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트로브잣나무 Jul 27. 2021

1004의 문자

2018-08-22에 작성된 글.

지금도 1004라는 숫자만 보면 움찔한다.


굳게 닫힌 방문. 연분홍색 이불을 덮고 웅크려 있는 나. 문 밖으로 들리는 증오의 목소리들. 아파오는 머리. 거친 숨소리. 액정으로 떨어지는 눈물방울들. 15살의 나는 분노에 가득 찬 마음으로 누군가에게 저주 문자를 보냈다.


좋아하면서 싫어하는 사람이 있었다. 바로 중학생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 S이다. 사실 친구라고 말하기도 조금 그런 것이 별로 친하지도 않았다. 그녀에 대해 말하자면, 무척 어른스러웠고 그림도 잘 그렸으며 성적이 좋았다. 심지어 성격도 좋아서 그녀 주위에는 늘 친구들이 함께했다. 무엇보다 그녀의 얼굴은 정말 아름다웠다.


교실 의자에 앉아있을 때면 늘 그녀를 몰래 쳐다보고는 했다. 아직도 생생하다. 선한 눈빛, 오똑하고 부드러운 코, 화장을 하고 다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늘 자연스럽게 붉던 입술과 잡티 하나 없는 뽀얀 피부. 너무 예쁘고 아름다워서 나도 모르게 눈길이 가는, 여태 살면서 제일 많이 몰래 쳐다본 그런 사람이었다.


항상 그녀를 부러워했다.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완벽했기 때문이다. 그녀에 대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나와 그녀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미션스쿨이었던 우리 학교에 있는 워십 동아리에 들어가 주님을 찬양하곤 했지만 당시의 나는 매일 선과 악의 경계에 대해 생각하며 신을 부정하고는 했었다. 그녀는 영화에나 나올 것 같이 예뻤지만 나는 한낱 촌스러운 보라색 뿔테 안경을 쓰고 지저분한 곱슬머리를 가진 아이였다. 결정적으로,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친구들에게 화목한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


당시 나의 가족은 파괴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동경과 질투 사이에서 탄생한 악마 같은 마음이 쌓이고 쌓여 평생 후회할 사건을 만들어버렸다.


어느 날 밤, 방 밖에서 또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부모님이 싸우는 건 이제 일상과 마찬가지였기에 ‘또 시작이네.’ 하고 넘기려고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했다. 밖에서 들려오는 언성이 높아질수록 분노가 치밀아 올랐고 호흡이 가빠졌다. 이렇게 짜증 나는 상황은 세상 사람 중 오직 내게만 닥친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분노를 어딘가에 풀고 싶었다.


이성적인 생각이 들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내 상황을 알려야만 했다. 이때 계속 나의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인물이 생각났다. 바로 S. 당시 나에게 정말 완벽하게 보였던 사람. 그리고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것 같아 보이는 사람. 주체할 수 없는 질투심이 끓어올랐다.


사람이 미치면 그다음에 벌어질 일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저지르는 걸까. 패닉 속에서 핸드폰을 잡았고 S에게 보내는 문자 메시지 창을 켰다. 생각나는 대로 떠오르는 심한 욕을 잔뜩 적었고 발신 전화번호를 수정하여 1004라고 고쳤다. 1004라고 바꾼 이유는 간단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도 유치하고 질하지만 기독교인 그녀가 천사의 목소리를 통해 불행해지기를 바랐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손을 부들부들 떨며 전송 버튼을 눌렀다.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마음속에서는 한 번도 분노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 없을 것만 같은 그녀가 얼른 이 문자를 보고 슬픔에 잠기기를 바랐다. 누가 나한테 이런 문자를 보냈냐면서 욕하기를 간절하게 바랐다. 자신이 무슨 잘못을 했는지도 모른 채 내일 학교에서 스트레스에 잠겨있을 그녀를 기대하며 잠들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랐다. 그녀는 생각보다 차분했고 심지어 여유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야 얘 진짜 미친 거 아냐?”

“신경 쓰지 마 누가 너 질투해서 보낸 거야.”

“빨리 전화번호 추적해봐.”


