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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strip Jan 02. 2024

무 감자 당근

냉이 표고


1. 후드리챱챱

제주 민속 오일장은 2일 7일로 끝나는 날에 열린다. 이게 은근히 타이밍 맞추기가 쉽지 않다.


 휴일에 오일장이 맞물리면 다른 계획은 제쳐두고 우선 장으로 간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봤을 때 약.. 두 달에 한번 정도 기회가 오는 듯하다.


그래가지고 우선 시장 입구는 여러 곳이 있는데 야외에 주차를 하고 늘 들어가는 입구에는 임꺽정이 반겨준다. 이 간판을 기준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바로 식당들이 나오는데, ‘춘향이네’는 언제나 대기줄이 길다. 오일장은 3시면 거의 마감하는 분위기라서 이른 아침에 오는 게 아니라면 이 식당에 가는 건 포기해야 한다. 어떨지 궁금하긴 한데 기다려서 먹기는.. 언젠가 한가할 때 한 번 들를 수 있으려나.


오…….

채은이는 지난 크리스마스에 장염으로 고생한 덕분에 당분간 식단을 조절해야 해서 자장면은 메뉴 리스트에 없었는데… 이런 비주얼을 마주치면 멈출 수밖에 없다. 가게 앞에서 묵묵히 면을 뽑아내는 기계와 팔팔 끓는 솥, 확실히 손으로 반죽해 보이는 둔탁한 밀가루 반죽과 뒤편에서 소란스레 이야기 나누는 여러 사람들. 우선 자리에 앉았다.


오….

신기한 가격이다. 최저시급으로 1시간을 일하면 자장면 두 그릇을 먹을 수 있다. 맛은 상당히 놀랍진 않은데 무언가 이야기가 잔뜩 숨어있는 것 같아 즐거운 면발이다. 우선 자리를 잡고 줄을 선다. 사장님께 구두로 주문을 하고 직접 현금을 건네면 작업대 위에 빈 그릇을 올려두신다. 빈 그릇 개수가 주문서다. 한 명 한 명 지나 차례가 되면 음식을 받아 자리로 간다. 이 과정에서 혼돈이 시작된다. 어떤 이는 계산을 했는데 음식이 없다 하고, 누군가는 차례가 돌아오지 않아 받아 불만스럽다. 옆에서는 친절한 아주머니가 시스템을 설명해 주고 뒤에선 찰진 소리로 반죽을 걷어내는 아저씨, 단무지, 양파 무슨무슨 이야기. 이 과정을 가만히 지켜본다.

 언젠가 삶이 권태롭거나 단조롭다면 시장에 가길 추천한다. 예측대로만 흘러가는 현대의 삶에서 멀리 여행을 가지 않고도 다양한 자극을 받을 수 있다. 말 그대로 다양한, 아주 랜덤한 상황과 소리, 냄새에서 오묘한 희열을 느낀다. 이것은 현실세계의 숏 플랫폼. 상황 속에서 불편함을 느낄 수 있지만 사실 그것은 즐거움의 토대가 되는 감정이다. 목이 말라야 물을 마시는 것처럼 약간의 혼돈에서 차분함의 진가를 맛볼 수 있다.

채은이는 어머니를 “똘배”라고 부른다.

그냥 호떡 아니고 ‘쑥’ 호떡. 잠시 화장실을 다녀온 사이에 쑥호떡을 두 개 사 온다. 다른 호떡집에 줄을 선 사람들을 보고 ’ 저기 쑥호떡이 더 맛있다고 얘기해줘야 한다 ‘고 이야기한다. 맛있다.

그리워질것들

내년에는 세 달 정도 인도와 태국에 갈 계획이라 가기 전에 듬뿍 보고 먹어놔야겠다.

짜증이 대단하네

벌써 밀가루 음식을 두 개나 먹었는데, 와플이 먹고 싶다고 한다.

“먹으면 행복해질 것 같아? 후회할 것 같아?”

“행복해질 것 같아”

몇 번 말렸지만 많이 걷고 짐도 들어야 하니 우선은 먹여야겠다.

ㅎㅎ

정말로 행복해졌다. 게다가 후회하지도 않는다.


웃음은 보약과 같다…뉴 에로송… 상상초월…


2. 이제야 장보기

우선은 잡곡이다. 보통 귀리와 현미로 밥을 지었지만 최근엔 보리를 자주 사용한다. 보리 한 되와 차조를 조금 샀다.

