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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의 시대, 자연지능을 불러내다.

김근향 대구대 심리학과 교수

by 내 삶의 심리학 mind Feb 20.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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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향 대구대 심리학과 교수김근향 대구대 심리학과 교수
언제부터인가 자연에서 멀어진 우리에게는 이제 자연을 감지하는 능력의 뿌리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은 아닐까? 인공지능의 시대에 조용히 자연지능을 불러내어 본다.


아이들은 더 이상 산에 가지 않는다. 아이들은 더 이상 바깥에서 놀지 않는다. 아이들은 자연 속에 있지 않다. 아이들은 이제 자연에서 정말 멀어졌다. 산을 오르는 어른들은 있다. 나이가 들면 자연을 찾게 된단다. 귀농하는 이들도 있다.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TV 프로그램이 40대 남성들에게는 시청률 1위란다. 어른들은 이처럼 자연에서 즐거움을 찾고 위안을 얻는다.


하지만 지금의 어린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아이들에게는 이제 자연을 즐기는 씨앗 자체가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닐까. 어른들은 그나마 자연에 추억이 있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과거 자신에게 뿌려져 있었던 자연의 씨앗 때문에 그 싹을 다시 찾아 키워나갈 수 있었던 것이리라.


그렇다면 우리 아이들은 어떤가? 스마트폰 같은 최신의 미디어가 그 아이들에게는 경험의 시작이며 추억이고 그것이야 말로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자연지능을 발굴하다


자연지능에서 ‘자연’은 ‘natural’에 해당되는 ‘자연적, 자연의’ 라는 뜻이 아니라 ‘naturalistic’으로 표현되는 ‘자연주의의, 자연주의적’의 의미이다. 여기에 지능을 의미하는 ‘intelligence’를 붙여서 편의 상 자연지능(또는 자연탐구 지능)이라고 부른다. 이는 하워드 가드너(H, Gardner)의 유명한 다중지능이론(The Theory of Multiple Intelligences)에서 제안하는 여러 개의 지능 중 하나이다. 자연지능은 초기에 제안한 7개*의 지능에 실존지능과 함께 후에 추가되었다. 자연지능은 자연세계를 이해하고 관찰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인공지능(Articial Intelligence; AI)에 대별되는 뜻은 아니지만 하도 여기저기서 AI, AI 노래를 불러대고 있어 반발심에 그냥 자연지능이라고 부르고 싶었다. 마침 가드너의 다중지능을 소개하는 책들에서도 자연지능이라고 표현하였기에 용기를 얻었다. 그러고 보니 가드너라는 이름에도 어울린다. 가드너는 그야말로 정원사를 의미하는 것 아닌가?


자연지능이 높다는 것은 이런 것?


나는 자연지능이 우수 수준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가드너는 지능의 발달과 교육을 중시하였고 상대적으로 지능의 측정에는 관심이 덜하였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자연지능을 신뢰롭게 측정하였다는 것에 대해 내가 아는 바가 없어 사실 나의 자연지능 수준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래서 교육심리학자인 레슬리 윌슨(L. Wilson)이 제시한 자연지능이 높은 아이의 특징 중 일부에 빗대어 내가 감히 자연지능이 우수함을 주장(?)하려고 한다.


첫째, 나는 자연 속에 있거나 자연을 관찰하거나 자연을 접촉하는 것을 좋아한다. 즉 산이나 숲에 가는 것을 좋아하고 밤하늘을 쳐다보는 것을 좋아하고 새소리 듣는 것을 좋아한다. 봄이면 벚꽃비를 맞고 가을이면 바스락거리며 낙엽을 밟고 메이플 이파리를 주워 영원히 읽지 않을 두꺼운 원서에 끼워 둔다. 텃밭에서 잡초를 쏚아내고 배추를 거름도 없이 난초 키우듯 하다 배춧잎 대부분을 배추벌레에게 갖다 바치면서도 도시농부라는 사실에 뿌듯해한다.


