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strip Apr 18. 2024

밥값 pt.2

봄나물 시리즈


1.  외손자

이번달 중순, 4월 25일부터 3개월간 인도-태국 여행을 떠난다. 하고 있던 일을 정리하고 육지에서 2주 정도 시간을 보낸다. 어제는 할머니네 집에 놀러 왔다.


 말 그대로 ‘놀러’ 왔다. 매번 올 때마다 어른이 된 척 아버지 차를 빌려 타고 급하게 ATM에서 돈을 뽑아와 급하게 점심식사만 하고 떠났다. 며칠 전 친구들에게 물었다. “할머니와 여행을 다녀올까, 공구를 잔뜩 가져가서 집에 필요한 선반 같은 걸 만들어드리고 올까?”, 나의 지혜로운 친구들의 “그냥 손자로 있어라. 할머니에게 할머니로서의 시간을 선물해 드리고 와라.”라는 현답에 무릎을 탁 쳤다. 왠지 살면서 두 번 다신 없을 것 같은 이 여유로운 시간에 나는 다시 어린아이가 되기로 했다.
감곡터미널-관한리

 우선 이번엔 자동차가 없다. 버스도 다니질 않는 시골이라 우직하게 걸어갈 생각이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지만 일주일치 짐을 등에 업고 길에 오르니 예전 도보여행이 떠오른다.

 아버지는 내게 처음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러 가던 날에 대해 이야기해 줬다. 그때 아버지는 자가용이 없었고 젊은 날의 그들은 선물을 양손에 든 채로 이 길을 걸었다고 한다. 한 시간쯤 걸었을 때 선물 봉투가 뜯어져 물건들을 끌어안고 한 시간을 더 갔다는 귀엽고 소소한, 따듯하고 정겨운 이야기. 둘이서 나눴던 대화를 상상해 본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외가에 놀러 오면 자주 해주셨던 이야기가 있다. 매일 두 시간, 왕복 네 시간 거리를 걸어 학교에 다녔다고. 마트에서 고기와 할머니가 좋아하는 회를 한 접시 사고 모퉁이를 돌아 조금 더 걷다 보니 어머니의 모교가 보인다. 아 이 길을 따라 친구를 만나고 선생님을 만났겠구나. 아마 그때는 풍경이 깨나 달랐을 테지. 경험해보지 않은 추억을 따라 생각에 잠긴다.

두릅두릅두

 우리 할머니네는 어마어마한 시골이다. 어렸을 땐 자동차로 4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리였는데 20여 년 전 길이 새로 뚫리고부턴 1시간이면 도착한다. 때문에 한 번 놀러 왔다 하면 하루는 기본이고 가끔 이틀 사흘까지 머물다 갔었는데, 거리가 줄어들고부턴 당일치기로 식사만 하고 돌아갔다. 여름엔 개울에서 족대질로 물고기도 잡고, 마당 가로등 밑에서 다 같이 돗자리 펴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도 나눴는데 참 아름다운 순간들이었다. 쉽게 갈 수 있어서 또 쉽게 오고 그러나 보다. 그런 이유에서 보면 오늘 걸어서 온건 참 잘한 생각이었다.

