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창 너머에 관하여
지독한 칼바람, 그 계절은 어느새 저물고 조용히 봄이 다가왔다. 오늘은 날이 많이 따듯하다. 오랜만에 느껴지는 봄냄새, 대나무발에 부닺히는 살랑살랑. 그 질감.
심리학자 폴 블룸의 <최선의 고통>과 생화학자이자 메사추세스대 마음챙김 센터장인 저드슨브루어의 <불안이라는 중독>을 통해 바라본 불안과 행복에 관한 냉소적 시선.
우리는 본래 걱정하기로 살아남은 종이다
어느 날 밤, 혼자 누운 침대 발치에서 어색한 소리가 들린다. “무슨 소리지?.. 바람인가? “로부터 시작한 생각은 꼬리를 물고 언젠가, 어디선가 봤던 이미지들을 조합해 어느새 ”귀신인가? “로 귀결된다. 이미지는 끝없이 창발 되어 호흡을 가빠지게 하다 결국 해가 뜨고 나서야 간신히 잠에 든다.
우리는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아마 내일도 세상으로부터 쏟아지는 수많은 불안의 근원들을 정통으로 맞는다. 전쟁, 기아, 경제, 기후위기부터 당장 어제의 그 생각으로 인한 수면부족과 그로부터 이어지는 상사의 의미심장한 웃음. 그 웃음은 어떤 의미였을까, 비웃음인가, 내일은 세상이 어떻게 바뀌려나. 모든 것이 불확실하다. 지금의 모든 정보는 불확실하다. 불안은 그렇게 시작된다.
하나의 세포에서 최초의 포유류를 거쳐 호모사피엔스가 되기까지 우리의 뇌는 클루지적인 방식으로 진화해 왔다. 불합리한 운영체제를 버리고 시스템을 새로 구축하는 방식이 아닌 기존에 있던 뇌 위에 새로운 뇌를 덮어씌우는 방식으로 진화했고 우리는 이를 오래된 뇌와 새로운 뇌라 부른다. 오래된 뇌는 단순한 생존 알고리즘이다. 인지적 진화가 이뤄지기 한참 전부터 우리는 높은 곳과 검치호랑이의 발자국이 지난 곳을 피하는 기재를 갖고 있었다. ‘공포’라 불리는 이 기재는 굉장히 효율적이다. 어디선가 낙엽 밟는 소리가 들리는데 나 같은 사람은 “음.. 낙엽소리가 들리는 군, 가을이니 썩은 나뭇가지가 떨어지면서 나는 소리일 거야. 괜찮다.“ 라고 시간을 쓰다가 뒤통수를 노리는 호랑이의 먹이가 되어버렸을 것이다. 조상들 중엔 이런 사람이 있는가 하면 “뭐야 빨리 도망치자”라며 냅다 상황을 피해 맹수의 습격에서 살아남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부적강화(Negative Reinforcement)의 보상으로 이후에도 이런 상황에서 회피하기 유리했다. 우리 대부분은 도망자의 후손들이고 ’본능‘이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우리의 유전자 아주 깊숙이 각인되어 있다. 공포는 매우 즉각적이며 효율적이다. 공포에 관여하는 뇌는 ’편도체‘로 우리 뇌 안쪽 깊숙이 위치해 있다.
7만 년 전 어느 시점, 현생인류와 거의 동일한 수준의 인간들은 집단의 규모를 키우고 사회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새롭게 발달시킨 뇌를 갖고 나타났다. 전전두피질이라는 부위는 의식과 사고, 계획을 관장하는데 이 새롭고 나약한 뇌는 정보가 조금만 누락되어도 오류에 빠진다. 오래된 뇌가 위험한 상황을 회피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정보가 불완전하면 전전두피질이 역할을 시작한다. 부족한 정보를 채우기 위해 새로운 뇌는 가능한 모든 상황을 상상하고 계획해, 최적의 경로를 선택하게 도와준다. 이 과정에서 불안이 개입된다.
불안은 걱정과 긴장감으로 동굴에서 나와 무슨 일인지 ‘파악’하게 하는 촉발인자다.
