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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다 May 02. 2022

한 번의 결혼과 두 번의 결혼식

한국의 집 전통혼례 후기

    나는 결혼식에 대한 환상이라곤 일절 없는 사람인지라 작년에 첼시 시청에서 했던 세레모니만으로도 결혼식에 대한 로망은 차고 넘치게 이룰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락다운 때문에 미처 못 오셨던 우리 부모님이 내내 너무 서운해하셨던지라 어쩔 수 없이 한국에서의 결혼식을 또 한 번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이 너가 정 싫으다면 그냥 가족 친지들만 초대하는 식사 자리를 마련해서 드레스를 입고 인사를 드려라라고 하시는데 아니 그럴거면 결혼식이랑 뭐가 다르지요..? 그럴 바엔 내 친구들도 다 부르고 웨딩드레스 입는 결혼식은 한번 해봤으니 한국에서는 전통혼례를 하겠다고 했다.

    보통 한국에서의 결혼 준비 프로세스는 식장을 정하고 스드메 패키지를 고르고 같이 살 집을 준비하는 게 큰 틀인 것 같은데, 이미 집이야 준비를 끝냈으니 해야 할 건 나머지 두 가지뿐이었다. 본가는 춘천이지만 친척 어른들은 대부분 수도권에 계신지라 식장을 서울 안에 있는 장소를 알아봐야 했는데, 식장을 결정하는 기준은 딱 두 가지였다. 1. 교통이 편리한가? 2. 밥은 맛있는가? 그간 수많은 결혼식을 가본 결과 식장이 어땠는지는 기억이 안 나지만 가기는 편했는지, 주차장은 널찍했는지, 밥이 맛있었는지는 확실히 기억에 남았기 때문... 서울 안에서 그 두 가지 기준으로 필터링하고 나니 남은 건 한국의 집뿐이었다. 한국의 집은 충무로 역에서 바로 엎어지면 코 닿을 데에 있고, 평소에도 한정식 집을 운영하는 곳인지라 밥이 맛있다는 평이 많았어서 크게 고민 없이 장소를 결정할 수 있었다. 한 가지 주의할 점은 식장 예약을 매우 빨리 해야 한다는 점.. 나는 예식 날짜 일 년 전쯤에 연락을 했었는데 이미 내가 하려던 날짜의 다른 시간대는 다 마감이고 딱 한자리 남아있었다 ㄷㄷ

한국의 집 전통혼례는 미리미리 예약하세여..

    전통혼례를 선택하는 것의 생각지 못한 장점은 스드메 과정을 매우 많이 간소화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청첩장 사진에는 영국에서 했던 결혼식 사진을 사용할거라 스튜디오 사진이 필요가 없었고, 드레스는 전통혼례장에서 빌려주는 혼례복으로 해결(꼭 ⭐️홍원삼⭐️ 입으세요), 헤어 메이크업도 혼례장에서 연결된 업체를 바로 소개해주셔서 따로 알아볼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결혼식 사전 준비는 생각보다 간편했고, 피로연 인사 때 입을 한복만 따로 준비하면 됐었다. 한복은 대여만 하려고 했다가 부모님이 이 기회에 한벌 사두고 나중에 이벤트 때마다 두고두고 입으라며 맞춤 한복을 선물해 주셨다. 보통 한복도 드레스처럼 몇 군데 들러보고 비교 후에 선택하나 본데 우리는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던지라 그냥 지인 추천받았던 베틀한복이라는 곳에서 진행했는데, 맞춤 한복 디자인도 잘 골라주시고 본식 전 스냅사진 찍을 때 입으라고 당의를 서비스로 빌려주셔서 식 당일에 유용하게 활용했다.

키 큰 신부는 무조건 당의 입으라고 빌려주셨는데 좋은 선택이었다!

    모든 식전 준비가 생각보다 순조로워서 이렇게 준비를 안 해도 되나..? 싶었는데 의외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 청첩장을 전달하는 일이었다. 결혼식 2주 전부터는 한국에 있으면서 점심엔 사람들 만나고 저녁에는 영국 오피스 시간 맞춰 일할 생각이었는데 결국엔 체력적으로 너무나 힘들어서 결국엔 휴가를 일주일 더 썼다.. 코시국이 아니었다면 여러명을 한꺼번에 식사대접하면서 청첩장을 돌리는 게 가능했겠지만, 여전히 10인 인원 제한이 있었던 데다 도대체 누구까지 결혼 소식을 알려도 되는 걸까 경계선을 짓기가 매우 애매했다. 그래서 일단 영국에 온 후 한 번이라도 개인적으로 연락했던 적이 있는 사람을 기준으로 리스트업 한 다음에 그룹별로 잘 묶어서 신중하게 스케줄을 짜야했다. 제대로 된 식사를 대접해야 했으므로 적당히 격식이 있고, 누구에게도 호불호가 없는 메뉴를 제공하며, 어디서든 오기 편한 장소를 찾는 것도 생각보다 힘들었다. 아래는 혹시나 청첩장 모임 장소 아이디어가 필요한 분들을 위한 리스트.


