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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나비 Aug 13. 2024

나는 행복을 '선택'한다

행복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잡는 것이다

어제는 남편과 다투었다. 

시작은 별일이 아니었다. 나는 어제 잠을 잘 못 잤고, 낮잠도 자지 않았기 때문에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하원할 때쯤에는 매우 피곤한 상태였다. 남편은 나의 상태를 잘 몰랐고, 그래서 굼뜨고 말을 해도 대답도 안 하고 눈은 반쯤 감고 다니는 내 상태를 보고 화를 냈다. 그것은 남편이 오랜만에 마음을 먹고 집안 정리를 하고자 하는데 내가 전혀 협조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너무나도 상처를 받았고 아이 앞에서 다툴 수가 없어서 집에서 나와 차에 가서 앉아 있었다. 줄줄 울면서 혼자 생각했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내가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남편과 나의 다툼 이야기를 하면저 자잘못을 따지기 위함이 아니다. 내 입장에서 보면 내가 옳고 남편의 입장에서 보면 남편이 옳다. 그리고 그것이 뭐가 중요할까. 중요한 것은 남편이 화를 낸 그 순간에 나의 태도였다. 나는 차에서 계속 생각을 이어 나갔다.


'남편이 화를 낸 순간에, 내가 화가 나더라도 나오지 않고 그냥 미안하다고 하고 일부러 하하하하 웃고 아이와 같이 놀았으면 어땠을까.'


그냥 그때를 가볍게 넘겨 버리고, 아이와 놀다가 아이가 잠들고 나서 실은 아까 화를 냈을 때 서운하고 속상했다고 말을 했다면. 그랬다면 남편은 오히려 내게 미안해했을 것이다. 내게 화를 낸 순간에도 남편은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내가 나가겠다고 했을 때도 순순히 보내 주었다. 남편 역시 화를 내고 나서 혼자 엄청나게 후회를 하는 중이었던 것이다. 다만 표현을 잘 하지 못하는 성격이라 무뚝뚝하게 굴었을 뿐이다. 그것을 알면서도 그 순간에는 그것이 잘 되지 않았다.


화는 서로 잘 풀었다. 나는 돌아와서 아이를 재우고 남편과 이야기를 했다. 남편에게 서운한 것을 말했더니 남편이 미안하다면서 자신이 이러이러한 상황이라서 그랬다고 설명했다. 나는 남편의 기분을 이해한다고 하고 사과했다. 잘 해결되고 나니 허무했다. 진짜로, 아까 화를 냈을 때 그냥 잘 넘어가기만 했어도 아무 일이 없었을 텐데. 집을 나오고 차로 가서 줄줄 울고 했던 그 시간들이 진정 아까웠다.


나는 나를 미워하는 그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그는 나와 서로 사과를 하고 무려 석 달이 다 되도록 그 화를 풀지 않고 있다. 대체 왜 그러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내가 진짜 잘못한 일인가 싶어서 남편에게, 친구에게, 지인에게 다 이야기를 해 보았다.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했지만 그들은 '아무래도 그쪽이 문제가 있는 것 같다'는 결론을 하나같이 내렸다. 그리고 나보고 그냥 피하고 잘 대해주라고만 했다. 아무래도 상처가 많은 사람 같다며. 서로 사과하고 풀었으면 끝난 건데, 그토록 오래 그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그쪽 문제 같다고.


문제는 그가 화를 풀지 않기에, 그가 나를 그렇게 대하기에 내가 어린이집 지인들과 함께 다른 활동을 하는 것도 매우 불편해졌다는 것이다. 어린이집에서 학부모를 대상으로 하는 각종 행사들도 많고, 이것저것 사모임들도 많은데 솔직히 다 귀찮고 싫어졌다. 어린이집 등하원을 학부모가 직접 하기에 잠깐 얼굴을 볼 때도 있는데 그럴 때마다 기분이 너무 나빠서 견딜 수가 없다. 정말이지 아이만 아니었으면 백 번도 더 옮겼을 텐데, 아이가 졸업이 얼마 남지 않아서 참고 또 참는 중이다.


하지만 내가 그럴 이유가 있던가? 상대가 나를 어떻게 대하든, 화를 내든 투명인간 취급을 하든 나는 그냥 내 결대로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물론 남편을 대할 때보다 그를 대하는 난이도가 더 높긴 하다. 남편은 벌컥벌컥 감정을 토하는 사람이어도 기본적으로 악하거나 마음이 꼬인 사람은 아니기에 내가 순하게 대하면 오히려 더 사과를 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만약 위의 경우에 남편이 화를 냈을 때 내가 웃으면서 넘어갔으면 남편은 혼자 미안해서 발을 동동 구르다가 어떻게든 사과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르다. 내가 아무리 웃고 잘 대해도 그는 마음을 풀지 않는다. 여전히 나에게 쌀쌀맞게 대하면서 나를 투명인간 취급한다.


그렇다고 해도, 적어도 내 마음만큼은 기쁘고 행복하게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물론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가 나에게 그러는 것은, 나로 인해 자신이 화가 난 것을(하지만 따지고 보면 나로 인함이 아니라 아마 본인의 문제겠지만) 나에게 어떻게든 표하고 나도 같이 화가 나도록, 그래서 자신처럼 불행해지도록 만들고 싶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그에게 가장 큰 복수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가 화를 다스리지 못해서 그 화에 2개월이 넘게 휘둘리는 것과 다르게, 나는 그가 전하는 그 화를 다스리고 무너지지 않는 것이다. 그가 뭐라고 하든, 더는 내게 책임이 없기에 그로부터 자유해지는 것이다. 실제로 나르시시스트에게 가장 다루기 힘든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이라고 한다. 휘둘려지지 않는 사람, 자존감이 높은 사람, 타인이 자신을 어떻게 대하든 크게 영향 받지 않는 사람. 이런 사람은 나르시시스트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면서 동시에 좋아하는 그런 유형의 사람이다. 별말 안 해도 기대고 의지하고 싶게 만드는 사람이다.


나는 남이 나에게 기대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만, 나 스스로는 나에게 좀 기대도 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이제까지는 내가 연약하고, 내가 힘이 없고, 내가 그럴 사람이 못 되어서 스스로에게도 기댈 수가 없는 사람이었지만 이제부터는 나 정도는 넉넉하게 품고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이 정도 감정은 충분히 다룰 수 있으며 스스로도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고. 나 스스로를 격려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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