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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림 Dec 10. 2021

갑과 을 사이가 아닙니다만.

남편과 같이 일하게 되면 생기는 일

함께 산 지 어언 10년. 올해 11월이 지나면서 만 10년 차가 된 우리는 여전히 싸우고 화해하고 또 싸우며 대환장 콜라보를 자랑한다. 매번 새로운 에피소드로 아직도 내게 이해하지 못할 성격이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남자. 나의 남편이자, 남의 편인 '당신'. 나는 오늘도 내 남자 덕분에 대환장 파티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이가 마흔인데 아직도 우린 자아 정체성을 찾고 있다. 그나마 동갑내기 우리 부부는 누구 한 명 모자랄 것 없이 부족하기에 서로가 위안이 되는 순간들을 자주 마주하곤 한다. 남편은 모른다. 내가 알면서도 눈감아 주는 일상적인 하루가 얼마나 많은지를. 그래서인지 남편은 나를 미치도록 화나게 하는 순간들에 데려다 놓을 때가 많다. 'A형' 여자와 'B형' 남자가 만나면 언제나 여자가 져주고 이해하고 받아들여지는 쪽이 우세하다. 적어도 나는 연애 4년과 결혼생활 10년을 그렇게 살아왔다. 아차! 혈액형 맹신 주의자는 아님을 말하고 싶다.


그런 우리에게도 공통적으로 소중한 존재가 있으니 그것은 바로 세상 하나뿐인 딸!

10년의 부부생활을 이어오면서 생각지도 못한 수많은 이혼의 위기들을 이길 수 있게 해 준 가장 큰 힘은 바로 딸 아이다. 그렇게 우린 가족의 끈을 놓지 않고 가늘고 길게 매일을 살아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화가 솟구칠 정도로 '빡'칠 때가 있다.('화나다'를 속되게 표현하는 말)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으나 남편은 '갑'이 되고, 나는 '을'이 되어버리는 순간이 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내가 회사를 다닐 때만 해도 남편에게 받는 대우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나름 회사에서 커리어를 인정받고, 자신의 일에 성취감을 느끼며, 반드시 눈에 보이는 결과를 내는 직장인이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회사가 힘들어지며 나의 커리어도 거품처럼 사라져 버리니 지금의 난 결점 투성이 아줌마가 되어버렸다. 적어도 남편이 보는 나는 그렇다.


5년 전, 남편은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휴대폰 매장을 차렸다. 준비 없이 시작했고, 없는 자금으로 인해 매장의 위치도 베스트가 아니었기에 얼마 가지 않아 폐업하는 순간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때 남편은 내 핑계를 댔다.


'내가 더 적극적이지 않고, 열심히 하지 않아서 성공하지 못했다며.'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당신 매장인데 왜 나한테 짐을 떠넘겨!'라고.


마치 사장이 회사가 망한 걸 직원 탓을 하는 격이랄까. 사실 난 월급도 없었는데 말이다. 월급이라도 주면서 눈치를 주면 기꺼이 욕이라도 얻어먹겠지만 이건 뭐 무상 근무에 눈치란 눈치는 내가 다 봐야 했고, 세금관리까지 내 차지가 되었다. 아무리 쥐꼬리만 한 매장이고 할 일이 없는 사무실이라도 잡일은 티 안 나게 많다는 걸 사장님은 알지 못한다.


휴대폰 매장을 폐업한 후, 나는 회사에 취직했고 남편도 새로운 일을 시작했다.

우린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일을 하며 지내왔다. 가끔 저녁에 마시는 부부의 술자리에서 다시는 같이 일하지 말자며 약속을 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올해 겨울 남편은 다시 새로운 사업을 시작했다.


지금은 휴대폰 매장을 했을 그때와 다르냐고 누군가 내게 묻는 다면 나는 말한다.

"사람! 쉽게 변하지 않습니다!"라고.


한 달 전 즈음 내년을 기반으로 창호 관련 시공사업을 시작했다. 나는 다니던 회사가 힘들어져 그만두게 되면서 글을 쓰고 싶다는 핑계와 맞물려 남편 사업의 자금 관련 업무를 봐주기로 약속했다. 사실 여직원을 구하면 될 일이지만 어디 자영업자의 순이익이 그리 대단한가! 살 떼고 포 떼면 남는 돈은 정말 개미 눈곱만큼이다. 마케팅이 훌륭한 사업이 아닌 이상 몸으로 발로 뛰어야 하는 자영업자는 인건비까지 지출하고 나면 남는 자금이 없다. 그래서 이 한 몸이라도 도움이 되어 주고 싶어 기꺼이 여직원 구하지 말고 내가 대신 일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당연히 급여 없이 무상 근무다.


내 실수였다. 그냥... 적은 돈이라도 월급을 받을 걸. 친구와 함께 시작한 사업이라 내가 더 도움을 주고 싶어 기꺼이 봉사하리라 마음먹었는데 남편은 나를 다시 '동반자'가 아닌 '을'로 취급 하기 시작했다.


