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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마고 Feb 21. 2021

지하철 노마드의 사랑

나의 움직이는 집

SONY WH-1000XM4


어쨌거나 매일 아침 지하철 한 구석에서 사랑을 시작해보는 것이다.


폭신한 헤드폰으로 귀를 덮고, 패딩 부대 사이를 둥둥 떠다니며, 좋아하는 중국인 남자가 하는 말을 따라서 발음해본다. 마스크 속 입술은 홀로 열띤 마임 공연 중이어서, 이 은밀한 사랑을 아무도 알아챌 수는 없다. 언젠가 이 남자애가 하는 말을 미묘한 뉘앙스까지 놓치지 않고 알아듣고 말 것이다. 그런 돈 안 되는 목적에 목메고 있으니 이것은 공부가 아니라 사랑이 맞다.


왜 어떤 일들은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할 때에만 유난히 하고 싶어 지는 걸까.


버스에 앉았는데 창에 해가 들면 책을 펴고 싶다. 버스가 움직일 때 엑스레이처럼 빛이 글자들을 훑고 지나가는 순간이 좋다. 가는 길에 터널이 많을수록 즐겁다.


비행기 기내등이 꺼지면 시시콜콜한 것들을 적고 싶어 진다. 아무리 괄괄한 사람도 잠자는 머리통만은 한없이 조용하고 동그랗구나 하는 감상을, 유령선에 올라탄 유일한 인간이 된 거 같다는 상상을, 내일 도착할 나라의 시장에서 사 먹고 싶은 식료품의 이름을. 휴대폰 메모장을 가장 어둡게 켜놓고 적어 내려간다.


지하철 칸 사이 통로가 비어있으면 거기에 몸을 쏙 숨기고(안 숨겨짐) 출근이 나의 영혼을 빼앗기 전 조금 더 똑똑해지고 싶어 진다. 통로 이음새 부분이 꿀렁꿀렁 움직이면 내 몸도 같이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좋다. 어느 날은 꼭 잠자는 에어리언 등 위에 올라탄 거 같다고 생각하며 중국어 단어를 외웠다.


막상 목적지에 도착해 자리를 잡고 앉으면 하고 싶은 마음들은 모두 날아가버린다. 아마 선명해져야 하는 시간에는 해내야만 하는 일들이 너무 많아서이겠지. 틈새의 시간에만 사랑할 수 있는 지하철 노마드에게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은 언제나 움직이는 집이 되어줬다. 소음 차단을 넘어 이 물건이 주는 사적인 공간감을 나는 정말 좋아한다.



물건의 단점 : 사람이 살면서 자신의 정수리를 느끼는 일은 별로 없을 거 같은데, 이 헤드폰을 삼십 분 넘게 착용하고 있으면 정수리가 아파온다. 그래서 사실은 사고 나서 2주만 쓰고 당근에 팔아버리려고 했다. 팔아서 에어 팟 프로나 다시 사야지(분실했음) 그렇게 생각했다.


물건의 장점 : 그러나 이 물건을 착용한 내 모습이 좋아져 가지고 차마 당근에 내놓질 못했다. 생긴 게 중요하긴 하다. 색상, 질감, 착용했을 때 떨어지는 라인 모두 부담스럽지 않다. 그리고 사자마자 겨울이었다. 패딩 입고 이거 쓰면 정말 조금도 춥지 않았다. 여름엔 아무래도 에어팟 프로를 사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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