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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벚신발 Jul 26. 2019

<데칼코마니>

습작 - 단편소설

어릴 때, 우리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거울은 좌우가 반전되어 있고, 사진이나 동영상은 그 자체가 왜곡되어있고, 어쩌고 저쩌고.. 때문에 내가 알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진짜랑 사뭇 다르다는 얘기.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내가 아는 나'가 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는 망상을 시작한 시기가. 기껏해야 열 살 열한 살 된 초등학생이 자신의 존재 자체에 의구심을 품게 될 줄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어린애들의 상상력이란 예나 지금이나 상상을 초월하는 모양이다.


그 상상력 덕분에 나름 의연하게 힘든 시기를 보낼 수 있었다. 어느 날부터 아빠가 보이지 않았을 때도, 쌀이 떨어진 탓에 매일 밤 라면으로 허기진 배를 채울 때도, 수차례 꿰매어 너덕너덕한 이불을 덮고 추위에 떨며 밤을 보낼 때도 모두 허상이라고 믿었다. 언젠가 이 꿈 비슷한 것으로부터 벗어나면 거울 앞에 훤칠한 남자가 서있을 것이 화목한 부모님 밑에서 치킨과 피자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세상이 눈 앞에 펼쳐질 것이라고 믿었다. 퍽이나 현실적인 발상이었다. 


이 기가 막힌 발상을 좀처럼 입 밖으로 꺼내는 일은 없었다. 애당초 내 말에 귀 기울여주는 친구도 없었거니와, 엄마한테는 '제정신이냐'와 같은 잔소리를 시작으로 흠씬 두둘겨 맞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때부터 나 스스로도 내 이야기에 떳떳하지 않았던 게 아니었을까 싶다. 


유일하게 내가 진심을 털어놓은 사람은 수정이뿐이었다. 꾀죄죄한 옷차림의 나에게 유일하게 말을 걸어준 유일한 사람이 수정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의 기준으로 수정이는 꽤나 멋있는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수정이는 매일 전과목 학원에 다니면서, 시험에서는 항상 평균 구십오 점을 상회했는데, 그것이 나에겐 무척이나 멋있는 삶으로 느껴졌다. 그 때문에 나는 장난식으로 짓궂게 이야기를 풀기 시작했다. 마치 '너는 이해할 수 없어'라고 으름장이라도 놓는 듯이 말이다. 아마 수정이의 관심을 동정표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곳에서 수정이 너는 돈이 없어서 밥을 굶고, 희망 없이 매일을 살아가'라는 터무니없는 상황설명을 시작으로 '사실 나는 너보다 뛰어나고 너는 내가 생각하는 세계에서는 평범할 수 있다는' 주제로 이야기를 했던 것이다. 그렇게 이야기를 다 풀어냈을 땐, 수정이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봤지? 너처럼 모범생이라도, 그곳에서는 별 거 아닐 수 있다고." 나는 마치 미래에서 온 소년이라도 되는 듯이, 확신에 찬 말투로 당당하게 경고했다.


".... 와아, 어떻게 그걸 알아낸 거야? 학교 끝나고 그 얘기 더 해줄 수 있어?" 


"어.. 어? 이걸 더 듣고 싶다고? 대체 왜?"


"그야 재밌으니까? 학원 가기 전까지 얼른 해줘. 알겠지? 맛있는 거 사줄게. 응?" 


수정이는 내 짓궂은 스토리가 꽤나 마음에 든 눈치였다. 왜 먹을 걸 사주면서까지 본인 욕을 듣고 싶은 건지.. 수정이의 정신은 순수함과 멍청함 사이 그 어딘가에 위치하는 모양이었다.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나는 얼마 안 가 수정이와 곧잘 붙어 다니게 되었다. 내 이야기에 십분 공감해주는 사람은 수정이 뿐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꿈꾸던 세상에 수정이를 아내로 끼워 넣은 것도 그 무렵이었다.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서 힘든 생활을 보냈지만, 결국에는 멋진 사람을 만나서 행복한 삶을 영위하게 되는 식의 흔하디 흔한 얘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정이는 이 흔해빠진 스토리가 꽤나 관심이 가는 눈치였다.


