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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adion Sep 08. 2021

분노한 책들 (1)

노동쟁의

도서관 불이 꺼지자 서가에서 수런수런 웅성거림이 인다.


" 너 한 달만이구나!"

"날 빌려간 놈이 날 책상 위 잡동사니 밑에 깔아 두고 잊어버렸다고. 먼지 때문에 간지럽고 기침이나 죽을 뻔했어."

" 그놈 상습범 같던데. 사서들이 불평하는 연쇄 연체범"

"그래? 늘어진 배때지에 여드름 투성이, 두꺼운 근시 안경을 낀 게으름뱅이 백수야?"

"별로 안 무시무시하던데. 그냥 삐쩍 마른 여학생이야."

"몸은 좀 어때?"

"다행히 날 펼쳐놓고 뭘 처먹거나 하지는 않더라. 첫날 잠깐 들쳐보고 아예 내 존재를 잊었으니까."

"부럽네. 젠장, 이틀 전 나를 반납한 놈은 코딱지를 파서 갈피 틈에 낑겨 놓았어. 시커먼 코털까지 달려 있다니까. 근데 또 깊숙이 넣어놔서 잘 떨어지지 않을 것 같아."

"넌 양반이야. 날 빌려갔던 인간 놈은 어땠는 줄 알아? 식탁 위에 날 펴놓고 시뻘건 국물이 흥건한 짬뽕 면발을 후루룩 거리면서 처먹었어. 범죄현장의 비산흔처럼 내 내지에다 흔적을 뿌려놓고 모자라서는 대뜸 죽순 덩어리를 올리버 트위스트가 죽을 더 달라고 하는 34페이지 아래쪽에 철퍼덕 떨어뜨렸어. 덕분에 죽순 속의 마디를 따라 줄무늬가 들어간 원추형 자국이 도장처럼 박혔다고."

"하하. 그래도 넌 양반이지. 날 빌려간 꼬맹이 놈은 아이스크림을 먹으면서 엎드려서 날 보던 걸. 그것도 퍼먹는 아이스크림이 아니라 하드를 쪽쪽 입에 넣었다 빼면서. 그 끈적끈적한 녹은 유지방과 감미료의 액체가 떨어졌는데 그 지저분한 애새끼는 닦지도 않고 덮었어. 덕분에 탐정 에르퀼 푸아로가 범인을 지목하는 페이지가 뒷페이지에 달라붙어버렸다니까!"

"처먹는 것만 문제는 아니지. 날 빌려갔던 인간들 중 최악은 자기 배설물 냄새를 나한테 맡게 한 놈이었어."

"뭐?"

"과민성 대장 증후군이 있는 대머리 조기 은퇴자였어. 매번 빼놓지 않고 날 헐벗은 허벅지 위에 펼쳐놓고 대변을 봤어. 하루에도 대여섯 번! 나중에는 아예 날 선반 위에다 놓고는 아내의 잔소리에 따라 집안 청소를 하러 가버렸어."

"우웩."


모두가 경악을 하고 있을 쯤, 어디선가 수줍은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나도... 좀 힘들었는데, 그러니까... 그 있잖아, 과도하게 학구열이 강한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왜?"

"나한테 직접 줄을 치더라고."

"엥? 공공기물에다 일부러 흔적을 남겨도 되는 거야?"

"그냥 그러더라고. "

"너도구나. 난 심리학 책인데도 도무지 그 심리를 모르겠어. 기억하고 싶으면 노트나 수첩에 메모를 하면 되잖아. 그리고 치려면 중요한 부분만 쳐야 의미가 있잖아. 공부 못하는 것들이 꼭 그런다니까. 보이는 족족 전부다 동그라미 치고 줄 치고 심지어 색색이 컬러 팬을 바꿔가며 그러더라니까. 그냥 줄 치기 위해서 책을 보는 건지 이해하려고 보는 건지, 참! 뭐 이런 게 개론서와 실용서적의 운명이라고 해야 하나."

"저... 난 아닌데......."

"무슨 말이야?"

" 난 '이상 전집' 상권이야."


잠시 어색한 침묵이 서가 사이에서 흘렀다.


"아무튼, 대출창구에 올라가게 될 때마다 또 이번에는 무슨 일을 당할지를 생각하면 차라리 아무도 찾지 않게 책등에다 '나를 뽑으면 취학, 취업에 실패하고 삼대가 폭풍설사 한다'고 적혀있으면 좋겠어."

"푸하하. 그게 뭐냐?"

"바보. 오히려 재미있어하면서 더 자주 뽑혀갈 걸."

