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개월 전에 비행기를 태우자
임신하고 출산을 하며 내가 가장 강렬하게 원했던 것이 있었다면, 그것은 바로 여행이었다. 자유로운 홑몸이었을 때 나는 얼마나 많은 나라들을 쏘다녔던가… 친구들 사이에서 짠순이로 정평이 난 내가 유일하게 아끼지 않고 돈을 쓰는 항목이 여행이었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공기의 냄새를 맡는 일이, 내게는 숨통이었고 카타르시스이기에. 여행에서만큼은 다소 흥분된 상태로 모든 감각을 예민하게 열고 새로운 것들을 받아들였다. 그러면 비로소 살아있다는 감각과 전율이 온몸을 타고 흘렀다.
그런 내가 강제로 여행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니, 가장 바라는 일이 여행이 되어버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여기서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코로나 시국이 시작되면서 어차피 여행을 못하게 되어버렸으니 이 김에 아이나 낳고 키우자(?)는 아주 오만한 생각도 쬐끔은 있었다.) 가까운 경기도나 강원도 등지로 간간이 하루이틀의 여행을 가기는 하였으나, 비행기를 타고 싶다, 는 강한 열망을 꺼트리지는 못했다.
나의 이런 열망을 잘 알고 있던 짝꿍이 어느 날 나에게 제안했다. 아이가 24개월이 되기 전에, 비행기를 타자, 고. 24개월 이전의 아이는 성인운임의 십프로 정도의 금액을 내고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과연 나보다 더한 짠돌이다운 제안이었다. 나는 쾌재를 불렀다. 그리고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는, 아이를 데리고 가기에 적당한 휴가지를 물색했다. 베트남, 괌 등 여러 후보지가 물망에 올랐으나 최종 선택된 곳은 일본이었다. 비행시간도 부담스럽지 않고, 먹는 것도 비슷하니 이제 유아식을 제법 먹는 아이와 가기 적합해 보였다. 우리는 아이의 비행티켓을 2만원이라는 특별할인가에 구할 수 있었고, 가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우리가 가기로 한 날짜는 4월 어느 봄날, 애석하게도 전국 어린이집에 강력한 감기바이러스가 퍼져 고열과 눈꼽을 단 아이들이 주렁주렁 늘어나던 때였다. 우리 아이도 피하지 못하고 이 바이러스에 걸려버렸고, 하루하루 줄어드는 출국 디데이를 바라보며 애타는 시간을 보냈다. 출국 전날, 의사 선생님은 출국을 권하지 않는다면서도 애달픈 내 얼굴을 보고 한숨을 쉬며 아이에게 주사를 맞혀주시고 넉넉히 약을 처방해주셨다.
나 또한 출국 전 일주일을 갈팡질팡하며 보냈다. 들쭉날쭉한 아이의 컨디션을 보며 기뻐했다가 절망했다가 했다. 짝꿍은 아프더라도 호텔방에서 아이 병간호를 하자고 했고 양가 어머님들은 그냥 위약금을 물고 여행을 취소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모든 결정이 엄마인 나에게 달려 있었다. 우유부단한 나는 여행 전날까지 밤을 꼬박 새우며 고민하다가, 출국 전날 기적적으로 컨디션이 좋아진 아이에게 간절한 희망을 걸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이미지출처 :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