"그래서 그 멋진 사람은 대체 어디에 있는데?" 


"글쎄.. 그 사람은 여기에선 엄청 하찮은 사람이라서" 수정이는 내가 이런 식으로 얼버무릴 때마다 금방이라도 울 기세로 따지고 들곤 했는데 이 바보는 대체 어디까지 믿을 셈인지 그 멍청함에 걱정이 되면서도 이 순수함을 마주하고 있자면 이야기가 정말 현실이 될 것 같다는 착각에 더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참으로 혼란스러운 감정이었다.


"우리 반에 있어" 그렇게 나는 수정이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수정이에게 힌트를 하나씩 던져댔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수정이는 눈이 이만큼 커져선 환하게 미소 짓곤 했는데, 아마 다음 힌트를 얻어내기 위해 꾀를 쓴 것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을 뽑자면 나는 수정이의 그런 환한 미소를 엄청 좋아했다는 사실이다. 나는 이따금씩 소싯적의 내가 조금만 더 솔직했었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하곤 한다.


"빨리 알고 싶어. 여기선 그 사람이 하찮은 사람이고, 내가 괜찮은 사람이라면 내가 그 사람이랑 결혼하면 되는 거 아냐? 반대쪽 세계에선 그 사람이 나를 챙기면 되는 거지. 데칼코마니처럼 말이야." 나는 수정이가 태평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당황한 나머지 대충 대화를 얼버무렸다. 데칼코마니가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그것까지 세세하게 물어볼 정신은 없었으므로.


그 날은 수정이가 빨리 남편을 알려달라며 유난히 떼를 쓰던 날이었다. 집에서 대체 어떤 결심을 하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요전처럼 한 두 개의 힌트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듯이 달려들었다.


"시간이 없어. 빨리 알려 달란 말이야!" 수정이는 새빨간 눈을 한 채로 울먹이며 말했다. 아마 수정이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른 모양이었다. 


"그럼 내일은 무조건 알려줄게! 됐지?" 언젠간 말하겠다고 다짐은 했었지만, 그날은 마음의 준비가 덜 되어있었기에 도저히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수정이는 환하게 미소 짓는 대신에, 잔뜩 시무룩한 표정을 하고는 운동장을 벗어났다.


그게 마지막으로 수정이를 본 기억이다. 선생님으로부터 전해 들은 바로는, 아버지 사업 때문에 먼 해외로 떠났다는 이야기. 아쉬움에 끝끝내 수정이에게 말하지 못한 것이 후회로 남았다. 이후, 나는 대학에 낙제했을 때, 사업에 실패했을 때마다 아침에 일어나면 큰 기대를 안고서 거울을 마주했다. 혹시라도 오늘 아침은 이 지긋지긋한 세상을 벗어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 그 기대마저도 하나뿐인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을 때는 다 내팽개쳐 버렸다.


그렇게 맥없는 삶을 지속하던 도중, 페이스북과 인스타를 통해서 수정이가 싱가포르의 유명한 예술 대학에 진학했다는 사실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차기 일러스트레이터로서 자신의 작품들을 잔뜩 올려대고 있었는데, 나는 스크롤을 내리다가 금방 폰을 내려놓을 수 밖에 없었다. 수정이의 데칼코마니 작품을 보고 나서는 왠지 모를 쓸쓸함에 사로잡혔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수정이에게 본심을 말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지금 이곳뿐이고, 내 삶은 너무도 비극적인 나머지 좌우가 반전된 데칼코마니 같은 세계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너무도 명확하게 깨달았기 때문이다. 

출처: https://it.dhgat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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