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여름 7, 8월은 예기치 못한 일로 정신이 반쯤은 나간 듯 살아왔다. 계절의 감각도 잊은 채, 그러나 시간이 가면 세월은 흐르고 계절은 바뀐다. 아침저녁 서늘해진 날씨, 어디에서 우는지 몰라도 풀벌레 소리가 어김없이 가을이 왔노라고 노래한다.
몇 달 동안 바쁘게 동당거리고 살아왔던 날들 이제 잠시 숨을 고르고 마음의 여유를 가져 본다. 아침저녁 선선한 공기는 그리도 덥던 여름의 기운을 몰아내고 가을에게 자리를 내주고 있으니 자연의 섭리가 반갑다. 정말 시원해서 살 것 같다. 선풍기나 에어컨 같은 기계에게 기대지 않아도 전혀 불편하지 않다.
옛날에는전기 없이도 참 잘 살아왔다. 산업이 발달하고 전기 제품이 나오면서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사람 사는 일은 정도 없고 운치는 사라졌다. 나이 들어가면서 가끔이면 옛날 정 스런 그날들이 눈물겹게 그립다.
어제는 흐리고 비가 올듯한 날씨였다. 남편은 햇볕 알레지가 있어 덥고 해가 쨍쨍한 날은 밖에 나가기를 거부한다. 그런 이유에서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면서 공원 산책하는 운동을 멈췄다. 어제는 날이 흐려 다행이라 생각하고 "여보 공원에 꽃 무릇 만발했다 하네요. 우리 살살 걸어 운동 겸 산책하고 꽃구경이나 하게요" 남편은 말없이 옷을 갈아입으신다.
사람이 너무 집에만 있으면 우울할 수도 있다. 적당히 사람볕도 쏘이고 자연과 접하면서 생활을 해야지, 어쩌자고 집에만 계시는지 옆에서 남편을 바라보고 있으면 걱정이 된다.
오랜만에 공원 입구에 도착하니 나뭇잎은 아직 푸르지만 공기는 상쾌하다. 조금 걸어가니 빨간 꽃 무릇이 산책길 양옆에피어 아름답다. 사람들이 많아 깜짝 놀랐다. 웬일이지, 생각해 보니 아하! 국군의 날 휴일이라서 산책 나온 사람들이 많았던거다.
다른 해 같으면 꽃 무릇이 진작에 져서 꽃을 볼 수 없는데 올해는 날이 더워 꽃이 늦게 핀 것 같다. 꽃무릇은 언제나 추석즈음 일주일 간격 안에 피고 진다. 예전에는 월명 공원 산책길 드문 드문 피었던 꽃무릇이 이젠 제법 많이 번식을 해서 산책하는 사람들 시선이 머물고 사진 찍기 여념이 없다. 멀리 가지 않아도 가까운 곳에서 꽃무릇을 볼 수 있어 다행이다. 나도 사진 찍느라 발걸음이 느려진다. 나이 들어가면서 배우자와 함께 하는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 수시로 느낀다.
집에 있으면 보지 못했을 꽃, 마음을 내고 밖으로 나오니 활짝 핀 꽃무릇도 볼 수 있어 마음이 환해진다.
꽃 무릇은 피어 있는 시기가 짧다. 7주일을 못 넘기고 지고 말아 부지런을 내야 만발한 예쁜 꽃을 볼 수 있다. 올해는 여름이 길고 폭염으로 꽃 무릇 꽃이 늦게 피었나보다.
나는 아직도 걷는 것이 자유롭지 않다. 그렇다고 집에만 있으면 계절에만 볼 수 있는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없어 불편함을 감수해야 한다.꽃구경을 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다리가 아파 편백나무 아래 잠시 쉬고 있는데 하늘에는 회색 먹구름이 잔뜩 끼어 금방이라도 소나기가 쏟아질 것 같다. "여보 날씨가 심장치 않아요 집에 가시게요." 말하고 몇 걸음 걷는데 빗방울이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한다.
비는 금방 소나기로 변하여 주룩주룩 쏟아진다. 어디에서 비를 피할 수도 없다. 그칠 기미가 없는 소나기는 옷을 다 적시고 온몸이 비에 젖는다. 걸으면서도 걱정이다. 남편은 선캡만 써서 머리에 비를 맞아 추위를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내 목에 둘 러던 머플러를 풀러 머리를 싸매 주고 걸었다. 주차장까지 빗속을 걷는 거리는 왜 그리 멀까. 살다가 이런 날은 처음경험한다.
빨리 주차장까지 걸어가야 하는데 걸음이 빗물에 젖은 옷 때문인지 발걸음도 무겁다. 그 많던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지 한 두 사람만 눈에 띈다. 비가 조금 그쳐 주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 보지만 비는 그치지 않고 온몸이 비에 젖어 모자를 타고 흐르는 물은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가 없다. 빗물을 빌어 눈물을 흘렸는지 나도 분간이 어렵다.
인생이란 예기치 못한 일도 수용하며 살아야 한다.
꽃이 지기 전 꽃 무릇 구경 갔다가 온몸이 비에 젖어 돌아왔다. 사람 사는 일은 세월을 견디고 비바람을 견뎌내야 나이테가 쌓인다. "빗길이 힘겹지만 당신이 곁에 있어 참 좋은 세상입니다." 남편에게 들려주고 싶은 혼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