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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트로브잣나무 Jul 27. 2021

집_2

2018-08-03에 작성된 글.

엄마와 한 방에서 생활하기


내가 가야 할 길은 점점 더 명확해지는 중이었다. 명확해질 수록 모든 일에 모든 힘을 쏟았다. 좋은 대학에 가야만 했다.  전공 외 사교육을 받을 여유도, 돈도 없었기에 학교 수업시간에 열심히 수업을 들었으며 선생님들께 좋은 인상을 남기고 좋은 학생부 기록을 남겨야 했기에 교내 활동도 놓치지 않았다.


꽤나 열심히 공부한 결과 3년 내내 반 1등을 놓치지 않게 되었다. 다행히 내가 다니는 학교에서는 공부로 대학에 가려는 학생들이 많지 않았기에 조금만 열심히 하면 괜찮은 내신 성적을 딸 수 있는 환경이었다. 


학생부에 한 줄이라도 더 도움이 될 만한 것들을 하고 싶어 선도부에 들어갔고 어쩌다 차장 자리를 맡게 되었으며 결국 학생회 임원도 했다.


노래와 음악에 대한 열망은 말할 것도 없었다. 거의 매일을 연습실에 살다시피 했다. 연습실을 사용하려면 선생님이나 조교님의 허락을 받았어야 했는데 늘 늦게까지 남아있는 나 때문에 그들이 귀찮아할 정도였다. 이른 아침부터는 선생님과 함께 등교하는 학생들의 복장을 잡아내고, 방과후에는 매일 연습실에 제일 늦게 남아 연습하는 착실한 학생으로 기억되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왜 했냐 함은, 학교에서의 나는 그야말로 엘리트였다. 보통의 가정에서는 환영받았을 그런 아이였다는 것이다. 학교 일들로 엄마와 다툼이 일어날 리가 없었다. 하지만 다른 들이 문제였다. 집 안에서의 나는 종종 게을렀다. 밥을 먹고 나서 설거지를 하지 않는다던지, 학교에 가지 않는 날에는 해가 중천에 떠도 일어나지 않는다던지, 엄마가 잘 시간에 샤워를 한다던지, 머리카락을 줍지 않는다던지.


무척 사소한 문제들이었지만 그런 일들은 반복되었고 무엇보다 분리된 공간에서 생활할 수 없는 환경이다 보니 서로가 가진 스트레스는 더욱 커져만 갔다.


또한 학생으로서 할 수 있는 베스트를 해냈기에 집안에서는 조금 쉬고 싶었을 뿐인데 그걸 이해하고 포용해주지 못하는 엄마에게 화가 났다.


태초부터 가족 구성원이 엄마와 나뿐이었다면 우린 서로에게 덜 상처 받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소한 트러블은 쉽게 극복해 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아빠를 세상에서 가장 증오하게 된 엄마는 나에게서 아빠의 모습을 불가피하게 보았고 싸움이 격해지면 엄마는 늘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그럴 때마다 니 아빠랑 똑같아. 그 독사 눈.”


. 나는 그 말이 정말 싫었다.


후에 엄마를 떠나 아빠와 싸울 반대로 이 말을 들었다.


“너 그럴 때마다 니 엄마랑 똑같아. 그 신경질적인 모습.”


싸움이 극으로 치달을 때마다 그들에게서 늘 나오는 말이었지만 나는 여기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사실 지금도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도 닮고 싶어서 닮은 건 아닌데. 서로가 서로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알고 있는 나에겐 그 말은 들을 때마다 큰 상처로 다가왔다.


엄마는 나와 싸울 때 자신이 그토록 오하는 아빠의 모습을 보았고 아빠는 나와 싸울 때 자신이 그토록 질려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았다.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엄마와 아빠의 딸이니까. 그리고 자식은 부모를 닮으니까.


그 말이 들리면 그 싸움은 더 이상 평범한 싸움이 아니게 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울컥해서 제발 그 말만은 하지 말라고 애원하거나 화를 낸다. 감정은 격해지고 서로에게 해서는 안 될 말들로 서로를 할퀸다. 그렇게 엄마가 싸움의 끝에서 항상 꺼내던 말.


“너 이럴 거면 아빠한테 가서 살아.


나의 양육권을 가진, 그리고 권력을 가진 엄마가 할 수 있는 말이었다. 


그 말은 언제나 마음속에 못처럼 박혀 사라지지 않았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땐 엄마에게 무릎을 꿇으며 울며불며 매달렸다. 그런 말은 제발 하지 말아 달라고, 제발 내쫓지 말라고 애걸복걸했다. 그렇게 빌고 나면 싸움은 곧 다독임으로 끝났다. 그렇게 무슨 각서를 썼던 것 같다. 엄마가 늘 아빠에게 받아내듯이 말이다. 집안일에 대한 수칙을 몇 번 이상 어길 경우 아빠 집으로 가는 규칙을 만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아빠 때문이라며 공격의 화살을 아빠에게로 돌려버렸다. 당시 내게 여전히 괴물 같은 존재였던 아빠의 모습은 엄마의 입을 통해 그 형상이 더 뚜렷해졌고 그에 대한 나의 증오는 점점 커져만 갔다.


