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음 앞에서 인간이 지닌 힘을 찾는
니시 가나코, 이란 테헤란에서 태어나 이집트 카이로와 일본 오사카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2004년 <아오이>로 등단, 2005년 <사쿠라>로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했다. 이후 <사라바> 등 여러 작품으로 제152히 나오키상 등 일본 내 알만한 상은 모조리 휩쓸었다. 국내 번역 본으로는 <사라바>, <물방울>, <우주를 뿌리는 소녀> 등 다수의 작품이 있다.
일본 유명 소설가의 첫 에세이라는 점이 끌렸다. 모든 처음이 다 그렇듯 소설 집필과는 다른 그의 감정이 담겼으리라 생각하면서 책장을 열었다.
대상포진으로 오진되었던 거미 물린 흔적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홍법대사라면 사족을 못쓰는 외할머니가 그와 그의 엄마의 꿈에 나오고 결국 그의 유방암을 확진 받는 것으로 연결되는 동안 얼마간 조마조마했던 나와는 달리 그는 일기 속에서만 두려워 하는 느낌이 들었다. ‘암’은 그에겐 집 안 곳곳에 존재하는 ‘거미‘정도 였을까? 어떻게 이렇게 담담하게 일상이 이어질 수 있는지 의아할 정도다.
캐나다의 더디고 불친절하고 신속하지 않은 의료 시스템을 돌려 까는 듯한 그의 항암 치료 과정을 보자니 한국의 건강보험이나 의료 시스템이 달리 보이기도 한다. 한국은 돈만 많으면 천국이라는 말이 맞을지도. 중요한 건 내가 돈이 없다는 거, 그래서 나로서는 천국과는 아주 먼 곳일 뿐이다. 더군다나 백수가 됐으니 이제 곧 지옥이 펼쳐지겠군.
그는 암 치료 과정에서 겪는 격동적인 감정을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 과정에서 가족과 지인들과의 마음을 나누며 얻게 되는 치유의 시간을 보여준다. 아프다고 징징대며 독자를 피로하게 하지 않아서 더 많이 공감된달까.
암 환자라고 해서 즐거움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간호사 크리스티의 말을 듣는 그의 기분이 어땠을까? 짐작이 되지 않았는데도 울컥해져 버렸다. 분명 일상이 한순간에 변하는 것이란 상상할 수 없는 무력감이 동반된다. 할 수 있는 것들이 할 수 없는 것이 되는 경험은 두렵기도 하고. 30여 년 전 목이 부러졌던 그때의 나도 그랬다. 그래서 그의 감정과는 별개로 크리스티의 말에 온 몸의 세포 하나 하나가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그저 그들의 존재 자체가 우리와 양립 하지 못 할 뿐이다. 둘 중 하나가 살아남으려고 할 때 한쪽이 상처를 입게 된다.” 66쪽
암 자체의 생명력을, 생존에 사활을 걸기 때문에 암은 전이해야 하고 인간의 몸 역시 살아 남으려고 의학의 힘을 빌린다는 그의 표현이 왠지 서글프게 느껴졌지만 공감되고 말았다.
펄떡이는 생명력을 느낄 수는 없지만 밴쿠버의 삶은 분명 활력이 넘쳤다. 암에 걸리고 나서야 죽음을 생각하고 거미로 분한 외할머니를 기억해 내고 가족들의 죽음을 기억한다. 기억 속에 존재하는 그들의 생동감이 전해지도록 말이다.
이게 무슨 캐나다 의료 시스템에 대한 르포는 아니지만 읽으면 읽을 수록 입이 떡 벌어진다. 아이가 아파서 열이 나면 장시간 대기를 대비해 커피 포트에 커피를 담고 주먹밥을 싼다니…. 한국보다 더 느리고 불친절한 의료 시스템도 있구나 싶어(어디나 의대 수업은 불친절을 가르치나 했었다) 웃음이 터졌다.
사실 더 읽다 보면 자신만의 일에 대한 책임이나 태도는 꽤나 합리적이라는 걸 이해하게 되지만, 어쨌든 의료 시스템의 현실은 몸은 고칠지언정 마음은 엄청 다쳐서 나오는 곳이 병원이라는 생각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소설가라 그런지 새어 나오는 감탄을 숨길 수 없는 문장을 만나곤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게 된다. 마치 시공간이 멈춘 듯 몰입하게 만든다.