학교에 갔더니 그녀는 자신에게 온 욕설 가득한 문자를 친구들에게 보여주며 이 문자 메시지가 과연 누구에게 왔는가에 대해 미소를 띠며 이야기하고 있었고 전작 그녀가 아닌 그녀의 친구들이 1004라는 인물을 가만둬선 안된다고 화를 내고 있었다. 그제야 내가 한 짓이 떠오르며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머릿속에는 ‘들키면 어쩌지’라는 생각 외에는 아무것도 들지 않았고 그 아이와 반 아이들을 대할 때마다 내가 한 짓이라는 게 들통날까 봐 두려움에 갇혀 한동안은 목소리마저 나오지 않았다.


그녀가 불행하기를 바랐는데 거꾸로 내가 외줄 타기를 하고 있는 듯 매 순간 긴장하고 있었다. 누가 나를 부를 때면 설마 그 사실을 알았나?라는 생각에 괜히 찔렸고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오면 누가 범인이 나인 걸 알고 문자를 보냈나?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다. 명백한 잘못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실에서는 여전히 1004가 누구일지에 대한 이야기 오가고 있었고 그런 고통 속에서 한 일주일이 지났을까. 어느 날 저녁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순간 직감적으로 그 일에 관련된 전화임을 느꼈다. 전화 진동 횟수가 늘어날수록 받는 게 두려워졌다. 하지만 이 고통 속에서 벗어나려면 그 전화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슬기 학생 맞죠? S 엄마예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것 같았다. 다 드러났구나. 솔직하게 말해야겠다.


“전화 왜 건지 알죠?”

“….. 네. 그 문자 메시지요..”

“원래 그냥 지나가려고 했는데 S가 많이 궁금해해서 누군지 알아보았어요. 그런데 추적된 번호가 슬기 학생이라는 거 알고 많이 놀라더라고요.”

“죄송합니다…”

“.. 슬기 학생이 우리 S랑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S가 말하길 그 문자메시지를 아무 이유 없이 보낼 것 같지는 않았다고 하더라고요."


그 순간 울음이 북받쳐 올랐다. 내가 왜 그런 메시지를 보냈는지에 대해 털어놓고 면죄부를 받고 싶었다.


“아무 이유 없었어요.. 단지 S가 부러웠어요. 저랑 다르게 되게 행복해 보여서요.”

“…”

“앞으로는 그런 짓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 정말 죄송해요..”


나의 잘못을 누군가 알게 되고 그에게서 괜찮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렇게 안심될 수가 없었다. 죄를 씻은 느낌이었다. 그 뒤에 S의 엄마가 S에게 전화를 바꿔주었고 나는 사과를 했다. 사실 얼른 용서받고 괜찮다는 말을 듣기에 급급했지 진심 어린 사과는 아니었던 것 같다.


그들이 나를 용서해 주는 순간 모든 게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다. 왠지 S라면 그녀의 친구들에게 1004의 정체에 대해 말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 사건은 딱 3명만 아는 진실로 묻힐 것이라고 생각했고 또 그래야만 했다. 물론 그 다음날 같은 교실에서 S를 직접 대면하기에는 용기가 부족했지만 그녀와 눈이 마주칠 때면 ‘내가 잘못했다는 거 알고 너에게 용서받고 싶어’라는 마음이 들어간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했다. 그에 그녀 또한 편안한 표정을 보이고는 했다.


마음은 편해졌고 당시 반에서 제일 친하던 Y에게 이 사건에 대해 털어놓기까지 했다. 그녀는 괜찮다며 위로해주었다. 나의 죄를 고백한 사람이 한 명 늘었을 뿐인데 그건 내게 큰 위안을 주었다.


하지만 사건은 전혀 예상치 못하게 터지는 법. 학교 쉬는 시간에 Y와 함께 화장실에 들렀다가 교실 앞문으로 들어는 길이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했다. S의 친구들이 막 들어온 나와 칠판을 번갈아보며 낄낄대던 것이었다. S는 민망한 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칠판을 쳐다보았다.


’ 1004=슬기로운 생활’

‘양심도 없냐’

‘천사 슬기’


칠판에는 1004가 누구인지에 대한 사실과 나를 조롱하는 듯한 문구와 그림, 그리고 욕설들로 온통 도배되어 있었다. 그것들을 보는 순간 한없이 추락하는 기분이 들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으며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 앞에 더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도망치듯이 교실을 빠져나왔다.