혹시나 있을 위협으로부터 나의 아내와 아이들을 지켜야 한다-> 밖으로 나간다 -> 다행히 아무것도 없다. 바람소리였나 보다 -> 해소
하지만 현대인류는 ‘밖으로 나간다‘ 이후에 과정들이 생략된 경우가 많다. 당장 확실한 정보를 찾을 길이 없어 끝없는 걱정의 고리에 빠져든다. 그 악순환자체도 고통스럽지만 과정에서 더 위험한 속임수가 발동한다.
걱정은 그 자체로써 보상이다. 동굴 밖으로 나가는 행위는 우리 뇌에게 ‘무언가 하고 있으니 일단 잠자코 있어봐’라고 말하는 셈이다. 우리 뇌는 서로 속고 속이는 게임에서 한 술 더 뜬다. ‘그래 잘하고 있는 것 같네, 계속해’. 뇌는 문제가 해결되는 것 같은 = 상황의 통제력을 가진 것 같은 착각으로 보상을 내린다. 행동보상이 주어지면 우리는 끝없이 설탕을 찾는 것, 릴스를 세 시간 동안 보는 것처럼 행동을 반복한다. 이것은 중독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공포+불확실성 = 불안‘ 이라는 기재는 뇌가 우리에게 ‘생존하라’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뿐, 뇌가 나쁜 마음을 먹고 사탄이 들려 장난을 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우리를 돕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류의 삶은 조금 다르다.
이제 까마득한 밤, 동굴밖으로 나가 소리의 근원을 찾는 일은 생존에 필수적인 것이 아니게 됐다. 안락한 소파에 누워 감자칩과 뉴스로 저녁을 마무리하는 우리에게 불안이라는 뇌의 신호는 자주 오작동 하게 된다. 세상은 많이 바뀌었지만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동굴 속 유인원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 뇌는 검치호랑이의 울음소리와 한밤중에 상사가 보낸 이메일의 차이를 구분하지 못한다. 한 연구에서는 고소득국가일수록 범불안장애 발병률이 높다는 통계를 내놓았다. 기본욕구가 충족된 상태에서 우리의 생존용 뇌가 위협이나 걱정의 대상을 찾을 한가한 시간이 더 많다는 의견이다. 재미난 예시가 있다.
아이를 처음으로 심부름 보낼 때 집에 있는 엄마의 상황을 상상해 보자. 지금은 스마트폰과 gps, 각종 센서가 넘쳐나는 시대이다. 혹시나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길까 추적기를 달아 거리로 보낸다. 아이가 갑자기 길 한복판에 멈춰서 움직이질 않는다. “나쁜 사람을 만났나? 교통사고가 났나?”엄마는 불확실한 정보로 기인한 불안기재가 작동한다. 당연한 일이다. 사실 아이는 신발끈이 풀려 다시 묶으려는데 방법을 까먹어 당황해하고 있을 뿐이었다. 과거에는 이런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보내고, 무작정 믿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정보(불확실한)가 많을수록 우리는 불안해할 상황이 잦아진다. 정보 과부하. 과거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작동원리가 그렇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예시로는 코로나 팬데믹 초기의 상황이 있다. 당시 오스트리아에 살고 있던 나는 똑똑히 목격했다. 각종 배낭, 슈트케이스를 짊어진 사람들이 정신을 잃고 마트로 달려가 몸싸움 끝에 얻어낸 두루마리 휴지들을… 어떤 마트에선 1인당 화장지 구매개수를 제한하기도 했다. 당시 여러 소문이 퍼졌는데 대부분 비이성적인 소문들이었다. 이때 우리의 뇌는 극심한 불안으로 전전두피질을 오프라인 시켜버리고 우선 다른 사람들의 행동을 모방하기 시작한다. 논리적으로 지하창고에 6개월치 화장지를 쌓아놓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지만 우리는 근본적으로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이것은 사회적인 전이현상이다.