[보리 6,000원 차조 4,000원]


장을 볼 땐 무거운 순서로 본다. 곡물을 샀으니 구황작물을 둘러본다. 감자가 산지별로 정리되어 있고 연근도, 당근도 흙이 잔뜩 묻은 채로 정렬되어 있다. 연근은 집에서 요리해 본 적은 없지만 우리 둘 다 워낙 좋아하는 재료라 시험삼아 한 개만 구매해 봤다. 방금 채은이가 주방에서 볶아줬는데 상당히 맛있다. 보통은 물엿과 간장으로 조려먹지만 재료 본연의 맛을 즐기는 채은이는 소금으로만 간을 했다. 식감이 매력적이다. 전부 다 볶지 않고 약간 빼놓은 것은 이따 밥에 같이 넣자고 한다. 당근은 옹기종기 귀엽다. 마트에서 구좌당근 두 개가 5천 원일 때도 있는데 여기선 한 바구니가 같은 가격이다.

[감자 5,000원 연근 2,000원 당근 3,000원]



미니 단호박 색이 다양한 게 귀엽다. 한 주먹에 쏙 들어오는 크기. 이번엔 사지 않았지만 올 가을쯤에 가득 사서 오븐에 구워 먹어야겠다. 속을 파고 여러 재료를 채워 넣은 뒤 치즈와 후추를 올려 구우면 한 끼 식사로 든든하다. 굽지 않은 것을 포장하면 들고 다니기도 쉬우니 다음에 캠핑 갈 때 준비해 봐야겠다. 불이 사그라든 숯불에 얹어 놓으면 달콤하게 익을 것 같아.

아직 양파 철이 아닌데 다들 신선하다. 양파는 어디에 넣어도 한 몫하는 식재료다. 살짝 볶으면 단맛이 기똥차게 올라오는 게 다른 재료의 맛을 조화롭게 어우러 준다. 그냥 고추장에 볶아 먹어도 맛있다. 한 바구니 챙겼다.

무는 비트와 함께 피클을 담가 먹을 예정

[양파 5,000원 무 1,000원 비트 2,000원]


고구마!


제주는 표고버섯을 많이 키운다. 덕분에 시장에선 파치를 구하기가 쉽다. 최고등급 버섯과 가격 차이가 많이 나지만 그런대로 맛있다. 버섯은 언제나 맛있으니 한 바구니.

또 제주는 봄나물이 두 번,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나온다. 어린 시절, 그러니까 한 초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봄이면 어머니와 뒷동네로 냉이를 캐러 다녔었다. ‘이거는 냉이고, 이것은 황소냉이야’ 황소냉이는 식감도 질기고 향이 많이 나지 않아 캐지 않는 것이 좋다 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황소냉이는 다른 종이 아니라 그저 조금 더 자란 냉이였던 것 같다. 봄에 나는 향채들은 크기가 커가면서 향이 줄어들기 때문에 어머니는 날이 너무 따듯해지면 냉이 캐는 것을 그만두셨다. 한 철에만 즐길 수 있는 진정한 냉이향은 어린 나에게 큰 충격이었다. 살짝 데쳐 고추장에 버무려 놓은 것이 그중 가장 맛있었다. 약간 씁쓸한 맛과 약간의 단맛, 뿌리가 얽혀 가끔 씹히는 아삭한 식감과 알 수 없는 향. 향신료에 집착하게 된 첫 번째 계기가 아니었나 싶다. 중학교 때에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냉이 캐기를 다녀온 후로 여러 곳에서 먹어봤지만, 그날의 향은 나질 않는다. 익숙해진 탓인지 그저 그날의 기억을 간직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다. 나는 어떤 음식들에 대한 첫 번째 기억을 또렷이 갖고 있다. 깨찰빵, 바질페스토, 카레, 고사리나물. 오늘 저녁은 냉이 된장국을 끓여야겠다. 이 냉이도 향이 강하지 않다.

나는 고구마가 이렇게 다른지 몰랐다. 밤고구마 호구마 정도인 줄 알았는데, 산지별로 크기도 색도 다르다. 귀여워서 사진만 찍었다. 아저씨가 홍보해 달라고 하셨는데, 고구마가 필요하면 주소 적어주세요.

[표고 2,000원 냉이 3,000원]


계란도 한 판 샀다. 저녁에 계란말이도 메뉴에 추가. 이 계란가게는 (내 생각에) 작은 가족농으로 운영하시는 듯하다. 우선 계란이 많이 준비되어 있지 않고 사장님과 그의 아들이 풍기는 느낌이 그러하다. 우유과 계란은 브랜드와 상관없이 무조건 가까운 곳에서 구매하는 것이 이득이란 이야기를 들었다. 신선도의 문제도 그러하고 가족농이 성행해야 기후와 닭과 소들에게도 여러모로 좋다. 즉 우리에게 이득이다. 이제 저녁 준비를 하러 가야겠다.

[계란 한 판 5,000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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