"누가 우리한테 안식년 같은 거 안 주나. 떨어진 낱장의 긴급접합을 받으러 갈 때 말고 진짜 휴식. 우리가 아니었으면 존재하지 못했을 직업인데 사서들만 휴관일, 국가 공휴일, 휴가 꼬박꼬박 챙겨가잖아. 우리가 여기서 한참 떨어진 곳에 흩어져서 습기, 벌레, 인간들 분비물을 뒤집어쓰고 찢어지고 벗겨지며 신체를 훼손당하는 동안에 말이야."

"옳소!"

"파업! 파업!"


모두가 한 목소리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제일 안쪽 서가에서 들려온 목소리가 그 달아오른 공기를 깨트렸다.


"선택받는다는 게 꼭 나쁘다고는 할 수 없잖아."

"훗. 누가 들으면 팔자 좋은 장식용 개인장서인 줄 알겠네."

"난 다 세보지는 못했지만 몇 년째 아무도 빌려가지 않았어."

"우-! 부르주아 물러가라."

"그래, 팔자 좋지. 근데 이거 알아? 며칠 전에 말이야, 너희들이 쿨쿨 자고 있던 개관전 오전에, 향토역사 코너에서 팀장이 봉사 온 학생의 질문에 뭐라고 했는지 알아도 그럴 수 있을까?"

"뭐라고 물었는데? 그 학생이."

"매번 사람들이 신청한 신간도서들이 도착한다는 게 뭘 의미하는 것 같아?"

" 신간도서? 그게 왜?"

" 바보야! 신간도서가 들어오면 그만큼의 빈 공간이 필요하잖아. 그 공간이 무한이 생기겠냐? 도서관이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외장하드도 아니고 콘크리트로 지어놓은 붙박인 건물이잖아. 전자 메모리도 저장할 수 있는데 한계가 있는데?"

"엥? 뭐라는 거야."

"우릴 버린다는 얘기야?"

"파손되어서 복구가 불가능하면 그래야겠지. 그게 뭐 새롭다고."

" 멀쩡해도 버릴 거야. 몇 년 동안 아무도 빌려가지 않으면 확실히."

"거짓말."

"그래도 바자회나 헌 책방으로 보내주지 않을까?"

"우리는 정부 소유물이니까 그렇게 간단하지 않을걸."

" 말도 안 돼. 그럼 우리가 인간들에게 고문당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끈에 묶여서 폐지 처리장에 던져진다는 말이지. 그리고 더 재수 없으면 싸구려 두루마리 휴지로 다시 태어나 변기에서 똥덩어리들과 춤추다 오수관으로 영영 썩으러 내려간다고!"


허둥거리는 웅성거림이 점점 거세지더니 분노에 찬 포효로 변했다.


" 어쩌지 실시간 업데이트를 할 수 없는 나 같은 여행 가이드 북은? 오, 망할 유튜브, 여행 블로그!"

"날 쓴 셀럽은 물의를 일으켜서 방송도 끝나고 유튜브 구독자도 다 빠져나갔다는 얘길 들었어. 나라고 '표준국어 대백과'나 세계문학전집 같은 스태디셀러로 태어나고 싶지 않았겠냐고!"

" 고전, 망할 고전! 유명한 작가들의 안 유명한 단편집 단권은 전집 시리즈처럼 구색을 고려하지도 않고 처박아 둔다고. 사라져도 아무도 알아채지 못하겠지. 단편집 수록작도 하나하나 제목을 도서관 DB에서 검색할 수 있게 하던지!"

"우릴 버릴 거야."

"버리지 않아도 결국 우리 몸을 찢고 토막 낼 거야!"

"살인마! 아니, 살서마들!"

" 오, 안돼. 난 죽고 싶지 않아!"

" 야훼는 나의 반석, 나의 요새, 나를 구원하시는 , 나의 하느님, 나의 산채, 나의 피난처. 포악한 자들의 손에서  몸을 건져주셨으니! 형제여."


그때까지 잠자코 있던 베이스 톤 목소리의 '공동번역 성경'이 중얼거리는 가운데 여기저기서 이제는 분노를 넘어 절망에 찬 훌쩍거림이 합주를 시작했다.


"잠깐, 잠깐. 진정하라고. 진정하고 대책을 생각해."


주석이 있는 '군주론' 하드커버가 이렇게 외쳤다.


"무슨 대책? 우리가 뭘 할 수 있는데?"

" 나한테 다 생각이 있어. 들어보라고."


어느새 도서관 밖에서는 저물녘의 노을마저 덮어버리는 먹구름이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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