숙련된 명상가가 명상에 빠질 때 fMRI로 뇌를 스캔해 보면 비활성화되는 부위가 있다. DMN(Default Mode Network)라 불리는 네트워크는 뇌의 앞쪽 전두엽 피질 뒤쪽 대상피질… 등등 에 아무튼 해당하는 영역이다. 이 부위는 공상이나 계획 수립, 미래를 상상할 때 활성화 되는데 이때 뇌는 기존의 정보들을 취합해서 정보를 만든다. 무엇인가 ‘이해‘했다는 것은, 내가 이전에 경험한 것들과 지금 경험하는 현상들 사이에 교집합이 생겼다는 말이다. 무엇인가 처음으로 경험할 때의 기억이 또렷한 이유는 그것이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정보이기 때문이다. 이는 새하얀 눈밭 위에서 썰매를 타는 것과 같다. 처음에는 썰매가 이리저리 휘둘리며 나아가지만, 한 번 길이 생기면 두 번 세 번은 길을 따라 미끄러지는 것이다. 이것은 ‘습관’이라 불리기도 하고 ‘편견’이라 불리기도 한다. 우리 두뇌모델은 습관을 근육기억으로 전환한다. 마치 자전거에 한번 익숙해지면 왼발, 오른발 하며 타지 않는 것처럼. 매일 아침 오르는 출근길에선 길을 헤매지 않고도 유튜브를 시청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두뇌모델이 이런 식으로 작동하는 이유는 효율성 때문이다. 이미 처리한 정보는 그대로 두는 편이 낫다. 매일 정보를 새로 처리하면 우리는 오후 2시가 되기도 전에 넉다운 되버릴 것이다. 익숙한 것은 더욱 익숙하고 새로운 것은 강렬한 한방. 같은 이유로 우리는 어린 시절의 1년과 지금의 1년의 속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다.
명상가의 DMN이 비활성화된다는 것은 경험에 입각한 습관적 사고를 멈추고 있는 그대로 지금을 받아들인다는 이야기다. 마치 어린아이의 뇌처럼 새롭게 길을 닦는 것이다. 여기서 재밌는 사실은 환각제인 LSD나 매직머쉬룸(Psilocybe속 버섯)을 했을 때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그들이 ‘기분이 좋다’가 아니라 ’깨달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 인 것 같다.
주저리주저리 뇌가 어떻고 하는 것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중요하다.
우리는 여러 이유로 불안한 것처럼 이를 해소하는 방식도 제각기다. 하지만 걱정에 중독이 되는 것처럼 알게 모르게 불안 해소라는 보상이 아니라 해소하는 방식에 중독되는 경우가 많다. 필자도 중독에 매우 취약한 사람으로서 책에서 이야기하는 습관 고리를 끊을 수 있는 방법론적인 해결책이 많이 도움이 되었다. 하나 다 열거하진 않을 생각이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나 같은 취미독서가에게 무엇인가를 제안하는 것은 위험한 일인걸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키워드는 너무 핵심적이라 제시하고 싶다. 호기심
앞서 나열한 뇌의 작동원리들을 요약하자면
우리의 뇌는 자율주행자동차다.
대부분의 문제들이 그 기본원리를 알게 되면 해결되듯, 낯선 이와 소수자들의 핍박은 그들을 곁에 둠으로써 생기는 공감으로 이해하고, 알면 사랑하리라는 최재천 교수님의 말씀처럼. 우리는 우리에게 호기심을 가져야 한다. 어디선가 내 자동차의 문제가 생겼다 느껴지면 보닛을 열어 나사가 빠진 곳이 어딘지 확인해야 한다. 종이나 메모장을 열어 습관의 고리를 명확히 보기 시작한다. 물론 불안기재가 발동한 친구에게 “일단 종이에 적어보고 …..차분하게…”하는 것은 전혀 도움 되지 않는다. 우선 지금의 불안을 충분히 느끼고, 한숨 자고, 달콤한 것도 좀 먹고 책상에 앉아 적어본다.
1. 나의 불안인자가 무엇인지 / ex) 담배를 펴서 인생이 망할 것 같다.
2. 해소하기 위한 행동 / ex) 죽을 때까지 절대 피지 말아야지! 굳게 다짐한다. -> 주의가 산만해지고 의지가 꺾임 -> 달려 나감
3. 보상 / ex) 더부룩한 속, 텁텁한 입, 기분이 나쁘다.
4. 학습 / ex) 그러지 말았어야지.. 자책한다.
