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노다 Nov 09. 2021

2년 반만의 귀향

    2019년 봄에 런던에 온 후 2년 반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 다녀왔다. 사실 이번 한국행의 가장 큰 목적은 가족들에게 남편을 소개하고 남편에게는 한국을 소개해주는 것이었던지라 마음 편히 쉴 수만은 없는 휴가였다. 남편에게 좋은 것 재밌는 것 꾹꾹 눌러 다 보여주겠다는 열정이 넘쳐서 계획을 짰더니 2주 동안 6개 도시를 찍는 하드코어 행군이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보고 싶었던 가족들 친구들도 보고 먹고 싶었던 것들 다 먹고 와서 매우 뿌듯한 휴가였다! 저번 주 금요일에 돌아오자마자 긴장이 풀려 주말 내내 하루에 열네 시간씩 잤더니 시차 적응에 대실패해서 새벽 네시에 눈을 뜨는 미라클모닝러로 강제로 돌아왔다..ㅋㅋ

2년 만에 오는 딸이 사위를 달고 온다는 말에 엄마는 한우 4kg으로 잔칫상을 차렸고 아빠는 발렌타인 30년 산을 땄다..ㅋㅋ

    오랜만에 한국을 가니 30년 동안 평생 이 나라에 살았음에도 마치 여행 온 이방인이 된 듯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남산타워에 올라 서울을 내려다보니 새삼 서울이 이렇게 큰 도시였나 싶고 호텔방에서 밤늦게 바삐 움직이는 불빛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가 저 불빛들 중 하나였을 시절의 우울함은 마치 아득히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져 기분이 묘했다. 그래도 2년 반이란 시간은 내 기억 속 서울을 다 바꿔놓을 만큼 길지는 않았던 탓에, 금방 다시 익숙하게 기억 속 길을 걷고 보고 싶던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떠는 소소한 사치를 누렸다.

다음에 서울 가면 또 가고 싶은 힙지로 스피크 이지바 <숙희>
하얏트에서 내려다본 서울 야경. 너무 예뻐서 피곤한데도 마냥 넋 놓고 자꾸만 바라보게 되더라

    남편에게 처음 한국을 가는데 뭘 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진짜 한국의 역사와 관련된 것들을 보고 싶고 영화 부산행에 나왔던 기차를 타보고 싶다고(...) 하기에 경주와 부산을 가기로 했다. 경주는 초등학교 수학여행부터 따지자면 이미 다섯 번도 넘게 가 본 도시라 별 감흥이 없을거라 생각했었는데 서서히 단풍이 들기 시작한 불국사의 풍경과 석굴암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정말 예뻤고, 어릴 적 왔을 땐 으스스하다 느꼈던 대릉원 주변은 이탈리아 본토에서보다 맛있는 파스타를 먹을 수 있는 힙한 경리단길이 되어있어 신기했다.

이래서 경주는 가을에 가야 하나 봅니다

    부산은 거의 영화제 때문에 갔었던 터라 하루 종일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주구장창 영화만 보고 왔던 기억밖에 없지만 이번에는 푹 쉬고 오고 싶었어서 큰 마음을 먹고 시그니엘부산을 예약했다. 예약할 때 영국인 남편의 첫 한국 여행이니 최대한 좋은 뷰 배정 부탁드린다고 구구절절 추가 요청사항을 적었더니 해운대와 광안대교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끝내주는 뷰로 골라주셔서 오션뷰를 원 없이 즐기다 왔다. 6성급을 지향하는 호텔답게 어딜 가나 모두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친절했고, 베딩도 너무 편안해서 원래는 해운대 주변을 돌아보려던 일정을 모조리 취소하고 하루 종일 호텔에서 늘어지게 먹고 자면서 푹 쉬다가 왔는데, 앞으로 정말 돈을 열심히 벌리라 다짐했다..ㅋㅋ

해운대와 광안대교가 한 눈에 들어오던 시그니엘 오션 뷰

    사실 한국에서의 휴가도 정말 좋았지만 이번 휴가 최고의 순간은 캐리어를 깨끗이 비우고 익숙한 내 침대에서 개운하게 자고 일어났을 때였다. 이젠 여행을 끝내고 드디어 집에 무사히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서울이 아니라 런던에서 느끼게 되었다는 걸 생각하니 비로소 이곳이 나의 삶의 터전이라는 게 실감이 난다. 한국에서 다섯 끼 먹으면서 에너지를 풀로 충전해 왔으니까 올해 하반기의 마지막 이벤트인 새 집으로의 이사도 무사히 마칠 수 있으면 좋겠다.

자 이제 한국에서 배송비 25만원 내고 사온 35만원 어치의 책을 읽어보자 (...)


매거진의 이전글 첫 번째 Major release day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