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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송 Aug 03. 2020

계란장, 그 고독에 대하여


 부유한 가정환경이 아니었는데도 삼시 세 끼를 꼬박, 다른 반찬을 곁들여 먹었다. 그때는 그게 얼마나 호사스러운 일인 지 전혀 몰랐다. 어떤 사람인 지를 가늠하려고 보면 그가 먹은 것들 2년간을 돌이켜보라는데, 그에 기준하면 나는 아주 질이 좋은 사람이었다. 태어나서 성인이 되어 부모의 곁을 떠나기 전까지, 엄마가 영혼을 갈아 넣으며 만들어 먹인 것들로 보기 좋게.. (그 이상으로) 살이 올랐던 나니까. 제철의 빛을 담아 영양소가 풍부한 식재료들을 엄마는 요렇게, 조렇게 매번 같은 그릇에 잘도 담아냈다. 


 요즘의 요리는 알찬 영양소에 먹는 이의 기분까지 고려해 다양한 식기와, 그릇에 담아내는 모양새(Plating)까지 신경을 써서 그 세련미가 깊지만. 내 유년기엔 늘 같은 밥그릇에 같은 국그릇, 그릇에 이가 하나라도 나가면 밥과 국의 그릇을 짝짝이로 써야 하는 때가 다반사였다. 먹는 시간의 즐거움보다 먹거리 본질에 집중하던 시절, 채소가 듬뿍 담겨 잘박하게 끓여진 된장찌개도, 불 조절에 심혈을 기울여 봉긋하니 솟아오른 계란찜도, 두부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가 아까워 양념을 더해 내었던 콩비지도 모두 같은 뚝배기에 담겨 나왔다. 오롯이 먹거리 자체에만 바라보던 시절이다. 


 그렇게 자라온 내가, 24개월 차이의 두 아이를 낳고 키우며 놓지 않았던 학업에, 손 하나가 더해지는 일이 그렇게도 고맙던 철. 나는 친정엄마의 손을 빌리지 않으려 발버둥을 쳤다. 이유인즉슨, 내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엄마는 '퇴근 없는 여성(일터로 출근, 집으로 출근)'이셨기에. 그러면서도 연년생 세 딸들을 먹이고, 입히고 키워내느라 인생의 절반을 보내셨기에. 차마 그 자식의 자식까지 먹이느라 부치는 힘을 써야 한다면 한 여자의 인생이 너무나 가혹해질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세 자매 중 막내딸인 주제에 가장 먼저 가정을 이뤘기에, 내가 먼저 행동하는 것이 곧 언니들의 삶으로 이어질 것 같아서 엄마의 수고를 세배로 덜어내고 싶은 마음도 조금은 있었다. 


 그렇게 잘해놓고도 지금 와서 간혹 드는 생각은, 적당히 꾀를 부려 먹거리 중 기본이 되는 찬 몇 가지라도 얻어 볼 것을.. 하는 생각이 종종 들기도 한다. 엄마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내가 그간 평생 먹어왔던 엄마표 음식으로 빚어진 나니까, 내 자식의 먹거리도 내손으로 빚어내고 싶은 마음이 컸으나 그것들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끼니별 필요 영양소를 가늠해 메뉴를 구상하고, 식자재를 구매해서 그에 맞는 조리법으로 식탁에 어울리게 담아내기까지.. 20분이 채 걸리지 않는 식사시간에 비해 고된 작업이었다. 


  여차 저차 한 사정으로 지난 5년 전부터 다시 먹게 된 엄마표 저녁. 엄마는 2,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것 하나 없는 식탁을 차리신다. 전기밥솥의 역사와 위엄을 한방에 무너뜨리는 갓 지은 밥에 간간히 떠 넣을 국물 하나, 단백질 (주로 생선과 두부) 메인 요리, 곁들이는 제철 나물에 김치류도 오이절임과 무생채, 때로는 장아찌, 배추나 얼갈이, 총각무로 담은 여러 가지 중 서너 가지가 된다. 가끔은 카레나 비빔밥, 콩나물밥 같은 한 그릇 음식도 먹었는데, 재료 손질이며 들어가는 영양소는 모두 6첩 반상 이상의 것이었다. 