5인 이하 청첩장 모임 장소 추천

- 광화문 : 디타워 안 주유별장

- 이태원 : 파르크, 리틀넥

- 역삼 : IFC몰 생어거스틴, 진대감

- 판교 : 오사이초밥

- 합정 : 메세나폴리스 안 리피, 들풀한상


    본식이 야외 중정 마당에서 진행되기 때문에 비 오면 어쩌나 걱정했었는데 식 당일날에는 다행히도 날씨가 정말 좋았다. (이젠 남편도 드디어 내가 날씨 요정임을 믿어주기로 했다ㅋㅋ)  한국의 집에서 전통혼례를 하게 되면 좋은 점은 본식 전에 한 시간 정도 스냅사진 찍을 시간을 준다는 건데, 장소도 고즈넉한 분위기로 정말 예쁘고 좋은 날씨 덕분에 사진도 자연스러운 분위기로 잘 나온 것 같아 마음에 든다. 식 당일 촬영은 주노무비라는 업체와 함께 진행했고, 워낙에 한국의 집 전통혼례 촬영 경험이 많으셔서 알아서 사진 찍기 예쁜 포인트로 데려가 주시고 시간에 맞춰서 지금 어디에 가있어야 하는지 친절히 알려주셨다. 일반 결혼식장과는 달리 나를 전담으로 챙겨주시는 코디가 없어서 식 당일날 시간 체크하기가 쉽지 않은데 나보다 더 내 결혼식을 잘 알고 있는 전문가가 있어서 다행이었다..ㅋㅋ

    혹시 한국의 집 결혼식을 고려중인 분이 있다면 식전 공연은 웬만하면 꼭 선택하는 걸 추천한다. 부채춤, 사물놀이 중에 한 가지만 고를 수도 있지만 나는 둘 다 했는데 하객들 반응이 의외로 좋았다. 식 전에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중정 마당으로 모일 수 있게 유도해주기도 하고, 흥겹게 분위기를 띄우는데도 좋아서 여러모로 둘 다 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본식이 시작되면 기럭아범에게 기러기를 전달받은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가서 신부를 데리고 나오는 퍼포먼스를 한다. 나는 집 안에서 대기해야 해서 잘 못 봤지만 여러 번 절을 해야 하고 동선도 기억해야 해서 남편은 이 때 틀릴까봐 엄청 떨었다고 한다ㅋㅋ 신부가 해야 할 건 수모님들이 이끌어주시는 대로 절만 하면 되는데 계속 팔을 들고 있어야 해서 어깨가 아팠던 기억만 남아있다.. 뭔가 하는 게 많아서 엄청 오래 걸린 줄 알았는데 전체 과정은 30분 정도면 끝나서 일반 웨딩홀 결혼식이랑 비교해서 딱히 엄청 길지는 않다.

본식 내내 팔을 들고 있어야 해서 어깨가 아픔...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막판엔 너무 힘들어서 내가 미쳤지 이걸 왜 하겠다고 했을까 엄청 후회했는데, 막상 다 끝내고 나니 그 많은 가족과 친구들 앞에서 축하 받아보는 경험이 인생에 또 언제 있을까 싶어서 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결혼식 직전에 한창 오미크론이 기승을 부리는 시기여서 따로 만나자고 약속을 잡기가 너무 미안했음에도 다들 흔쾌히 만나 주어서 다들 정말 고마웠다. 그리고 다들 내가 영국에서 하고 싶은 일을 찾아가며 열심히 사는 모습이 좋은 자극이 된다고 말해주어서 앞으로도 더 열심히 살면서 오랜만에 한국 가서 연락하더라도 반갑게 만나고 싶은 사람이 되야겠다고 다짐했다. 결혼식이란 그저 허례허식에 불과한 것이라고 부정적으로만 생각했지만, 이런 인생의 대소사를 헤쳐나가면서 한층 더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되기도 하는 것 같다. 이젠 정식으로 친지 및 친구들에게 제대로 인사를 드렸으니 좀 더 책임감 있는 어른이 되어 잘 살겠습니다!

친구들 바쁜 와중에도 다들 와줘서 정말 고마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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