얼마 전 손가락을 다쳐 나는 글도 쓸 수 없을 정도로 힘든 시간을 보냈다. 거기에 오른손이라 손가락 하나 움직이려니 팔목까지 저려왔다. 그래서 장부정리를 좀 느슨하게 했더니 '뭐 하나 제대로 하는 게 없다'며 나에게 면박을 줬다. 참 기분이 더러웠다. 마치 내 커리어가 하찮고 보잘것없이 느껴졌다. 내가 아니었다면 못 할 건 없겠지만 분명 귀찮은 일 투성일 게 자명한 사실이지만 남편은 내게 하나도 고마워하지 않았다.


난 내게 질문을 던졌다.


"너 지금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야? 차라리 회사를 들어가서 당당하게 일을 하란 말이야!"

나 손 아픈데

하지만 난 남편의 시작을 응원했다. 잘할 것이라고, 잘 될 것이라고! 내가 회사에서 해왔던 업무니 내가 도와주고 밀어주고 함께 걸어가겠다고 말하며 싫은 소리 하지 않고 묵묵히 지켜봤다. 그러다 일이 터졌다.


회사에 급한 마감이 있던 당일 아침, 갑작스레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늘까지 그거 빨리 해야 해!"


회사에서 내가 일하는 스타일은 자금 관련과 인사 업무라 미리 스케줄이 짜여 있고 계획적이며 결과물이 정확해야 하는 일이었다. 남편과는 전혀 맞지 않는 업무 스타일이었다. 그런 내게 갑작스레 생긴 업무는 당황스러웠고 거기에 저번 달에 딱 한번 해본 일이라 기억도 가물했다. 현장에서 바쁘다는 남편 때문에 전화를 할 수도 없었다. 난 겨우 기억을 더듬어가며 마무리를 했고 내심 남편의 급한 일을 빨리 처리했다는 뿌듯함에 난 어깨에 뽕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잠시 후, 남편에게 전화가 왔다.


"야! 그거 보내고 취소 안 했어?"

"... 취소?? 아... 취소하는 거였나?"

"에잇... 뭐야... 그것도 하나 똑바로 못 하냐?"


남편의 짜증 섞인 목소리에 나는 단박에 긴장감으로 사로 잡혔다.


"전화 끊어봐! 확인하게!"


확인하고 있는데 성격 급한 남편에게서 연이어 카톡이 왔다.


[확인하긴 뭘 확인해! 안 했구먼! 아 진짜 뭐 하는 거 보면 짜증 나!]


바보처럼 난 이렇게 대답했다.


[미안해. 빨리 한다고 생각을 못 했네.]

[뭘 시키질 못 하겠네.]

[미안해. 신경 쓰게 해서.]


오. 마이. 갓! 카톡에 답을 하고 있는 내가 바보처럼 느껴져 짜증이 밀려왔다.

실수할 수 있고, 착각할 수 있다. 아내에게 부탁하는 남편은 짜증이 먼저 거 아닌 해결이 먼저여야 했다. 실수한 아내는 자신의 실수를 인정하고 빠른 해결을 하며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기억하면 될 일이었다. 상대방에게 핀잔을 주면서 마치 자신이 '갑'이라도 된 것 마냥 아내를 '을'로 취급할 필요는 없었다. 사실 요즘 '갑'과 '을'의 계약에서 남편처럼 행동하면 그건 '갑질'이다.


왕 같은 인생을 살고 싶은 남편이라면,
아내를 기꺼이 왕비처럼 대해야 한다.
물론 아내 역시 마찬가지로 남편을 대해야 한다.
세상에 존중받지 못할 인생은 없으니까.


남편의 짜증에 미안한 나는 [여보... 미안해... ]라고 또 쓰다가 뭐가 그리 미안한지 남편의 말도 안 되는 말투와 답장에 화가 꾸역꾸역 내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쓰던 카톡을 닫고 핸드폰을 꺼버렸다.


다시는 남편과 일하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는데 난 또 이렇게 남편과 일을 하게 되었고 어느새 스스로를 하찮은 '몸종'으로 만들어버린 것에 우울해졌다.

무엇을 할 것인지 명확하게 생각하라!

그러면서 난 또 생각했고 결심했다. 스스로 당당해질 것이라고! 스스로 멋진 성과를 내는 아내가 될 것이라고!

똑같은 상황을 내게 상담을 하러 오신 분들이 풀어놓으셨다면 난 기꺼이 이렇게 말해 줬을 것이다.


"스스로를 낮게 평가하지 마세요. 충분히 가치 있는 인생을 살고 계십니다!"라고.


찬란하게 빛 날 인생을 상상하며, 스스로를 가치 있는 사람이라 믿어야 한다. 남편의 말 한마디에 흔들리지 않고, 남편의 말 한마디에 스스로를 다락방에 가두지 않기를 바란다. 더 당당하게 멋지게 살아갈 내일을 위해 지나간 남편의 핀잔과 짜증은 털어내고 앞으로의 1분과 1시간과 1일을 즐겁게 걸어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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