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나 캐나다에서는 인적이 드문 곳에서 자동차가 조난을 당해 목숨을 잃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대"
"도대체 땅덩이가 얼마나 크면 그게 가능한 거야?"
우리는 한밤중 미국 미주리 남쪽에 있는 오자크마운틴의 깊숙한 산길을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불과 20여분 후 우리에게 닥칠 일을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
당시 나는 운 좋게도 직장에서 보내주는 1년 간의 연수 기회를 잡는 데 성공해 미주리 대학에서 공부 중이었고, 마침 뉴욕과 미시간에 살던 친구 2명이 나를 보기 위해 미주리까지 놀러 온 터였다. 한국에서도 같이 여행해 본 적 없던 멤버들과 이역만리 미국에서 함께 자동차 여행을 하는 날이 오다니.
한껏 들뜬 나는 심혈을 기울여 여행 코스를 짰다. 안 되는 영어 실력으로 낑낑 대며 인터넷을 뒤진 끝에, 모닥불과 바비큐 파티는 물론 송어 낚시와 카약 체험을 할 수 있다는 숲 속 캐빈을 찾아냈다. 옆 캐빈으로 가려면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할 만큼 독립적인 공간이 보장돼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춤을 춰도 상관없다고 했다. 물론 우리가 진짜 춤을 출 만큼 제대로 놀 줄 아는 사람들은 아니지만, 뭐 그만큼 좋은 곳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미국의 대자연을 마음껏 즐기리란 기대와 설렘 가득했던 자동차 안에는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불안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미 아까부터 오자크마운틴 안으로 진입한 자동차는 메인 도로를 벗어나 길이라고도 할 수 없는 숲 속 좁은 나무 틈새를 한참 동안 달리고 있었다. 쉽게 찾기 힘든 깊은 산속에 있을수록 더 멋진 경치를 품고 있겠거니, 애써 불안감을 기대감으로 바꿔보려 했지만, 뭔가 잘못됐다는 직감이 스멀스멀 기어올랐다. 지금쯤이면 도착하고도 남아서 바비큐 파티를 하기 위해 갈탄에 불을 붙이고 있어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달려도 캐빈은커녕 인간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사무실에 전화해서 물어봐야 하나 싶어 핸드폰을 꺼내 들었는데, 아뿔싸. 수신 안테나 막대기들이 서 있어야 할 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부지불식간에 통화도, 인터넷도 불능인 곳으로 접어든 것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다 내가 자초한 일이었다. 캐빈 예약확인 메일은 처음부터 이렇게 경고했다. "Please note that MapQuest and GPS are guaranteed to get you lost. Please print out and follow our driving directions." (GPS를 보고 오면 분명 길을 잃게 됩니다. 찾아오는 길을 프린트해서 이대로 운전해 오세요.)
그러나 방심한 틈에 우리 차는 GPS를 따라 잘못된 길에 들어섰고, 결국 폐쇄된 다리 입구에서 돌 틈에 끼어 자동차가 꿈쩍도 하지 않는 위기에 처했다.
처음에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떻게든 엑셀을 세게 밟으면 자동차가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아무리 엑셀을 세게 밟아도 바퀴가 계속 헛돌면서 타이어 타는 냄새만 점점 심해졌다. 셋이서 영차영차 소리까지 내며 밀어도 자동차는 움직일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핸드폰은 무용지물이어서 도움을 청할 수도 없고, 걸어내려 가는 것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너무 깊숙이 들어와 몇 시간을 걸어내려 가야 하는 건지 감조차 오지 않는 데다, 점점 추워지는데 어둠 속에 길이라도 잃으면 더 큰일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낯선 사람'이다. 사방에 불빛조차 보이지 않는 외딴 산속 다리 밑에서 사람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뗏목을 타고 강에서 낚시를 하는 무리였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이니 처음에는 '살았구나' 싶었다. 함께 자동차를 밀어달라고 요청할 수 있을 것 같아 반색을 하고 다리 아래를 내려다봤는데, 본능적으로 머릿속에서 경고등이 울려왔다. 술에 잔뜩 취한 남성 4명이 마치 일탈할 준비라도 된 것처럼 뗏목 위에서 병나발을 불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있는 다리 주변을 맴돌며 계속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알아들을 수 없는 혀 꼬인 영어로 자기들끼리 킬킬댔다.
