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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경 Oct 23. 2024

커리어를 포기한 이유

한국에서 덴마크로 향한 이유 중 한 가지

2,3년 전의 나는 커리어적으로도, 개인의 삶 적으로도 제일 행복하고 완성되어 있었다. 국제연애를 시작하며 한국과 덴마크를 저울질해야 했을 때, 내가 이뤄놓은 것들을 모두 뒤로 하기엔 너무 아까운 커리어였고 말이다. 하지만 긴 고민 끝에 나는 내 커리어를 덴마크에서 새로 시작하는 것을 선택했고, 한국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덴마크행 비행기에 몸을 싣게 되었다. 현재는 매우 만족스럽지만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였다. 커리어의 천장. 그것이 내가 덴마크를 선택한 이유 중 하나이다.


앞 구르기 하며 생각해 봐도 나는 너무 직장인 체질이고 프리랜서와 예술가 사업가 그 무엇도 아니다.

직장인이 적성인데, 한국에서 직장인하면 부업을 고민해봐야 한다. 한국에서 내가 그래도 30대 평균은 벌었는데 미래를 계획하기에는 너무나 불안정한 수입으로 느껴진다.

나는 미대를 졸업하고 디자인을 쭉 했기 때문에 주변에 웹툰작가, 영상디자이너 등 콘텐츠 제작자들이 많았다. 본업이건 부업이건 다들 이모티콘이나 인스타툰, Vlog 같은 걸 손쉽게 하는 친구들이 주위에 많았고 나 또한 그걸 할 수 있는 스킬이 있었기 때문에 주변에서 많이 권유받기도 하고, 나 스스로 할까 말까 저울질하며 괜한 설레발을 떨기도 했었다.

인스타툰을 할지 말지 고민할 때는 하고 싶으면서 하기 싫었는데, 이걸로 가시적인 성과(수입)를 내야 해서였던 거 같다. 나는 그냥 내가 가진 적당한 재능으로 재밌는 걸 하고 싶은 건데, 주변에 콘텐츠 확장 관심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쨌든 이걸로 수익을 창출하고 싶어 했다. 나도 그 심정적인걸 공감하고 또 기왕이면 돈 벌면 좋지 싶었겠지만... 돈 벌면 좋지 근데 돈 벌긴 싫어의 줄다리기가 나에게 계속 죄책감이 되었던 거 같다.

N잡러... 멋지긴 한데 그렇게까지 치열하게 살고 싶진 않은 거지.

부업뿐만 아니라 40대 이후 명퇴(ㅠㅠ)에 대해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전 회사에서 어쨌든 나는 40대까지 버틸 순 있었다. 눈치 보며 아부 좀 하면 40대 중반까진 괜찮겠지...

하지만 그 이후의 대안이 없다. 직장인만 평생 하고 싶은데 현실적으로 50대 이후의 디자이너가 적당한 연봉을 받으며 회사 생활을 유지하는 걸 본 적이 없다. 가늘고 길게 붙어있으면서 연봉 100만 원씩 올려 살던지, 발 삐끗해서 권고사직당하고 작은 회사에서 몸값 후려쳐지던지. 보통은 창업으로 많이 흘러가는 것 같은데 나는 사업자 잠깐 해본 사람으로서 창업만은 하기 싫었다.

친구랑 술 한잔 하며 현실 개탄하면 그 순간은 잠깐 어른이 된 거 같겠지만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아 어떡하지 하다가 어느 순간 취업이 정말 어려운 상황이 왔겠지.

자영업이나 프리랜서 하긴 정말 싫은데, 월급쟁이로 그냥 가늘고 길게 소심하게 먹고살만큼 벌고 싶은 건데 왜 한국에서 평범하게 살려면 피똥 싸게 노력해야 하는 걸까.

이게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고 전 세계적으로 실업률이 어쩌고... 하고 있으니 덴마크건 미국이건 뭐 다를 바는 없겠지. 한국이 자국민 어드밴티지가 있으니 차라리 나을 수도 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을 해봤다.

내가 덴마크를 택한 수많은 이유 중에 하나는 <불확실한 기회>를 차라리 선택해서가 아닐까?

한국에서 12년 직장 생활했고 정상은 아니어도 정상이 보이는 두세 번째 봉우리까진 올라왔는데, 내가 끝까지 올라가는 게 어떤 건지 이제 가늠도 되고 처우도 알겠고... 그러고 나니까 이미 알아버린, 눈앞에 다가온 천장이 확실히 보였던 거지.

그래서 현재 봉우리가 만족스럽고 안정적이라고 해도 내 눈앞에 다가온 천장을 마주하는 것보단, 아예 다시 밑으로 굴러 떨어져서 다시 천장을 보이지 않을 높이에 올려두는 걸 선택한 거 아닐까.

그래서 이게 크게 보면 어떤 길이든 재시작하고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결이랑 같은 거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물론 명퇴 등등으로 어쩔 수 없이 떠밀려 시작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잘 나가는 위치를 그만두고 새로운 분야에서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 어쩌면 이미 천장을 알아버려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포기와 한계를 마주하는 것이 괴로워서. 그럴 바에 다시 불확실한 기회지만, 그래도 희망을 가질 수 있는 어두운 길을 택한 게 아닐까.

희망을 가지고 새롭게 시작해도 잘 안될 확률도 분명히 있겠지...

하지만 생각해 보면 열의와 의욕, 성취감이라는 건 천장이 보이지 않을 때 생기는 거 같다. 그럼 그게 목표가 되고 삶의 원동력이 되니까. 잘 아는 안정감보다, 불확실한 기회를 차라리 택한다는 건 역설적이고, 인간이 원래 그런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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