엄마는 그녀가 아빠를 욕할 때마다 내가 공감해 주는 것에 안도를 느끼는 듯했고 그게 우리를 맺어주는 유일한 연대였다. 아빠 집에 가서 살게 되는 것보다 싸우더라도 엄마와 있는 게 훨씬 낫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나에게 아빠는 그저 가끔씩 만나 밥을 사주고 필요한 물건을 사주는 존재였다. 한 달에 한 번, 혹은 두 달에 한  꼴로 만나곤 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나에게 고통이었다. 엄마는 내가 아빠와 만나는 날이 올 때마다 아빠에게 서글서글하고 애교스럽게 대하며 필요한 것들을 요구하라고 말했다. 여우처럼 굴라고. 그렇게 하는 것도 사회생활이라면서. 그녀는 내 머릿속에 괴물을 새겨놓고는 그 괴물에게 웃으며 대하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이 거북하게 느껴졌지만 엄마 앞에서는 알겠다고 했다. 하지만 감정을 잘 숨기지 못하는 나는 정작 아빠와 만날 때 무뚝뚝한 모습만을 보이곤 했으며 어떤 물건을 사 달라고 말하는 건 더더욱 불편한 일이었다. 오빠가 능청스럽게 아빠에게 부탁을 하면 그 흐름을 틈타 겨우 부탁했던 정도였다.


엄마의 말이 불편하게 느껴졌지만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던 이유를 이해하기에 슬프다. 큰 수입이 없고 돈이 궁한 상태에서 엄마는 내가 좋은 것들을 가지길 바랐을 것이고 그것들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엄마에게 원수 같은 존재지만 나의 아빠인 사람에게서 얻어내는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마가 겪은 세상에서의 여성은 애교 혹은 여우 같은 모습으로 어떠한 것을 얻어낼 수 있는 존재였기 문에 나에게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엄마의 입을 통해 아빠가 성인이 되기 전 나에게 주어야 하는 양육비 2000만 원에 한참 모자란 900만 원을 주었다고 들었다. 이혼 직전 부모님은 양육비 문제로 자주 다퉜다. 아빠가 주겠다는 양육비는 점점 적어졌으며 아빠에 대한 나의 실망도 커져만 갔다. 아빠는 내게 딸의 안위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으로 인식되었고 엄마는 “딸이 조금이라도 안전한 곳에 살게 조금이라도 양육비를 더 줘야 하는 게 아니냐며 아빠를 매일 헐뜯었다.


내가 귀에 달고 사는 말은 그런 것들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아빠에게 비싼 물건들을 요구하는 건 정당하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아빠를 물질적인 수단으로만 보는 나 자신에게 죄책감이 들곤 했지만 당연한 일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무언가를 요구하는 걸 어려워하는 성격임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요구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런 것이었다.


엄마와 나의 사이는 사소한 것들만 아니면 괜찮았다. 나는 뮤지컬이나 연극을 무료로 볼 수 있는 이벤트에 자주 응모했으며 당첨이 되면 엄마랑 보러 가곤 했다. 요리 솜씨가 좋은 엄마는 가끔 비싼 재료를 사 와 맛있는 것들을 만들어주기도 했다.


나는 최소한의 비용으로 학교와 집만 오갔사교육에 비해 현저히 저렴한 방과 활동 수업을 들으며 엄마의 부담을 덜려 노력했다. 물론 이런 최소한의 것들을 내야 한다 말할 때도 죄책감이 느껴졌지만 말이다.


심심한 싸움과 괜찮은 일상들이 2년쯤 반복되었을까, 하루는  크게 싸웠던 것 같다. 그날도 엄마는 어김없이 "네 아빠랑 똑같아.", "아빠 집으로 가."라고 소리쳤다. 이제 그런 말들에 이골이 난 나는 참지 못하고 엄마에게 심한 말을 내뱉었다. 


"엄마가 그러니까 이혼했죠."


싸울 때마다 늘 마음속에 있었지만 한 번도 말하지 않았던, 하지만 게 상처를 주는 엄마에게 똑같이 상처를 주고 싶어 해서는 안 될 말을 꺼내고 말았다. 지금 생각하니 끔찍하다.


그 말에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른 엄마는 나를 때리기 시작했어느새 훌쩍 커버려 엄마보다 커진 나는 엄마의 팔을 잡아서 막았다. 그에 충격을 받은 엄마는 나의 옷과 짐들을 현관 밖으로 던졌다. 갈 곳이 아예 없었다면 엄마에게 잘못했다며 무릎을 꿇고 이러지 말라고 싹싹 빌었을 텐데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에게는 갈 곳이 있었다. 비록 그곳이 아빠의 집이긴 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아빠의 집으로 가는 상황은 만들기 싫었다. 당시 아빠에 대한 마음이 그 정도였다.


