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사회의 발달, 임금노동자, 자산의 축적
빅토리아3는 스웨덴의 패러독스사가 만든 경제시뮬레이션 게임으로서 19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의 경제사를 다룬다. 지난 한 달간 해보니 지금까지 만들어진 시뮬레이션 게임 중 경제에 대한 성찰을 가장 잘 담아낸 게임이라 느껴져 소개하면서 임금노동의 역사에 대한 이야기도 해보려고 한다.
이 게임은 지금 시점에서 정답으로 인정받은 인간 역사적 결정들을 게임의 수치로 담아냈고 유저가 그것을 재현해 나가는 과정을 담았다. 재현의 양상은 국가의 상황, 정치적 구도에 따라 다르지만 공통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여기서 관찰되는 공통적인 발전의 내러티브는 다음과 같다.
게임초반 나라를 지배하는 건 개혁을 거부하며 보수적인 태도로 일관하는 지방토호, 귀족, 종교인들이다. 그리고 이를 개혁하려는 플레이어 즉 계몽군주가 등장한다. 계몽군주를 있는 돈 없는 돈 다 끌어모아서 공장을 짓고 산업발전에 따른 자본가 집단을 육성한다. 잉여 생산물이 증가하고 관료와 대학기관, 중산층들이 지식인 계층으로 대변되어 정치에 참여한다. 이들이 주도하는 평등주의개혁은 임금 노동자의 생활수준을 높이고 이민을 유치한다. 그리고 프롤레타리아들도 정치세력화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발전 속에서 첨단무기를 무장하고 상비군의 확장과 함께 군부의 세력도 커지는 것을 볼 수 있으며 정치개혁을 주도한 엘리트들과는 달리 정치담론에서 소외된 소시민들은 파시스트 정당을 구축하게 된다.
앞에서 설명한 건 이 게임 중 정치파트만을 다루고 있다. 나머지 시스템 중에 나의 눈을 가장 끈 지표는 ‘생활수준’이다. 이 게임은 물가의 공급과 수요에 따라 가격이 결정된다. 동시에 노동자들의 고용 직무와 정부가 지정한 세금의 정도에 따라 가처분 소득이 결정된다. 글로만 설명하면 뻔한 이야기지만 이 과정을 인터렉티브하게 체험할 수 있는 건 지구 어디에서도 볼 수 없을 것이라 여기서 소개하려고 한다.
산업혁명 이전의 사회의 생산성은 형편이 없었다. 기계와 과학의 도움 없었던 시절 굶주림과 역병, 전쟁의 반복으로 개체수가 조정되면서 인구의 성장은 폭발적이지 않았다. 따라서 이것은 만성적인 필수재의 부족, 만성적인 가난의 상태라 정리할 수 있다.
여기서 산업혁명은 필수재를 충분히 공급해 가격을 안정시킨다. 경제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영세농민 및 농노들이 도시의 임금노동자로 편입되면서 새로운 생산을 시작하기 시작한다. 경제 전체적으로 생산량과 가처분 소득이 늘어났다. 그 결과 중세귀족의 전유물이던 사치품들을 중산층이 소비하게 되었고 사치품을 생산하기 위해 경제는 끝없이 확장해 왔다. 이것이 러다이트 운동가들의 우려와는 다르게 모든 노동자들이 실업자가 되지 않을 수 있었던 원리였다. 이렇게 만성적인 가난이 해결되는 과정이다.
본질적으로 이 게임은 공장을 짓는 게임이다. 이 공장에는 사용자가 선택할 수 있는 2가지 옵션이 존재한다. 1) 산출물을 늘리는 옵션 2) 투입되는 인력의 양과 품질을 컨트롤하는 옵션이다. 산출물을 늘리기 위해선 고무, 석유, 새로운 화학물질이 필요하다. 투입되는 인력의 양과 품질을 컨트롤하기 위해선 석탄과 기계, 엔진, 대학이 필요하다. 말이 옵션이지. 본질적으로 둘은 똑같다. 생산 효율을 올려주는 ‘새로운 투입요소’다. 이런 새로운 투입요소가 발견되면 투입의 총량은 줄고 생산은 늘어난다. 예를 들어 맨손을 쓰다가 나무공구를 쓰고 나무를 태우다가 석탄을 태우고, 석유기관이 었다가 전기기관으로 생산수단이 변하는 것이다. 이런 수단의 변경에서 인간도 자유로울 수가 없다. 인간도 생산의 투입요소이며 근본적으로 나무와 석유 같은 탄소생물이니까. (하지만 인간은 물건취급하다간 화를 입을 수 있다)
산업혁명을 하게 되면 수많은 저렴한 노동자가 필요하다. 생산성을 올리자고 하는 일인데 투입을 늘릴 이유가 없다. 그래서 게임에선 노예제를 폐지, 생계비마저도 못 버는 노동자들을 위한 구빈법 같은 디시전이 기다리고 있으며 심지어 기업가들은 이런 법안의 입법을 좋아한다. (노동공급이 늘고 국가가 임금을 보조해 주니 반대할 이유가 없다.) 이런저런 인권보장과 생활수준이 올라가 사람이 살기 좋아지면 인구 유입이 증가하고 여전히 구시대적 사회에선 인구가 유출된다. (실제로 인 게임에선 청나라와 아프리카에서 끝없이 이민행렬이 이어진다.)