이 경우에서 예시자의 실수는 상황을 인지하자마자 성급하게 바로 잡으려 시도한 것이다. 이는 섣부른 자동차 자가수리 같은 것이다. 흡연이 나쁘다 = 부정적 결과로 이어지며 효과가 줄어든다. 앞으로 24시간 안에 흡연을 해야만 하는 이유는 수천 가지도 생길 수 있다. 당장의 의지로 결단을 내리기 전에 짧고 잦은 목표를 세운다. ‘오케이 앞으로 5분 동안은 흡연하지 말아야지 x 100’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반성해야지. 그래도 어느 단계에서 문제가 생겼는지 파악할 여지를 찾았다. 중요한 것은 호기심이다. 저자는 이 외에도 책의 거의 대부분을 할애할 정도로 많은 방법을 제시했는데 필요한 사람이라면 꼭 직접 읽어보길 추천한다.
요즘 들어 요가와 명상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이는 사회가 불안하고 우리 구성원들 개개인의 마음에 얹힌 감정의 고리가 많다는 반증인 것 같다. 비단 요가와 명상뿐 아니라 캠핑, 낚시, 등산, 사이클 등 요새 유행하는 취미들은 대부분 마음 챙김의 성향을 띠고 있다. 모두 건강하고 똑똑하게 해소하는 듯하다. 나는 아침에 설거지를 하며 마음챙김을 한다. 명상은 생각을 비우는 것이 아니다. 생각, 감정, 감각은 우리 인간을 인간으로 존재하게 하는 요소들이다. 단지 이것들과 우리의 관계를 조정하는 것이다.
명상이 마음챙김의 대표적인 방식인 이유는 그것이 언제 어디서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한 번에 단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 없다. 무엇을 하든 항상 ‘호흡’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호흡에 집중하는 것은 유일하게 단 한 가지에 집중할 수 있는 행동이다. 가장 효과적이라는 것이 꼭 가장 보편적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챙김이란 현재의 순간에 의도적으로, 무비판적으로 주의를 기울일 때 이뤄지는 인식이다.- 존 카밧진
우리의 뇌는 불확실성을 끔찍이 싫어한다. 우리는 그렇게 진화해 왔고 이것은 필연적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세상은 본디 불확실하고 뜻대로 되지 않는다. 당장 내일 점심으로 뭘 먹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더 큰 생각과 계획들은 우리를 불안으로 떠민다. 그러나 우리는 여태껏 그래왔듯 끝없이 고민하고 걱정해야 한다. 그것이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핵심 인자니까. 이와 겸해 나에 대한 호기심과 열린 마음, 때때로 행해지는 마음챙김요법으로 타파해 나가며 한발 한발 행복으로 가깝게 다가가야 한다.
우리 모두는 행복한 삶,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원한다. 하지만 또 아쉽게도 행복이란 정형화된 값이 아닌 수행 과정에서 얻어지는 보상일 뿐이며 항상 고통을 수반한다. 우리 뇌가 행동을 반복하게 하는 단순한 화학작용일 뿐 이는 금세 식어버린다. 또한 삶은 원래 의미 없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을 안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는 건 없다. 우리는 여태껏 그래왔듯 여전히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길 원한다. 반어적이게도 이러한 사실은 우리에게 자유를 선물한다. 행복이라는 것은 도달할 수 있는 목표가 아닌 길 위에서 만나는 민들레 한 송이인 것이고, 의미라는 것은 없기 때문에 내 맘대로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따듯해진 날씨로 모두가 기쁜 마음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건 축복스러운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이 따사로움을 충분히 만끽하는 것이다.
누가 뭐래도 삶은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다. 들판에 곧게 솟은 소나무는 소나무라는 이름을 갖기 전부터 아름다웠고 생물학적 분류를 차치하더라도 우리는 그것이 그것임을 안다. 삶은 그런 것이다. 이 무한하고 불확실한 세상에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뿐이다.
이러한 삶을 바라보는 나의 태도. 이것이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 최고의 능력이다. 끝으로 명상가이자 철학자, 작가인 앨런 와츠의 이야기로 마무리하겠다. 모두 행복하세요.
여러분이 75년 동안의 삶을 선택해서 살 수 있는 꿈을 꾼다면?
그리고 다음날 또 같은 꿈을 꿀 수 있다면?
매일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면?
당연히 당신은 모든 쾌락을 선택하며 이를 충족시킬 겁니다.
하지만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이러한 삶을 계속한다면,
아마 당신은 일주일 정도 뒤, 스스로 고통과 모험의 삶을 선택할 것이고,
결국 여러분은 불확실성과 함께 사는 것을 선택하게 될 겁니다.
- 앨런 와츠 (1915~1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