그 싸움 이후 우리의 사이는 급격히 나빠졌다. 이러다가 정말 아빠 집으로 가야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어릴 적부터 매 끼마다 요리를 직접 만들고 집안을 늘 청결히 유지했던 엄마의 귀가 시간이 점점 늦어졌고 엄마는 집안일에 거의 손을 떼게 되었다. 나는 학교에서 하는 공연 준비로 인해 아침 8시까지 등교하고 거의 밤 12시에 집에 도착하는 스케줄이 일상이었기에 집에 돌아오면 곯아떨어지기 일쑤였다.


집에는 밥과 반찬이 없었다. 나에 대한 엄마의 관심 또한 급격히 떨어져 갔고 부딪히는 횟수도 늘었다. 정말 별 거 아닌 일들로 시비가 붙었으며 사소한 원인에 비해 싸움의 강도는 커져만 갔다.


그렇게 서로에게 정이 떨어져 나갔다. 엄마는 나의 태도와 경제적인 여건을 이야기하며 더 이상 나를 책임지기 힘들다고 말했다. 엄마와의 관계는 여기서 끝난 것 같았다. 아빠와의 관계가 껄끄러운 나는 오빠에게 연락했다. 나를 안쓰럽게 여긴 오빠는 자신의 얼마 안 되는 용돈에서 10만 원 정도를 꺼내 내 통장에 넣어주었고 나는 아빠의 집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고등학교 3학년 되기 직전 아빠의 집으로 짐을 옮겼다. 박스를 구해서 엄마의 집 안에 있는 내 물건들을 차곡차곡 넣었다. 엄마는 냉정했다. 내가 떠나는 그 순간까지도 짐을 싸는 것을 도와주거나 시선 조차 주지 않았다. 아빠는 엄마에게 끝까지 책임지지도 못할 거면서 어디 큰 소리를 쳤냐고 말했다.


그렇게 도착한 아빠의 집은 엄마의 집보다는 컸지만 세 식구가 살기에는 좁았다. 나는 오빠가 쓰던 작은 방에서 잠을 잤고 오빠는 성별이 같았기에 아빠와 함께 큰 방에서 잠을 잤다. 오빠의 독립된 공간을 뺏어버린 셈이었다. 그렇게 한 1년간은 나 자신이 짐덩이가 된 것 같다는 죄책감에 괴로워했다. 그리고 아빠와 다툴 때 아빠는 나의 이런 점을 약점 삼아 공격했다.


"너 때문에 지금 우리가 얼마나 불편하게 생활하는 줄 알아?"

"이럴 거면 다시  엄마 집에 가."


그렇게 1년이 지나고 나는 대학에 갔다. 오빠는 군대에 갔고 아빠는 새로 만나는 분의 거처에서 생활하게 되면서 나는 저절로 집에 홀로 있게 되었다. 약간 숨통이 틔였던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나 자신이 짐짝처럼 느껴졌다.


이 끔찍한 느낌은 내가 온전히 독립해서 혼자 살기 전까지는 없어지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 이후에 나는 아빠가 결혼해서 함께 살게 된 새어머니의 집에서 살기도 했으며, 친구의 집에 살기도 했고, 또 다른 친구의 집에서 살기도 했다.


공통점은 모두 얹혀살았다는 점이다. 부모님의 이혼 이후 6년간 6번의 거처를 홀로 옮겨 다녔다. 이런 과정 속에서 내 마음속에는 누구에게도 신세 지기 싫은 마음에 하루빨리 돈을 벌어 독립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굳게 자리 잡았던 것 같다.


가정이 평화로웠던 시절, 쉬는 날이면 노란 햇살이 들어오는 안방에 큰 이불을 깔고 온 가족이 드러누워 TV를 보곤 했다. 먼지 나는 이불, 누리끼리한 장판, 푸석푸석한 공기. 그때마다 풍겨져 오던 냄새 같은 게 있었는데 나만 느꼈던 건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그 냄새를 아직도 기억한다. 그리고 그게 바로 집이라고 불리는 것 아닐까 생각한다.


나는 이미 상당 부분 만들어졌고 내 주변 사람들 간의 관계 또한 상당 부분 성립되었다. 우리 모두에겐 서로에게 받은 상처가 있지만 화해나 시간으로 인해 치료가 되기도 한다. 어떤 것들은 흉터로 남아 더 이상 아프지 않은 것들도 있지만 어떤 것들은 곪을 대로 곪아 오랫동안 아플 것이다.


평생 상처로 남을 그 부분을 공유하며 관계를 인정하기로 했다. 하지만 앞으로 살 날이 많다고 가정하는 하에 그 관계는 더 이상 상처 받아선 안된다고 생각한다. 시간을 되돌리지 않는 한 그 전의 관계로 돌아갈 수 없으니 우리의 최선은 그저 그 사실과 잘못들을 인정하고 서로에게 분노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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