이 게임에선 항상 노동자가 부족하지만 기술발전으로 인력투입을 줄일 수 있게 되면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은 다른 일자리로 가게 된다. 충분한 잉여생산을 바탕으로 존재할 수 있게 된 상비군이나 새로운 사치품 공장과 서비스 자영업 같은 곳 말이다. 노예에서 도시의 필수재 공장 임금 노동자로 더 나아가 군인이나 자영업자, 사치품 공장의 노동자로 이런 흐름이다.
그 과정에서 임금 노동자은 쌀만 먹던 시절에서 벗어나 고기도 먹을 정도로 생활수준은 늘어날지 언정 진정한 의미에서의 가처분 소득과 자산의 축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꾸준히 이민자가 유입되고 사망률이 줄면서 임금의 상방을 저지하는 압력을 가한다. 때문에 인게임에선 다문화 체제를 지지하는 정치세력은 세계시민주의의 꽃밭이 가득한 지식인세력뿐이다. 2) 새로운 생산방식도 임금의 상방을 억누른다. 사람 대신 증기기관, 증기기관 대신 전기. 빅토리아3의 세계가 끝난 현실에선 공장 오퍼레이터 대신 회로 프로그래머가 그 자리를 대신했고 이젠 그조차도 필요 없다. LLM AI에게 프롬프트를 적어줄 사람과 사업을 진행하고 책임질 리더만이 필요할 뿐이다.
이러한 생산성의 증가 속에 임금은 오를 여지가 없다. 비대면 혁명 이후 가파르게 올랐던 프로그래머의 임금은 이제는 동결될 일만 남았다. (물론 그중에서도 다른 역할도 해낼 수 있는 사람은 높은 협상력을 확보가능 할 것이다) 새로운 생산소재가 일하는 모습을 완전히 바꿔버린 것을 보라. 이제 우리가 알던 프로그래머는 없다. 이제 그들은 AI와 함께 일하는 조력자고 자본가는 조력자에겐 임금을 많이 주지 않아도 된다.
임금 상향은 억제되고 이런 발전 속에서 경제규모는 커지지만 부동산 같은 필수재는 공급이 제한되어 있어 꾸준히 지대를 통해 수입을 빼앗아가니 정직하게 벌어서야 노동자는 부를 축적할 수도 생활수준을 올릴 수가 없다. 더군다나 인플레는 꾸준하게 실질임금을 깎아내린다.
이 게임에서 끌어낼 수 있는 이야기를 세 가지로 요약하자면
1) "생산성 증가가 경제 성장으로 이어지지만, 그 과실이 임금노동자에게 돌아가는 것은 아니다"라는 현실을 보여준다. 역사적으로 생산성 향상은 분명히 인류의 부를 늘려왔다. 하지만 그 부는 항상 평등하게 분배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기존의 권력자들이 이를 효율적으로 독점하는 형태로 발전해 왔다.
2) 임금이 억제되는 동안 사회에 누적된 부는 다른 곳으로 퍼진다. 따라서 자산(부동산, 주식 등)의 중요성이 점점 커진다. 그리고 이런 부의 방향은 자유시장이 결정하는게 아니라 권력구조가 결정한다.
3) AI시대의 임금노동자는 과거의 산업노동자와 유사한 위치에 놓인다. 기존에 미디어와 정치적 수사로서 반복되던 도시 임금노동의 판타지가 깨지고 경쟁시장에서 열등한 위치에서 시달리게 된다는 것이다.
빅토리아3는 과거의 경제사를 체험하는 게임이지만, 사실상 현대 경제와도 큰 차이가 없다. 그리고 노동자의 위치도 그러하다. 노동자의 삶이 향상되기를 바란다면 과거에 그들 스스로 정치 세력화하여 사회를 바꿔나갔던 것처럼 AI 시대에도 새로운 형태의 경제적·정치적 대응이 필수적일 것이다. 그렇게 새로운 사회적 계약을 갱신해 온 게 지난 역사였음을 그렇게 하지 못한 국가들은 전쟁 같은 큰 대가를 치르고 나서 다른 나라에서 성공한 사회적 계약 모델을 수입해야 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음을 정리하며 글을 마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