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봄에 런던에 온 후 2년 반 만에 처음으로 한국에 다녀왔다. 사실 이번 한국행의 가장 큰 목적은 가족들에게 남편을 소개하고 남편에게는 한국을 소개해주는 것이었던지라 마음 편히 쉴 수만은 없는 휴가였다. 남편에게 좋은 것 재밌는 것 꾹꾹 눌러 다 보여주겠다는 열정이 넘쳐서 계획을 짰더니 2주 동안 6개 도시를 찍는 하드코어 행군이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보고 싶었던 가족들 친구들도 보고 먹고 싶었던 것들 다 먹고 와서 매우 뿌듯한 휴가였다! 저번 주 금요일에 돌아오자마자 긴장이 풀려 주말 내내 하루에 열네 시간씩 잤더니 시차 적응에 대실패해서 새벽 네시에 눈을 뜨는 미라클모닝러로 강제로 돌아왔다..ㅋㅋ
오랜만에 한국을 가니 30년 동안 평생 이 나라에 살았음에도 마치 여행 온 이방인이 된 듯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남산타워에 올라 서울을 내려다보니 새삼 서울이 이렇게 큰 도시였나 싶고 호텔방에서 밤늦게 바삐 움직이는 불빛들을 바라보고 있자니 내가 저 불빛들 중 하나였을 시절의 우울함은 마치 아득히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져 기분이 묘했다. 그래도 2년 반이란 시간은 내 기억 속 서울을 다 바꿔놓을 만큼 길지는 않았던 탓에, 금방 다시 익숙하게 기억 속 길을 걷고 보고 싶던 친구들을 만나 수다를 떠는 소소한 사치를 누렸다.
남편에게 처음 한국을 가는데 뭘 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진짜 한국의 역사와 관련된 것들을 보고 싶고 영화 부산행에 나왔던 기차를 타보고 싶다고(...) 하기에 경주와 부산을 가기로 했다. 경주는 초등학교 수학여행부터 따지자면 이미 다섯 번도 넘게 가 본 도시라 별 감흥이 없을거라 생각했었는데 서서히 단풍이 들기 시작한 불국사의 풍경과 석굴암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는 정말 예뻤고, 어릴 적 왔을 땐 으스스하다 느꼈던 대릉원 주변은 이탈리아 본토에서보다 맛있는 파스타를 먹을 수 있는 힙한 경리단길이 되어있어 신기했다.
부산은 거의 영화제 때문에 갔었던 터라 하루 종일 밥도 제대로 안 먹고 주구장창 영화만 보고 왔던 기억밖에 없지만 이번에는 푹 쉬고 오고 싶었어서 큰 마음을 먹고 시그니엘부산을 예약했다. 예약할 때 영국인 남편의 첫 한국 여행이니 최대한 좋은 뷰 배정 부탁드린다고 구구절절 추가 요청사항을 적었더니 해운대와 광안대교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끝내주는 뷰로 골라주셔서 오션뷰를 원 없이 즐기다 왔다. 6성급을 지향하는 호텔답게 어딜 가나 모두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친절했고, 베딩도 너무 편안해서 원래는 해운대 주변을 돌아보려던 일정을 모조리 취소하고 하루 종일 호텔에서 늘어지게 먹고 자면서 푹 쉬다가 왔는데, 앞으로 정말 돈을 열심히 벌리라 다짐했다..ㅋㅋ
사실 한국에서의 휴가도 정말 좋았지만 이번 휴가 최고의 순간은 캐리어를 깨끗이 비우고 익숙한 내 침대에서 개운하게 자고 일어났을 때였다. 이젠 여행을 끝내고 드디어 집에 무사히 돌아왔다는 안도감을 서울이 아니라 런던에서 느끼게 되었다는 걸 생각하니 비로소 이곳이 나의 삶의 터전이라는 게 실감이 난다. 한국에서 다섯 끼 먹으면서 에너지를 풀로 충전해 왔으니까 올해 하반기의 마지막 이벤트인 새 집으로의 이사도 무사히 마칠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