 언제나처럼 할머니는 식사 준비에 여념이 없다. 지금은 새싹이 돋아나는 비와 햇볕의 계절, 푸릇푸릇 올라오는 동네의 나물들은 전문 헌터인 할머니의 레이더에서 벗어날 재간이 없다. 사냥감은 집 여기저기에 다양한 봄내를 풍기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두릅과 아스파라거스(?)가 준비되어 있다. 두릅은 밀가루 반죽에 적셔 튀겨질 것이고 아스파라거스는 구워질 예정이다. 두릅은 마트에서 한팩에 2만 원씩 하는 비싼 식재료라 살짝 데쳐서 초장을 찍어먹는 것이 가장 예를 표하는 조리법인 데에 반해, 이 동네에선 흔한 나물이라 그냥 튀기고 삶고 맘대로 하신다고 한다. 마당에 미쳐 다 드시지 못한 두릅이 커다란 망 두 개에 담아져 있는데 서울에 식당 하시는 분이 오셔서 사간다고 한다. 3kg 정도 되는 것을 5만 원에 가져가셨다. 다행히 다시 내다 파는 건 아니고 식당 반찬으로 활용하신다고 한다. 참 똑똑한 아주머니시네. 여기에 머위대, 고추와 머위잎 장아찌, 참나물, 미나리. 귀한 식탁이다. 거기에 마당에서 뜯은 상추와 함께 마트에서 산 삼겹살도 구워 든든하게 한 끼 했다. 할머니는 내가 놀러 와 따듯한 밥을 해 먹게 되어서 좋다고 하신다. 혼자 계시면 찬밥만 드신다고 하시는데 마냥 ‘밥 새로 해서 따듯하게 드세요’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그 고독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산책 겸 마당을 둘러본다. 뒷마당엔 어머니가 어렸을 때 살던 집이 남아있다. 매년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는 이 집은 왜인지 모를 어스름한 아련함이 남아있다. 작은 방에 막내아들과 큰딸 작은 딸이 옹기종기 모여 서로 공부를 시켜주다 엄마가 장독에서 꺼낸 된장으로 끓인 찌개가 완성되면 상을 펴고 자리에 앉는다. 장작불 냄새가 은근히 벤 밥을 한 술 뜨고 나면 어쩐지 내일의 불행 따위는 영원히 가까워지지 않을 것처럼 느껴진다. 아버지는 식사를 먼저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나신다. 각자 자리에 누워 천장에 묻은 얼룩을 보며 이런저런 상상을 하다 차분한 바람소리에 잠이 든다. 아마 수많은 날 중 하루는 그랬을 것이다.

 장독에는 갖가지 장이 담겨있다. 가장 오래된 기억을 더듬어봐도 나는 그 장독을 들여다보고 있다. 신기했다. 우리 외가는 옛날부터 고추 농사를 항상 지으셨는데, 뜨거운 여름날 눈물 콧물 땀을 흘리며 수확한 고추를 말리고 빻아 장을 담그셨다. 선선한 날 처마 밑엔 메주가 열려있었고 얼마 뒤에는 꾸덕한 된장이 되어있었다. 저 장독에서부터 얼마나 많은 끼니와 그 식사를 한 사람들을 만들어냈을까. 어떤 곳에서의 시간은 다른 어떤 곳과는 다르게 흐르는 듯하다. 저녁식사를 하고 산책을 다녀왔다.

아하!

 마을엔 사람이 줄어들고 있다. 그 빈자리를 채우는 건 역시나 다른 생명들이다. 천천히, 조용히 흘러가는 시골에서의 시간은 도시의 그것과는 성질이 다르지만, 잠깐 잊고 지내다 어느 순간 들여다보면 다른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같다. 어렸을 땐 잘 보이지 않던 고양이가 동네 아무 데나 앉아있다. 작년에는 뒷마당 옛날집에서 새끼고양이 다섯 마리를 발견하기도 했다. 할머니는 뭣하러 고양이한테 밥을 먹이냐고 투덜대시고 나는 마당에 제 집처럼 편하게 앉아있던 하얀 고양이와 할머니의 귀여워하는 눈빛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점심에 먹은 아스파라거스는 당연히 누가 사다줬나보다 싶었지만 이 생각이 우습게도 길가에 여기저기 피어나 있다. 은근히 새로운 것들을 발견하게 된다. 귀엽다.

 앞으로 3개월 동안 여행을 간다는 이야기에 할머니는 섭섭함을 보이신다. 해서 페이스톡을 알려드렸다. 똑똑한 할머니는 금방 방법을 깨닫고 크게 기뻐하신다. 우리는 거실에 나란히 앉아 9시 뉴스를 보고 한껏 이런저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하다가 금세 잠에 들었다.


2. 외노자

오늘 할 일 : 고추밭에 말뚝박기. 파밭에 잡초 뽑기. 옆집 오가피나무 새순 꺾기. 하우스에 물 주기. 마당에 담장 고치기. 주방 환풍기 수리.