  늦어지는 야근으로 속이 허한데, 급히 요기할 수 있는 샌드위치나 빵조각 같은 것들로는 그 허기가 채워지지 않았다. 식사 시간이 더 늦어지더라도,  마음의 허기까지 달랠 수 있는 음식이 필요해 배를 움켜쥐으며 귀가하는 날에는, 한 번도 그 예상이 비껴간 적이 없다. 어떤 메뉴에도 관계없이 엄마의 밥을 한 큰 술 떠 입에 넣으면 그 피로가 노곤하게 씻겨 내려, 이내 몸과 마음이 든든해졌다. 누구는 소울푸드가 떡볶이고, 누구는 부대찌개며, 누구는 맥주에 치킨이라고 하는데. 나의 그것은 어떤 메뉴고 상관없이 '엄마표'였다. 


  더위가 시작되기 전에 잘 먹어두어야 여름을 잘 날 수 있다는 엄마의 믿음으로, 나는 초복날 한방재료가 한아름 들어간 오리백숙을 먹었다. 연하게 데쳐낸 부추(정구지)의 내음이 얼마나 좋던 지, 바닥난 기력이 퐁퐁 솟는 것 같았다. 쫑쫑 썰어 된장을 바른 풋고추에서는 적당한 참기름 향이 났고, 담근 지 일주일쯤 된 듯한 얼갈이김치는 알맞게 익어 아삭아삭, 그 새콤함과 식감이 살아 있었다. 배가 불러 더는 못 먹겠다고 숟가락을 내려놓을 때쯤 나오는 야채 찹쌀 죽은 내 위의 크기가 어마어마 함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모든 그릇을 발우공양 수준으로 깨끗이 비워내고는. 썰어둔 수박을 꺼내 먹으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냉장고를 열었을 때, 마주한 것들에 나는 코가 시큰거리지 않을 수 없었다.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져 있는 수박이 유리로 된 김치통에 한 가득, 매끈히 까여 맛간장에 담겨있는 계란이 또 한가득. 


 나는 계란장을 만드는 고독을 잘 안다. 혼자 반찬 만들기에 전전긍긍하던 날들에. 아이들의 반찬으로 계란장이나 메추리알 조림 같은 것들을 종종 만들었는데, 알알이 하나하나 껍질을 벗겨내는 시간이 그렇게 외로울 수가 없었다. 이는 김밥을 쌀 때에도 흡사했는데, 맛있게 먹을 가족들을 떠올리면 흐뭇한데도 그 긴 시간 동안 같은 작업을 해내는 게 한편에는 외로움이 짙었다.


  나는  얼마나 수많은 엄마의 외로움을 먹으며 자라왔을까. 한 뼘씩 키가 자랄 때마다, 뼈마디가 굵어질 때마다 엄마의 고독은 얼마나 깊어갔을까. 서른 하고도 세 번째 해가 지나도록,   엄마가 만든 음식을 먹는 호사를 누리면서도 계란장을 마주하기 전까지 나를 살찌웠던 시간들이 엄마의 외로운 시간들임을 왜 가늠조차 하지 못했을까. 그렇게 줄기차게 먹어왔으면서도 왜 이제야. 


 뻔뻔하지만, 충분히 늦었지만 더 늦기 전에. 여름을 맺는 마지막 복날에는 내 손으로 빚어낸 것들로 엄마의 허기가 채워질 수 있게 해야겠다. 마음의 허기도 채워드리고. 담아내는 그릇에는 온기와 감사와 사랑을 더해 내어 드려야지. 


▲ 고독한 계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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