어 장마가 끝날 때까지 낮에는 잠만 잤고 밤에는 너와 춤을 추었다. 장마가 끝나자 치통 때문에 나는 거의 울상이 되어 춤추는 너를 가만히 앉아서 구경만 했다. 그런 내가 안쓰러웠던지 너는 기차를 타러 가자고 내게 제안했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으로 나이트클럽이 아닌 곳에서 만나 기차를 타기 위해 그 섬으로 갔던 것이다.

동력선을 타고 섬을 빠져나온 것은 오전 11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안개비가 우리들을 촉촉이 적시고 있었다. 30여 분 뒤 우리들은 부두에 내려서서 떠나온 섬 쪽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섬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우리들은 돌아섰다. 우리들이 섬에 남기고 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으며, 애초에 섬은 존재조차 하지 않은 것처럼 여겨졌다.


빗발이 조금씩 굵어지고 있었다. 우리들은 부두를 벗어나 쭉 뻗은 콘크리트 도로를 따라 걸었다. 비에 젖어서 지저분하게 털이 일어난 깡마른 개 한 마리가 퀭한 눈을 들어 두려움 섞인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더니 거리가 1미터가량으로 좁혀지자 누르께한 이빨을 드러내고 낮은 소리로 으르렁대며 비켜섰다.


꺼져, 이 망할 자식아!


너는 그 개만큼이나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날, 네가 처음으로 입을 열어 소리 낸 것은 ‘꺼져, 이 망할 자식아!’였다. 그 시간, 그 장소에서 너라는 사람에게 그지없이 어울리는 일성(一聲)이었다고 나는 끄덕거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너는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먼저 한 것이다.


우리들⋯⋯, 너와 나는 섬에서 하루를 보낸 뒤 다시 뭍으로 나오면서, 마치 비에 젖고 병든 개처럼 외계에 대한 한없는 두려움과 적대감으로 진저리를 쳐대고 있었다. 그 느낌에 대하여 서로 아무 이야기도 나누지 않았지만, 그 서늘하고 소름 끼치는 공격적인 감정이 뼛속까지 얼어붙게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들은 너무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 느낌은 우리들의 실존을 증명하는 듯했다.


우리들은 왜 섬에 갔을까? 섬에는 기차가 있다. 섬을 관통하는 기차. 우리들은 단지, 기차를 타기 위해 섬에 갔던 것이다. 섬에서 타는 기차, 섬에서 기차를 타면 모든 게 좋아질 거라는 터무니없는 기대를 너는 가지고 있었고 그 기대감을 나에게 전염시켰다. 전날, 우리들은 너의 차로 Y시까지 와서, 섬으로 들어갔다. 동력선에는 선장과 섬의 생필품을 나르는 용역 회사 모자를 쓴 인부 두 사람, 그리고 우리 둘 뿐이었다. 비는 오는 듯 마는 듯 가루처럼 날리고 있었다.


우리들은 혹시 기차가 운행을 중지하지 않았을까, 하는 불안감에 빠져 있었다. 선장이나 인부들에게 물어볼 수도 있었지만 부정적인 대답을 듣게 될까봐 그만두었다. 우리들은 섬의 부두에 닿을 때까지 30여 분 동안을 고스란히 불안감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기차는 있었고, 늙은 수부(水夫)를 연상시키는 기관사는 역사(驛舍) 처마 밑에 쭈그리고 앉아 싸구려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기차, 안 가죠?


너는 부정 의문문으로 물었다. 나는 네가 여러 번 상처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표들 샀소?


기관사는 빗물에 젖어 까맣게 반들거리는 협궤 철로를 멀거니 바라보면서 가래가 그렁그렁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그리고는 무릎에 손을 짚고 깡마른 몸을 무겁게 일으켜 매표소로 느릿느릿 걸어갔다. 매표소는 베니어합판으로 짠 커다란 상자일 뿐이었다. 알록달록 칠해진 노랑과 파란색은 바래 있었고, 기차의 운행 시간과 구간 안내 표지판도 낡아서 너덜거렸다. 이가 하나도 남지 않고 빠져 버린 노파의 휑한 입처럼 매표구가 뚫려 있었다.


우리들은 늙은 기관사가 매표소로 들어가기를 기다려 편도 두 장을 샀다. 그리고 12량짜리 열차의 제일 가운데 칸에 들어가 앉았다. 객차는 개방되어 있고, 다만 비와 햇빛을 가릴 요량으로 차양이 쳐져 있을 뿐이었다. 우리들은 늙은 기관사가 매표소에서 나와, 매표소의 문을 커다란 자물쇠로 잠그고, 느릿느릿 기관차에 오를 때까지 지루하게 기다려야 했다.


기관사가 기적을 울리고 - 기적은 객차마다 달려 있는 소형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왔다 - 찰카당 찰카당 기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흩뿌리는 가는 빗발을 얼굴에 맞으며 우리들은 섬을 가로질러 갔다. 기차는 이따금 건널목에서 정차도 하고, 또 기적을 울리기도 하였다. 우리들은 두 번쯤인가 얼굴을 마주 보고 살며시 웃었다. 그뿐이었다.


종착역에 내려서서 우리는 승객 하나 태우지 않고 기점으로 돌아가는 텅 빈 기차를 배웅하고, 키 큰 노송 숲 사이로 난 길을 4백 미터쯤 걸어서 호텔에 들었다. 나는 네가 원하는 대로 등을 보이고 몸을 맡겼다. 너는 화가 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섹스를 했다. 슬픔이 내 가슴을 먹먹하게 하였다. 첫 경험이 슬퍼서 나는 앞으로 아무하고도 자지 못할 것 같았다. 우리는 호텔의 지하 식당에 내려가 된장찌개로 저녁을 먹고, 호텔의 레스토랑에서 커피를 마시고, 텅 빈 라운지에 앉아서 텅 빈 표정으로 프런트에 앉아 있는 호텔 직원을 오랫동안 관찰하다가 방으로 돌아왔다. 더 이상 섹스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TV를 켜 놓고, 너는 오랫동안 공들여 손톱을 깎고 다리에 난 털을 면도했다. 나는 창밖으로 소리치며 내리는 비를 멀거니 내다보면서 저녁을 먹은 이후로 다시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치통을 견디고 있었다. 면도하고 있는 너는 어쩐지 겨우 겨우 울음을 삼키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밤이 깊도록 우리들은 그렇게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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