'저 사람들이 뗏목에서 내려 산기슭을 걸어 올라와서 말 걸면 어쩌지? 그러면 뭐라고 대꾸해야 하지? 아니, 내 영어를 알아듣기는 할까? 여차하면 산속으로 뛰어서 도망을 가야 하나? 어느 방향으로 뛰어야 가장 숨기 좋지?' 짧은 순간에 머릿속에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범죄의 위험 앞에 맨 몸으로 노출된 듯한 기분은 처음이었다. 나 정말 인생 꼬이게 되는 줄 알았어!
다행히 몇십 분 후 남성들은 노를 저어 가던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저 별생각 없이 다리 근처에서 좀 쉬다가 다시 이동할 때가 돼서 간 것인지, 아니면 우리가 최대한 태연한 척 그들의 존재를 무시하니 재미가 없어서 그냥 간 것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다행히 우리는 그렇게 범죄의 두려움에서 해방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새로운 공포가 사라지니 다시 아까의 공포가 찾아왔다. 뗏목의 불빛마저 사라지고 난 후 우리 자동차의 헤드라이트를 제외하면 온 세상이 칠흑 같은 어둠이었다. 기온은 더 떨어졌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 모르니 기름을 아껴두려면 자동차 히터를 트는 것도 참아야 했다. 소용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돌과 나뭇가지를 주워와서 공중에 얇게 뜬 바퀴 밑에 쑤셔 넣었지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이럴 때 평정심이 무너지면 끝이라는 걸 본능적으로 깨달은 우리는 서로의 두려움을 자극하지 않도록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다들 속으로는 눈앞이 아찔한 초난감 상태였다.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해본 후 막막함 속에 침묵만이 찾아들 무렵, 우리 중 운전경력이 가장 긴 친구가 결심한 듯 말했다.
"차를 버리고 걸어내려 가서 도움을 청하자. 잭으로 자동차를 들어 올리지 않는 이상 방법이 없을 것 같은데."
"그래도 좀더 기다리다보면 누군가 지나가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우리처럼 길 잃은 사람 아니면 여까지 누가 오겠어..."
결국 어쩔 도리가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걸어내려 갈 준비를 하기 위해 자동차 헤드라이트를 끄고 차문을 잠근, 그 순간. 정말 거짓말처럼 갑자기 다리 건너편 어둠 속에서 '호롱불'이 두둥실 떠올라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사실은 랜턴을 들고 있는 한 쌍의 남녀였지만, 약간 히피스러운 그들의 분위기 때문에 그 순간 랜턴이 호롱불처럼 보였다.
"헤이, 너네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니?"
다리 가운데쯤까지 다가오다가 걸음을 멈춘 여성이 물었다. 우리는 이 믿기지 않는 기적 앞에서 기도라도 하는 심정으로 현재의 상황을 설명했다. 고개를 끄덕이며 자초지종을 들은 여성이 갑자기 다리 건너편 어둠을 향해 소리쳤다. "Chilren, we need your help!"
그 순간, 갑자기 '이 여자, 바람잡이 아니야?'라는 생각이 스쳤다. 이 한밤 중 깊은 산속에서 왜 갑자기 '칠드런'을 찾는가. 그것은 한국말로 하자면 "얘들아, 나와!". 혹시 우리를 안심시키기 위해 사라지는 척했던 아까 그 똇목 남성들을 부르는 신호 아니야? 이런 시나리오가 빠르게 내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지만, 잠시 후 나타난 것은 말 그대로 진짜 '칠드런'이었다. 알고 보니 이들은 10월 초의 쌀쌀한 날씨에서도 3대가 함께 캠핑을 하고 있던 일가족이었다. 다행히 그들은 잭을 가지고 있었다. 자동차를 들어 올린 후 미취학 아동의 고사리 손까지 힘을 합해 다 같이 미니까 감격스럽게도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곳에 1분 1초도 더 있고 싶지 않아서, 감사인사만 겨우 한 후 탈출하듯 빠져나왔다. 그 와중에도 감격적인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 다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기적처럼 무사히 캐빈에 도착한 후 탈진한 우리는 애초 계획했던 바비큐 파티는 때려치우고 라면을 끓여 먹으면서 아까 찍은 사진을 열어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 깊은 산속에서, 그 타이밍에 3대 일가족을 만난 것이 너무 비현실적이라, 혹시 사진 속에 우리만 덩그러니 찍혀 있는 것 아닐까 잠시 오싹한 기분이 들었지만, 다행히 그들은 실존 인물이었다. 그, 그런데, 지금 이 글을 쓰면서 다시 자세히 사진을 살펴보니 호롱불 여사의 치마 아래 발이 없는 것 같다... (물론 농담이다 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