나의 상태를 본 Y가 왜 그러냐고 물었지만 나는 말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하면 Y가 참 대단했다. 그녀는 교실로 들어가 칠판의 상태를 확인했고 아무 말 없이 적힌 것들을 지웠다. 그리고 복도에서 울고만 있는 내게 다가와 다 지웠다고 같이 들어가자고 했다.


하지만 나는 한동안 교실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반에서 제일 인기 있고 착하고 예쁜 S에게 그런 짓을 저질렀다는 걸 반 아이들이 알아버린 이상 그들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하지만 곧 수업이 시작될 예정이었고 수업을 쨀 용기 따위는 내게 없었다. 창백하게 질린 채로 Y와 함께 들어갔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에 대응할 만한 입장도 아니었을뿐더러 멈추라는 이야기를 할 배짱도 없었다. 잘못에 대한 벌을 그제야 제대로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한동안을 유령처럼 지냈던 것 같다. 부모님에게 털어놓기에는 그들만의 문제가 심각했기에 나의 고민을 말할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친구 Y가 나의 비밀을 알고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어주지는 못했다.


학교에서 만큼은 자주 웃었던 나였지만 S와 그녀의 친구들이 보는 앞에서 웃음을 내비칠 수가 없었다. 그 일이 일어나고 나서 며칠 동안은 S를 원망했다. 사과를 받았으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설령 친구들에게 말했더라도 칠판에 그런 짓을 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거듭될수록 내게 남는 건 자기 합리화와 고통뿐이었다. 하지만 반드시 그녀 입장에서도 생각해 보아야 했다. 그 문자를 받았을 때 얼마나 많은 충격을 받았을까. 그리고 그녀는 그 사실을 친구들에게 말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나는 잘못을 저질렀고 그녀에게 제대로 된 용서를 구해야만 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나의 잘못을 알게 되어버리기도 했고 이젠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게 된다고 해도 별로 두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중요한 건 가해자인 내가 피해자인 S에게 진심 어린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녀에게 사과를 하긴 했지만 그땐 진심이 담기지 않았었고 심지어 전화 통화로 주고받은 사과였다. 당사자에게서 진정한 용서를 받으면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떤 식으로 생각하던 상관없다고 믿었다.


‘그래. 직접 찾아가 다시 한번 제대로 잘못했다고 말하자.’


그날 밤 침대에 누워 그녀에게 어떻게 용서를 구할지 나름의 말들을 준비했다. 언제 다가가서 말을 걸지, 그녀의 친구들이 주위에 있으면 어떻게 할 건지, 다가가서 말을 걸 기회조차 생기지 않을지, 심지어는 그녀가 학교에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 할 건지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온갖 경우의 수를 생각하던 중 잠이 찾아왔고 곧 날이 밝아왔다.


의외로 쉽게 다가갈 수 있었다. 1교시 쉬는 시간, 교실 뒷자리에 위치한 그녀의 책상 앞으로 가서 잠깐 말하고 싶은 게 있다고 말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친구들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기하게 단 하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복도 앞 창가에서 우리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내가 먼저 말해야만 했다.


“그 문자 메시지. 정말 미안해. 다시 제대로 사과해야 할 것 같았어.”

“괜찮아…. 나도 미안해.”

“뭐가?”

“애들이 칠판에… 적은 거..”

“네가 뭐가 미안해..”


마지막으로 미안하다는 말을 연거푸 한 뒤 교실로 들어갔다. 서로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결코 환하지는 않은 미소였고 S와 나는 원래의 사이로 절대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이 사건은 학창 시절 중 누군가에게 일방적으로 상처를 준 유일한 사건이었다. 심지어 아주 어린 나이에 저지른 일도 아니었기에 나의 기억 속에 강력하게 자리 잡아 늘 죄책감으로 다가온다. 단 한 번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주저 없이 그때로 돌아가 이 사건을 없애고 싶을 정도다. 무척 비겁하고 생각 없고 못되고 유치한 행동이었다.


친한 친구들도 몰랐을 만큼 나는 스스로를 많이 포장해 가며 항상 긍정적인 척, 웃음이 많은 척 살아왔다. 내가 그랬듯 그녀 또한 나름의 고통이 있었을 것이다. 있었음에 틀림없다.

이 완성되면 꼭 S에게 알리고 싶다. 그리고 다시 한번 용서를 받고 싶다.

작가의 이전글 첫 뮤지컬 데뷔와 받지 못한 페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