“그녀는 누구에게나 마음이 열려 있고 호기심이 왕성에서 마치 태양을 향해 자라나는, 꽃송이가 큼직한 꽃 같았다.” 111쪽
오도독, 오도독, 오도독. 에키가, 그와 함께 살고 있는 고양이가 삶의 의지를 보이자 울음을 터트렸다는 그의 말에 덩달아 울음이 터진다. 에키가 보여준 삶의 의지가 어쩌면 지금 자신에게 꼭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한 건 아닐까, 마음이 아렸다. 그는 그래서 에키와 함께 더 오래 건강하게 살고 싶었으리라.
가슴이 꽤나 먹먹해서 한참 생각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드는 글이 있다. 항암 치료의 막바지에 코로나 확진에서 그가 느꼈을 좌절감의 무게를 공감하고 말았다.
‘설마 내가’라는 감정에서 ‘어째서 내가’라는 감정에 휩싸이게 된 순간 동반된 자기 혐오를 그는 감당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느닷없는 장애인이 되고 ‘왜 내가’, ‘하필 내가’라며 분노에 휩싸여 있던 그때가 몸서리치게 떠올랐다. 나는 자기혐오의 감정이었을까? 나는 여전히 ‘어쩌다’쯤이다.
그리고 깜깜한 공간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빛에 순간 시야가 하얗게 사라질 때처럼 머리를 띵하게 한 문장이 있다.
“가끔 내가 ‘나는 암 환자’라는 카드를 너무 방패막이로 삼고 있지 않나 생각할 때도 있어.” 157쪽
동병상련을 겪고 있는 코니와의 대화에서 문득 나는 내가 갖게 된 ‘장애’라는 카드를 그렇게 사용하고 있지는 않았었나 싶은 자기 검열이 돼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간혹 복지관에서 겪는 일중에 ‘장애’를 방패막이로 혹은 무기로 삼는 사람들을 종종 마주하는 일도, 역시 씁쓸해진다.
자꾸 그의 문장을 옮겨 오는 것 같지만, 참을 수 없다. 너무 멋지고 아름답고 편견을 깨고 인식을 바꾸게 된다. 그래서 기록하고 싶은 욕망을 멈출 수 없다.
“우리는 어떤 상태이든지 자신의 몸으로 살아간다. 무언가를 절제하거나 무언가를 더 한다고 해도 그 몸은 틀림 없이 진짜 자신의 것이다. 나의 진짜 몸을 누군가의 판단에 맡겨서는 안 된다. 앞으로도 나만의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는 내 목소리에 귀를 기울 이 기로 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이제 유방도 유두도 필요하지 않다고 말하고 있었다.” 166쪽
두 가슴을 절제해야 하는 선택지 앞에서 '유두'를 살릴 것인가란 여성으로서의 가슴 재건에 대한 질문은 꽤나 의미심장하다. 유두는 남녀에게 모두 있는 것이고 그것이 여성과 남성의 구분적 의미가 아닌 기능적 차이라면 그 기능을 다한 이상 유지할 필요는 사실상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그의 말에 일말의 통쾌함이 느껴질 정도로 공감됐다.
한편, 이란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다시 캐나다로 이주한 그는 삶의 여정에서 자신이 ‘일본인’이라는 자각을 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고 회고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주류에서 벗어난, 아니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이방인으로서의 소수자였음을 잊고 살았다는 것의 의미이기도 했다.
그리고 2021년 3월, 일본 나고야에서 데이트 폭력에 시달리다 사망한 스리랑카 유학생 위시마 산다말리의 이야기를 전하며 ‘불법 체류’라는 제도에 묻혀버린 일본이 외국인 소수자의 인권에 대한 태도를 고발한다. 더하면 더했지 한국이라고 다를까. 우리는 왜 소수자의 인권에는 그토록 가혹한가.
이런 이민자 혹은 이방인으로서 그가 겪었던 그런 정체성의 혼란은 나 역시 겪었던 것과 궤를 같이 한다. 중도 장애인이란 소수자의 삶은 주류에 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 받는 일이라서 그의 감정이 고스란히 전이된다. 그렇다. ‘내’가 ‘나’로 살아 가는 데는 ‘잘못’되었다는 개념은 없으니까. 그리고 그가 덧붙인 ‘보이는 것’과 관계 없이 나는 나다. 어쩐지 바닥에 눌어붙어 버티던 자존감이 임계점을 넘어 서는 기분이 들었다.
그 자신과 그물망처럼 연결된 환자들, 암을 이겨냈거나 이겨내는 중인 사람들을 이야기를 통해 삶의 태도와 죽음을 대하는 자세를 나누는 이 책은 다양한 삶의 모습에서 저마다가 갖는 고유한 인간적인 감정과 감각들 공감하게 되는 아주 따뜻한 이야기다. 타인을 통해 ‘나’라는 감각을 선명하게 느껴보고 싶다면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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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완독하고 솔직하게 쓴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