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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dion Mar 23. 2021

내 유령 같은 이웃, 부 래들리

소설 <앵무새 죽이기> 속 그 사람이 우리 이웃에 있다고?


인종차별이 만연한 미국 남부에서 누명을 쓴 흑인을 변호하는 정의로운 애티커스 핀치가 좋았다. 영화 판의 그레고리 팩이 멋있어서 더 그랬을까. 그 당시 그 지역 아버지 답지 않게 아이들을 구속하지 않으면서도 옳고 그름을 분명히 알고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설명해주는 아버지였다. 그런 부모님이 있다면 좋겠다고 생각도 해봤다.  그러나 성인이 되고 뒤돌아 생각해보니 이제는 부 래들리가 자꾸 생각난다. 가엾은 부. 숨 막히는 남부의 고루하고 보수적인 문화 속에서 아마 가부장적이었을 아버지 아래의 부 래들리의 청소년기는 일탈을 꿈꿀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런 부를 이해하기에 남부의 작은 마을과 전통적인 가정의 아버지는 너무 경직되어 있었다. 부를 가두고 이웃과 단절되는 길을 택한 걸 보면 알만하다.


그런 부에게 핀치 남매는 어떤 의미였을까? 순수와 자유였을지도 모른다. 어린아이들 특유의 천진함과 활기를 집 안에서 밖을 내다봐 지켜보면서 위안을 느낌직 하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어른이 되는 관문인 사춘기에 세상의 벽에 부딪힌 자신에 비해 아직 어린아이들은 관습과 억압으로부터 자유로워 보였을 것이다. 하기사, 스카웃의 또래 사촌인 프랜시스가 얌전하게 작은 어른 흉내를 내는 모습과 대조해보면 핀치 남매의 집안이 인습의 틀에 꽉 묵인 편은 아니기도 하다. 프랜시스의 할머니인 알렉산드라 고모가 핀치가의 가풍에 불만을 가지며 스카웃을 남부 숙녀로 만들려고 하는 대목에서도 드러나는 바이다.


부에게 희망이 있었을까? 부의 심정을 상상해보게  줄은 어려서 앵무새 죽이기를 처음 읽었을 때는 짐작도 해보지 못했었다. 유령 같은 .  이웃에  같은 사람이 있다면 존재조차  수없었을 것이다. 나는 도시의 아파트에 살아서 이웃의 얼굴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시골에 살아 부를 알았더라도 그를 의심스럽게 여겨 피했겠지.  사실, 우리 주위에는  같은 이웃들이 많다. 오랜 세월  마을에 살아 이웃들의 얼굴에 닮은 구석이 많아진 1930년대의 미국 남부의 시골 마을에도 소외되는 사람은 있다. 그럴진대 익명 속에 파묻히는 대도시에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래들리들이 많다 해도 이상하지 않다.


고립된 삶을 사는 사람들. 마음의 상처 때문에 또는 병 때문에 집 밖에 나오지 못하고 머무르는 유령들. 정신병까지는 아니더라도 회피형 혹은 분열형 성격장애를 지녔을지도 모를 사람들이다. 세상을 회피한 부를 짓누른 것은 경직된 사회와 소통에 문제가 있는 가정이었다. 그럼 오늘날 도시에 사는 우리 이웃의 부 래들리들을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하는 것도 같은 것일까? 정확히 같지는 않다. 20세기 초의 미국 남부 시골과 21세기 초의 대한민국 대도시는 분명 다르다. 그러나 그들이 살아온 배경에서 사회의 구조와 관습, 가정사를 떼어 놓을 수는 없다는 데서 유사한 지점이 생긴다.


가끔 TV 프로그램 속에 오늘날의 부 래들리들이 등장한다. 조용히 소리 없이 고립되어 살다가 기이한 행동으로 주목을 끌고 마침내는 카메라를 든 사람들이 찾아온다. 방송의 흥미를 위해 이들의 기행을 비추고 시청자들은 놀라워한다. 이윽고 그들의 사정이 공개되고 방송작가는 동정심을 불어넣는 내레이션을 써 내놓는다. 그 지점까지 오기까지 그들은 촬영을 거부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아마 사람이 그리웠는지 제작진에게 이것저것 권하며 대접하려 한다. 그들은 가족으로부터, 사회로부터 상처를 받았음이 드러난다. 그러고 나서 사연 뽑아내기에서 방송이 끝나기도 하지만 프로그램에 따라 서는 솔루션이 제공된다. 복지사가 오고 자원봉사자가 오고 연락이 끊긴 가족을 불러내기도 한다.


물론 끝까지 완강하게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어쩌면, 그들이 외부에 보인 기행 자체가 도움을 요청하는 손짓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말 걸어주기였으리라. 그들은 집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말을 걸고 싶었으나 방법을 몰랐기에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기에 생각해본다. 밖으로 나올 용기조차 낼 수 없는 우리의 유령 같은 이웃, 부 래들리들은 우리 주위에 얼마나 될까.


다시 묻고 싶다. 부에게 희망이 있었을까? 부에게는 희망이 있었다. 소통의 희망. 부가 나무 둥치 안에 시계와 비누조각, 껌 따위의 선물을 자유와 순수의 아이들에게 전달하게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아이들에게 죽음의 위협이 닥쳤을 때, 용기를 내어 집 밖으로 나설 수 있게 하고 그들을 지켜낸 데는 자신의 희망을 지키기 위한 바람이 있었다. 비록 그 사건 이후 스카웃의 배웅을 받고 집으로 돌아가고 나서 다시는 집 밖을 나오지 못했지만 그의 희망은 살아남았고 성장했으며 그를 기억했다. 친구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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