본격적인 일과 시작이다. 우선 맨 먼저 할 일은 이번 달 말에 심을 고추 모종들을 위해 기둥을 세우는 일이다. 200개의 모종이 들어설 예정이고 모종 5개마다 기둥이 하나. 양 끝쪽에 6개씩 두줄.. 할머니와 나는 순간적으로 머리가 멈춰 계산에 애를 먹었다. 하여튼 50여 개의 쇠기둥을 실어와 하나씩 박기 시작했다. 오늘은 양 끝에 12개만 박으면 되고 나머지는 심으면서 박으면 된다. 외삼촌이 도와주러 오시는데 이제 삼촌도 나이가 들어 팔이 아프다고 하신다. 아무래도 4월 초에는 외가에 꼭 들려야겠다.

내게 일을 시키는 걸 우리 엄마가 알면 할머니 혼난다면서 설거지도 안 시키고 계셨단다. 옆에서 하도 일감 좀 달라고 하니까 마지못해 잡초 뽑기를 시키신다. 이 밭은 작년에 심어둔 파들이 한번 죽고 다시 싹을 틔운 것이라고 한다. 원래 계획에 없던 작은 밭이라 크게 신경을 안 쓰고 있었는데 어느새 보니 잡초가 무성해졌다고 한다. 우리는 많은 풀을 먹고살지만 사실 그 종류는 수십 가지가 넘지 않는다. 자연에게는 좋은 놈 나쁜 놈이 없지만 우리에겐 좋은 풀 나쁜 풀이 있다. 이를 구별해 내는 능력은 아주 오랫동안 쌓아 올린 지식의 결정체이며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팠을 것이다.


“아이고 왜 이렇게 풀이 빨리 크나 몰라 글쎄”

 | 다 살려고 그러는 거겠죠 뭐


 할머니가 웃는다.

 비닐하우스에는 본격적으로 밭에 심기 전 싹을 틔워 소중하게 보살피는 작은 모종들이 있다. 이것저것 아는 체 해본다. ’이건 오이고, 이건 호박이네. 이건 얼갈이 맞쥬?‘ 할머니 흡족. 나름 제주에서 작은 텃밭도 있어봤고 거기서 키운 채소들로 밥상도 몇 번 차려봤다. 또 직장동료 타일러가 마당에서 농사를 지었는데 시간이 날 때마다 가서 이것저것 주워 들었다. 음식을 키우는 건 참 재미난 일이다.

오가피나무

 엄나무와 비슷하게 생겼지만 가시가 조금 더 부드러운 오가피나무다. 한때 유행해서 여기저기서 보였는데 순을 먹는 건 이번에 처음 알았다. 두릅처럼 새순이 통통하게 올라오면 꺾어 나물로 무쳐먹는다고 한다. 부드러운 것을 한 잎 먹어보니 강렬한 쓴맛이 정신을 번쩍 들게 한다. 쌉싸름한 맛이 꽤 오래 남고 이후에 인삼 같은 향과 약간 칼칼한 매운맛, 후추나 인삼과 비슷한 목 넘김이 쌍화탕을 마시는 듯한 여운을 준다. 할머니 말로는 나무삼(인삼인데 나무에서 자라는)이라고 한다. 효능을 찾아보니 아칸토사이드라는 성분이 관절염과 축농증, 인후염 같은 염증에 탁월하다고 한다. 생으로 먹으면 너무 써서 보통 물에 담가 쓴맛을 빼고 소금물에 데친다고 한다. 잎을 똑똑 떼내는 게 재미있어 사다리를 가져와 정신없이 꺾었다. 할머니는 그만 돌아가자고 하는데 오히려 내가 더 열정을 보였다. 대충 3kg 정도 딴 것 같으네, 남은 것은 어제 그 서울 식당 아주머니가 사갈 거란다. 그런 분을 알고 계셔서 참 다행이라는 말에 할머니는 공감하셨다.


엄마의 삼촌과 그냥 강아지

 기울어진 담장은 언젠가 트랙터가 치고 간 이유에서였다. 쇠 파이프로 지지된 담장을 슬쩍 보니 대충 손 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창고에서 절단기를 가져와 얽혀있는 사슬을 끊고 적절한 기둥을 받아 넣었다. 뚝딱뚝딱 이제 담장이 똑바로 서있다.

 저녁준비를 하면서 환풍기가 고장 난 것을 발견했다. 이 집을 지을 때 연결했던 전선을 아직까지 쓰고 있는데 심지어 지금 우리가 아는 220v 돼지코 콘센트도 아니었다. 남는 멀티탭을 구해와 벽을 관통해 전선을 새로 깔아드렸다. 할머니 또 한 번 크게 흡족. 오늘도 조금 이르게 이부자리를 깔았다.