둘째, 나는 동물과 식물에 관심이 많고 비교적 잘 돌본다. 어려서는 강아지도 고양이도 키워 봤건만 지금은 남편과 딸아이가 강아지 키우는 것을 싫어하거나 두려워해 동물 쪽으로는 고개를 돌리지 않는다. 대신 화분을 키우고 거의 죽이지 않는다. 그렇게 자손을 번식한 식물들은 분갈이를 통해 독립들을 시키고 있다. 꽃 피우기 어렵다는 난에서는 해마다 꽃을 보고 있다. 적당한 무관심과 열악한 환경이 난의 생존력과 생식력을 증대시킨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기도 하지만 난의 꽃향기는 정말이지 황홀하여 역시 내가 잘 키우는 것이라고 우기고 싶게 만든다.


셋째, 나는 자연을 다루는 다큐 프로그램, 책 등의 자료에 관심이 많다. 어린 시절 매일 저녁 어린이 TV 시청 시간대에 방영되었던 몇 분짜리 <동물의 왕국>이라는 자연다큐를 재미있게 보았다. 지금도 자연이나 과학에 관한 다큐 보는 것을 좋아하고 대자연에 감탄하고 마이크로한 생명의 세계에 탄복한다. 꽃 이름 검색 어플 덕에 오가다 만나는 이름 모를 꽃들에게도 이름을 불러 줄 수 있게 되어 기쁘다. 작년에는 내가 있는 대학 캠퍼스의 자연에 관한 에세이를 매주 써서 학생들과 자연의 즐거움을 함께 나누어 뜻깊었다.


레슬리 윌슨은 그 밖에도 ‘주위의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는 것들을 알아챈다. 멸종위기에 처한 동식물이나 환경문제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 등과 같은 특징들을 더 나열하고 있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두드러지지 않는 것이고 그 구체적인 의미를 아직 충분히 파악하지 못해 이 정도로 제시해 둔다.


자연지능이 높은 나름의 이유


그렇다면 나는 왜 자연지능이 높은가? 비록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그 이유를 나의 어린 시절의 경험과 추억에서 찾았다. 프로이트의 신봉자가 아니더라도 심리학을 배우게 되면 개인의 역사, 그중에서도 어린 시절의 경험과 기억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 깨닫게 된다. 내가 측정하기도 어려운 자연지능이 높다고 주장하는 나름대로의 근거는 첫째, 나의 생애 최초 기억이 자연을 배경으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쌀쌀한 새벽 뒷산을 오르던 아버지의 따뜻한 등에 업혀 바라본 새까만 하늘의 영롱한 별들. 내 눈에 그것이 한 마리 백조처럼 보였던 것은 기억의 왜곡 일지 모르겠지만 지금까지도 나는 밤하늘의 별을, 별 보기를 좋아한다. 몇 년 전 우리 학교 근처에 있는 보현산 천문대에서 보았던 겨울밤의 별자리에서도 여전한 감동, 아니 더한 감동이 있었던 것을 보면 아름다운 자연은 언제 보아도 좋다.

Vincent van Gogh , 'The Starry Night',1889, Oil on canvas, 73.7 × 92.1 cm, Museum of Modern Art.Vincent van Gogh , 'The Starry Night',1889, Oil on canvas, 73.7 × 92.1 cm, Museum of Modern Art.

둘째, 나는 자연과 더불어 살았기 때문이다. 시골 출신은 아니지만 지금처럼 캠핑이 대중화되기 전 그 시절에도 야영을 자주 다녔었다. 시골 외가에 놀러 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것은 참으로 재미있고 중독성이 강한 액티비티였다. 어스름한 초저녁에 농가마다 피어오르는 연기와 함께 퍼졌던 은은한 밥 냄새. 지금도 나에게 강렬하게 남아있는 그 감각이 무척 그립다.


그리고 어려서 마당 있는 집에서 키웠던 ‘산타’라는 이름의 셰퍼드 한 마리. 큰 몸집만큼이나 널빤지로 만든 산타의 집도 컸다. 네댓 살 어린 여자 아이의 소꿉놀이집으로 하기에도 큰 산타의 집. 말하자면 나는 그 개집에 들락거렸던 것이다. 사실 몸집이 컸던 산타가 두려웠다. 하지만 좋았다. 초등학교 때에는 목장을 하던 친구의 집에 가서 갓 짠 우유를 데워 먹었고 풀밭에서 소꿉놀이 세트도 없이 온갖 자연을 재료 삼아 먹지도 못하는 듣보잡 요리를 만들어 내는 재미에 푹 빠졌었다. 대도시에 그런 공간이 있었다는 것, 그 친구의 실제 이름이 ‘공주’였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지금 생각하면 내가 어디 상상의 세계에 갔다 왔나 싶지만 이것은 사실이다.


