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는 아우성은 여기였구나!
오늘 몇 시 되면 와?
12시쯤 갈 것 같아.
어제 부탁한 거 잊어버리지 않았지?
그럼, 당연히 기억하고 있지.
제발, 부디, 꼭! 나도 대출받고 싶단 말이야.
대출업체 광고? 아니면 007 첩보영화? 둘 다 아니다. 이 대화는 초등학교 1학년 딸과의 대화이다. 아이가 꼭 받고 싶은 대출은 현금이 아닌 현물로, 바로 학교 도서관의 “인. 기. 도. 서”.
아이가 입학한 후 학부모를 대상으로 한 몇몇 봉사활동에 참여 중이다. 워킹맘이었기에 아이의 어린이집이나 유치원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주지 못한 미안함과 이 시기를 지나면 언제 또 이런 활동을 해주겠나-하는 마음에서 1학년 학부모가 해당하는 활동을 모두 신청했다. 그중 아이의 호응이 가장 좋은 것은 학교 도서관의 학부모 사서. 나 역시도 책쟁이로써 사심을 섞어 시작한 일인데, 나만큼 책을 좋아하는 아이에게는 더없이 기쁜 일인가보다. 하긴 유치원보다 학교가 좋은 점을 물으면 “교실 바로 옆에 도서관이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아이다. (아이의 학급이 도서관과 맞닿아 있다.)
처음에는 그저 엄마가 학교에 그것도 도서관에 온다는 것만으로 기뻐했는데, 회차가 반복되다 보니 약간의 부작용(?)이 생겼다. 학교 도서관 도서목록에는 존재하지만, 실물은 만나기도 어려운 인기도서들이 반납함에 들어오면 대신 대출을 해달라는 청탁인 것! 이 사건(?)의 시작은 두 번째 봉사하던 날, 사서 선생님의 권유로 시작되었다.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이미 너덜너덜한 한 책을 주시며 “어머니, 찹쌀이가 며칠째 기다리던 책이에요. 빌려 가세요.”하셨던 것. 그 책을 본 아이의 반응? 말해 뭘 해. 학교가 떠나가라 환호하여 아이의 입을 막아야 했다. 그 후에도 한두 번, 반납된 책을 정리하며 아이가 보고 싶어 했던 책을 대출해다 주었더니 어느새 청탁하는 도서 리스트가 생겨버렸다.
그러나 인기도서는 우리 아이만의 희망 사항이 아니지 않나. 얼굴이 두껍지 않은 엄마는 아이가 원한다고 하여 그것을 챙겨놓는 뻔뻔함이 부족하다. 3시간 남짓의 봉사활동 시간에는 많은 아이가 “00남매 들어왔어요?”, “00박사 어디 있어요?”, “*냥 어느 칸에 있어요?, “수상한 00 어디 있어요?” 등의 질문을 하며 분주한 발걸음을 옮기는데, 홀랑 챙겨놓자니 눈치가 보여 아이의 청탁리스트 중 딱 한 권만 챙겨준다.
인기 많은 책과 아이들의 희망도서를 더 구매하였음에도 인기도서들은 그야말로 불티가 났다. 반납된 도서를 채 책꽂이에 꽂기도 전에 “그거 저 주시면 안 돼요?”하고 눈을 반짝이는 아이들이 줄을 서는 것. 그런 아이들이 사랑스럽기도 하고 웃기기도 한 것은 나뿐 아니었던지, 사서 선생님은 인기도서 칸을 만들어두셨다. 물론 그 칸은 “인기도서”라는 문패만 있을 뿐, 거주(?) 중인 책들은 없다. 아이들의 책상과 책가방에서 사랑을 받고 있으리.
한 가지 안타까운 점도 있다. 대출 전쟁에 참여하는 아이들은 대체로 1학년에서 4학년까지, 5학년이나 6학년 아이들은 도서관에 방문하는 경우도 적다. 책에 대한 사랑이 줄어든 것인지, 책을 볼 시간이 없는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떤 이유든 간에 안타까운 일임은 분명하다. 모든 아이가 조금 '덜' 바빠서, 책을 읽을 시간이 많으면 좋겠다. 아이들이 조금 '더' 심심해서 책의 재미를 느낄 겨를이 있으면 좋겠다.
사랑스럽고 대견한 전쟁이 벌어지는 이곳은 도서관. 책꽂이의 책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며 부디 아이들의 대출 전쟁이 오래오래 이어지기를, 또 그렇게 키워낸 책 사랑이 다른 책들도 다양하게 만나게 하는 촉매가 되기를, 고학년이 되어도- 어른이 되어도- 도서관의 문턱이 닳도록 드나드는 아이들이 되기를 바라본다. 아이들의 책 사랑이 오래오래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아 사랑받지 못하는 책들까지 반짝반짝 닦아주었다. “너희들도 저렇게 바쁠 날이 올 거야.”하고 토닥여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