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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꾸는 신팀장 Sep 18. 2021

아빠의 유산

내 여행  기억의 클라우드

"아빠, 나 여기 가 본 적 있어?"


기억력이 워낙에 형편없는 내가 기억력이 기가 막힌 아빠가 살아계실 때 자주 하던 질문 중의 하나다.


분명 내 기억 속에는 존재하지 않아 나름대로 나의 첫 여행지라고 열심히 여행 준비를 하고 있다가 혹시나 해서 아빠한테 확인을 해보면 여지없이 어린 시절 내가 아빠와 다녀왔던 곳으로 판명된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던 것이다.


아빠는 나의 소중한 여행 추억을 저장하던 클라우드였던 셈인데 그 클라우드가  올해 1월 하늘나라로 떠나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진짜 클라우드가 되어버렸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지난 주말여행(늘 그렇듯 여행겸 출장이지만)에서 비롯되었다. 지금 담당하고 있는 대한민국 테마여행 10선의 10개 권역 중 6 권역인 남도 바닷길 권역 (여수 순천 보성 광양)만 제대로 출장을 온 적이 없어 늘 마음이 찔렸던 터라 올 해가 가기 전 이 지역들을 제대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특히 6월 즈음에 남도 바닷길  홍보영상이 나왔는데 그 영상에 등장한 보성의 녹차밭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워 꼭 가봐야겠다 마음먹고 있던 참이었다.

https://youtu.be/OFA-7yP4Oxk


기대를 잔뜩 품고 간 보성의 녹차밭 대한다원은 내 기대를 조금도 져버리지 않았다. 초록의 향연이 펼쳐진 그곳은 청량했고, 고요했고, 그리고 아름다웠다.  초록 중에서도 가장 초록다운 색을 보려면 이곳만 한 곳이 없겠다 싶었다. '우와! 좋다'를 몇 번인가 반복했을 때 즈음 문득 '혹시, 예전에 내가 여기 와본 적이 없나?'라는 물음표가 떠오른 것이었다. 그 물음표와 함께 아빠 생각이 났다. 아빠가 계셨더라면 당장 전화기를 꺼내 들고 "아빠, 나 보성 녹차밭에 와 본 적 있어 없어?"라고 물어봤을 테고 아빠는 "너는 그것도 기억 안 나냐? 너 ㅇㅇ살 때 아빠가 데려왔었잖아..."라고 대답을 해주셨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성 녹차밭

그런데 이제 나의 추억을 나보다도 정확히 저장하고 있었던 아빠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이 서글펐다. 마치 내 기억의 반쪽을 잃은 느낌이었다. 예전에 PC 망가져  아들의  어린 시절 사진이 날라가 속상했을 때의 기분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내가 기억 못 하는 어린 시절의 추억을 아빠를 통해 꺼내보곤 했는데 이젠 그럴 수 없다니...


물론 나에게는 엄마가 있다. 하지만 우리 엄마의 기억력은... 내 기억력이 갤럭시 S10수준이라면 아빠는 S20수준이었지만 엄마는 S5정도라고 해야 할까.  (물론 지금 내 상태로 봐서는 내가 엄마 나이가 되면 지금의 엄마보다 훨씬 더 심각한 수준이 되어있을 것 같다.)


내 책을 낸 이후로 유독 아빠 생각이 더 많이 나는 요즘이다. 아마도 출판사 요청으로 에필로그를 쓰며 한 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던 아빠가 나에게 남긴 유산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게 원인일 것이다. 아빠는 돈이 아닌 여행 유전자를 나에게 유산으로 남기셨다. 그 유전자는 나를 지금의 회사로 오게 만들었고 그것이 내 책 "떠나세요, 제가 준비해놨어요."를 집필할 수 있는 소재를 제공했으니 이 책은 아빠 덕에 나올 수 있었다는 게 에필로그의 내용이었다.


얼마 전 회사에서 여행작가 태원준 님과 원고 의뢰 때문에 미팅을 했다. 업무 이야기를 마친 후 나는 작가님께 "그런데 작가님은 어떻게 여행 작가가 되셨어요?"라고 물었더니 본인이 30세일 때 60세인 어머니를 모시고 세계여행을 다녀온 후 책을 발간한 것이 계기가 되어 직장인에서 여행작가로 전업을 하게 되셨다고 했다. 여행 중 어머니가 처음으로 '내일이 기다려진다'라고 말씀하셨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고 이야기를 풀어놓으셨다.

운전 못하는 딸의 홍천 출장에 일일 드라이버로 활약해주셨던 아빠

그러고는 생각했다. 나도 세계여행은 아니지만 아빠와 중국 오지 여행을  떠난 적이 있었는데... 기억은 많이 잊어버렸지만 전국 팔도를 우리 가족의 첫 차였던 르망을 타고 많이도 다녔었는데... 지금이라도 남아있는 아빠와의 여행 기억을 잊어버리지 않게 글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누군지는 물론 기억 안 나지만 어떤 유명한 사람이 말했다. "기억 속에 살아있다면 영원히 살아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빠는 내가 살아있는 한 살아계실 것이다. 나의 기억 속에 나의 글 속에!


커버사진은 아빠가 위암 말기 판정을 받으신 후 컨디션이 아직 좋으셨을 때 아들 유찬이까지 3대가 함께했던 양양 여행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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