셋째, 나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유명한 생물학자인 에드워드 윌슨(E. Wilson)은 인간은 본질적으로 바이오필리아(Biophilia)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 즉, 인간에게는 자연을 좋아하고 그 속에서 살고 싶어 하는 ‘자연으로의 회귀 본능’이 있어서 본능적으로 자연을 찾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땅이 메마르지 않아 녹색식물이 많고 주변이 탁 트인 아프리카의 사바나 같은 환경을 추구하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는데 이는 진화심리학자인 고든 오리언스(G. Orians)의 사바나 가설**과도 일맥상통한다. 따라서 사실 나만 자연을 좋아하고 자연지능이 높다고 호언할 수 없다. 즉 인간이라면 적어도 누구나 잠재적으로 자연지능이 높다고 하겠다.


자연지능의 씨앗을 싹 틔우기 바라며


다행히도 유전자 속에 숨어 있던 바이오필리아가 나에게서 발현되기 쉬웠던 것은 인공이 아닌 자연 속에서의 체험, 특히 어린 시절의 짧지만 강렬했던 자연과의 만남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자연에서의 추억이 없었다면, 그 기억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주변의 자연을 민감하게 알아차리고 탐구할 수 있었을까? 자연을 즐길 수 있었을까? 자연을 새롭게 더 좋아할 수 있었을까? 자연에서 멀어지다 못해 자연결핍장애***가 심각해진 지금의 우리 아이들에게 인위적으로 자연지능을 높이는 교육을 하기보다는 그야말로 자연스럽게 자연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면 좋겠다. 아이들에게 숨어 있는 바이오필리아가 발아될 수 있으면 좋겠다.


대상을 잘 모를 때 사람은 그 대상을 두려워하거나 낭만적 또는 이상적으로 생각한다고 하지 않는가? 자연을 접하는 경험이 없는 지금의 아이들은 자신 속에 잠재되어 있던 바이오필리아를 구체적으로 알아차리지 못한 채 자연을 그냥 추상적인 대상으로 여기기 쉽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자연에서의 추억을 심어 주어야 초절정 인공지능을 장착한 앞으로의 N차 산업혁명 시대에 혹시 그 진가를 발휘할지도 모를 ‘자연지능’을 불러내어 올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자연지능의 씨앗을 그나마 간직하고 있는 우리 세대가 다음 세대에게 물려주어야 할 또 하나의 유산이 아닐까. 보호하고 보존해야 할 대상으로서의 추상적인 자연으로서만이 아닌 체험하고 함께 더불어 사는 ‘자연’스러운 자연으로서 말이다. 그리고 이제 그 구체적인 방법을 고민해보자. mind


* 언어지능, 논리수리지능, 공간지능, 신체운동지능, 음악지능, 대인관계지능, 자기이해지능

** 인간은 본능적으로 인류의 조상이 거주하던 아프리카 동부와 비슷한 아프리카 동부와 비슷한 환경, 즉 사바나에 아직까지 끌린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이다.

***리처드 루브(R. Louv)가 <자연에서 멀어진 아이들(Last child in the wood)>(2005년)에서 언급한 용어로 인간이 자연에서 멀어지면서 여러 가지 문제점으로 감각의 둔화, 주의집중력 결핍, 신체적, 정신적 질병의 발병률 증가 등을 말한다. 공식적인 장애가 아니라 현대사회의 어린이들이 자연을 경험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하는 여러 가지 폐해를 지칭한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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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근향 대구대 심리학과 교수 | 임상심리 Ph.D.

너무 어린 나이에 멋모르고 꿈을 심리학자로 정해버려 별다른 의심 없이 그 길을 걸어 여기까지 왔다. 그 여정에서 다시 태어나면 꼭 눈에 보이는 일을 해 봐야지 할 때도 있었지만 지금의 심리학 대세론에 선견지명이 있었다며 스스로 뿌듯해하며 또다시 새로운 꿈을 꾸어 본다. 마음 통하는 사람들과 생생한 삶 속에서 심리학의 즐거움과 재미를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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