3. 할아버지

2023년 5월

 작년 11월 할아버지는 3개월간의 암투병 끝에 돌아가셨다. 작년 이맘때쯤 인사드리러 왔을 때는 정정하셨는데 내가 떠나고 얼마 후 암 진단을 받으시곤 급격하게 병약해지셨다. 그때도 언제나처럼 고추밭으로 출근하는 할아버지를 따라 일을 도왔었다. 같이 저녁식사를 하고 자동차 트렁크에 10kg짜리 쌀을 한 포대, 힘차게 실어주셨다. 병원으로 인사드리러 간 것이 그로부터 반년이 채 지나지 않았었는데 그때의 모습은 정말이지 가슴이 주저앉았다.

 할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공부를 곧잘 하셨다. 동네 야학당(학교에 못 가는 아이들을 위해하는 저녁 과외 같은 것)에서 아이들과 가족들을 가르쳤고 나의 어머니는 생전에 초등학교 특수반 교사와 야간학교 역사선생을 겸했다. 나의 이모는 현직 영어교사이다. 이런 비상한 유전자를 물려주신 할아버지는 어린아이처럼 늙다가 병으로 고생하시다가 떠나셨다. 참 어떨 때는 세상이 밉다. 이렇게 착하고 바르게 살아온 사람들도 때가 되면 매정하게 데려가 버리는 이 부조리에 가끔은 억울하기까지 하다. 세상은 왜 그래야만 하는가에 대한 질문은 아마 끝없이 나를 괴롭힐 것 같다.

삼촌과 나

그나마 다행인 것이. 살아계셨을 때 음식을 해드릴 기회가 있었다. 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가장 크게 후회한 것이 어렸을 때부터 요리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그렇게 이야기해놓고, 학교에 가고 공부를 한 뒤로 한 번도 제대로 된 ‘나의’ 음식을 해드린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당시에 나는 희망이 아닌 당연히 그럴 것이라는 믿음으로 어머니가 완치되고 난 후 할 일을 계획했었다. 같이 여행 가기, 내 가게 보여주기, 여자친구 인사시켜 주기, 삼겹살 먹으러 가기 그리고 파스타 해주기. 적절한 때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그때 그 시간을 알아채지 못한 스스로를 원망한다. 그런 마음으로 어머니에게 바치는 마음으로 어린 시절 추억 가득한 곳에서 내게 가장 큰 사랑을 준 사람들에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을 보여드렸다.

 할아버지가 떠나신 후 혼자 남은 할머니가 걱정이다. 극심한 스트레스와 고된 노동보다도 더 끔찍한 것이 고독과 무료함이다. 심심함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고 마을은 점점 더 조용해진다. 지난겨울 매서운 바람이 불던 날 전화를 걸어 안부를 전하며 물었다. ‘밤에 무섭지는 않아요?’ 나는 내심 ‘무섭긴 왜 무서워’라는 대답을 기대했건만 할머니는 힘이 없는 목소리로 그렇다 이야기했다. 그렇다. 무섭다. 밤에 자다가 깨면 잠에 들기 힘들다. 반려동물에 대한 물음에는 번거롭고 귀찮다 하셨지만 앵무새는 키워보고 싶다고 하신다. 주말에 알아보러 가야겠다.

 그나마 다행인 것이. 평일에는 마을회관에서 운영하는 노인일자리에 나가셔서 친구도 만들고 소일거리도 하신다고 한다.

어디선가 글을 읽었다. 부모님 계실 때 사진 많이 찍어놓고, 자는 동안에 말을 걸어서 몇 마디 목소리라도 녹음해놓으라는 것이다. 참 고마운 글이었다. 그때부터 가능한 기록을 남겨놓으려 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언젠간 떠날 사람들이지만 남겨질 누군가를 위해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이렇게 또 며칠간에 뜻깊은 시간을 보냈다. 내년엔 봄이나 가을 즈음에 채은이랑 휴가를 보내러 와야겠다. 있을 때 잘하자.













작가의 이전글 계절과 불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