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장거리 비행여파로 우리 모두 숙소에서 바로 곯아떨어졌다. 눈을 뜨니 현지 시간으로 새벽 4시다.
오늘부터 본격적으로 런던을 돌아본다. 빠른 기상 덕분으로 이른 여행을 시작했다. 영국은 가든의 나라다. 국민 모두가 정원을 사랑해서 잘 가꾼 숲이 도심 곳곳에 깃들어 있다. 런던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인 가든 탐방으로 여행의 문을 연다.
어슴프레 밝아오는 아침에 집을 나서니 한적한 교외의 풍경이 보인다. 키가 큰 거목들이 줄 지어 서있는 가로수길이 인상적이다. 창문이 가득한 집들이 아기자기하게 반듯이 이어진 낯선 모습이 여기가 외국인 것을 상기시킨다.동이 터오는 미묘함이 주는 신비함이 퍼진다.
숙소 인근 풍경
가든에서 브런치로 먹을 요량으로 슈퍼에서 간단한 요깃거리로 치아바타 세트를 샀다. 과일과 음료가 곁들여져 있다. 유럽은 과일이 상대적으로 저렴하다. 과일을 좋아하는 우리 부부의 여행의 즐거움 중 하나다. 올리브와 망고에 감자칩을 선택해서 기차역으로 향했다. 가져온 옷 중에 따뜻하게 입었다고 했지만 확실히 촉감으로 느껴지는 바람에 닭살이 돋는다. 감기가 들면 안 되는 데 걱정이 될 정도였다.
런던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7파운드를 내고 오이스터 카드를 구매해서 충전해서 써야 한다. 7 파운드는 환불이 안되지만 건건이 비용을 내는 것보다 저렴해서 선택의 여지가 없다. 기차역에서 살 수 없어서 숍을 찾아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선진국이라 해도 불합리한 점이 의외로 많다.
기차역에 들어서자 햇살이 눈부시게 빛난다. 여행을 축복해 주는 듯 따사로움이 마음을 다독여준다. 한적한 기차는 파리의 전철과 다르게 우리나라만큼 깔끔했다.
New Malden Station
기차내부
온통 숲으로 둘러싸인 창밖 풍경에 가슴이 트이고 눈이 시원하다. 구릉도 전혀 없이 평평한 길이 이어진다. 숲 속에 드문드문 하얀 집들이 어미 품속에 깃든 아기새 같다.
규모가 큰 워털루역에 정차해서 런던 도심에 들어선다. 도로에 신호등이 있지만 자유롭게 횡단한다. 차보다 사람이 먼저라는 이들의 인식이 자유로움을 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런던아이가 보인다. 런던 대부분을 조망할 수 있다는데 생각만큼은 높아 보이지 않았다. 그것보다는 템즈강 건너 국회의사당 건물과 빅벤의 위용에 탄성이 터진다. 화면으로만 접하던 눈에 익은 광경을 맨눈으로 보게 되는 실재의 현장감에 저절로 압도당한다. 웨스터민스터 다리를 건너 가까이 보는 건물은 그들의 유구한 전통과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용이 고스란히 전해온다. 세련되면서 엄격하고 화려하면서 강직하고 거대하면서 꽉 채워 보인다.
워털루 역
런던 아이 와 템즈강
강가를 달리는 이들이 한 둘이 아니다. 가든에도 뛰는 이들이 많았다. 영국인들이 조깅을 이토록 열렬히 사랑한다는 점이 참 맘에 든다. 함께 뛰어보고 싶은 심정이다. 도심에도 자전거를 타는 이들도 많았는데 그들의 삶이 참 건전하게 보여 부러운 마음도 들었다.
템즈강과 국회의사당, 빅벤
세인트 제임스 가든을 찾았다. 와우! 가든이란 이런 것이다. 엄청나게 우람한 플라타너스 거목들이 수도 없이 자라고 있는 바탕에 진한 초록빛이 넘치는 잔디가 눈이 닿는 곳 어디나 깔려있다. 규모도 엄청나다. 광활한 넓이가 주는 넉넉함이 여유로움을 더한다. 더구나 숲은 정적만이 흐르지 않았다. 청설모가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호수에는 고니와 야생 거위와 오리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살아 숨 쉬는 자연이었다. 거위들은 사람들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제가 주인인 듯 짐짓 여유롭다.
세인트 제임스 가든
벤치에 앉아 찬기운에 몸을 움츠리면서도 눈앞에 펼쳐지는 생생하고 풋풋한 자연에 감동하며 몸의 필요를 채운다. 치아바타도 적당히 먹을만했고 올리브와 망고는 맘에 쏙 들었다.
청설모,야생오리,야생거위
숲을 둘러보는 데 눈에 익은 마로니에와 밤나무가 보여 반가운 마음이었지만 처음 보는 수종도 많았다. 숲해설을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서 답답함이 컸다.배우고 익히다 보면 언젠가는 막힘이 없이 술술 읽히는 시간이 올 것이다.
나무들은 아무런 속박이 없이 한없이 자유롭게 자라는 듯했다. 저마다 제가 클 수 있는 한도까지 가지를 하늘 높이 뻗으며 마음껏 자라났다. 나무도 터전을 잘 만나 자유가 넘치는 민주국가답게 자유를 구가하는 것이다.
세이트제임스가든
숲길을 따라 걷다 보니 황금빛이 반짝이는 궁전이 보인다. 영국 왕실의 버킹엄궁이 바로 인접해 있었다. 우연한 발견에 자다가 떡이 생긴 듯 신이 난다. 붉은 제라늄이 초록 잔디와 어우러진 꽃밭이 기하학적으로 구획되어 모던하고 단정하다. 궁전 앞 광장의 조각도 예사롭지 않다.꼭대기의 황금빛 우아한 조각이 멀리서 눈길을 끌고 아래로는 사자 곁에 선 건장한 남성 조각이 살아있는 듯 생생하다.
버킹엄궁
버킹엄궁 정원
버킹엄궁 정문 조각
궁전 정문이 쇠창살로 단단하게 금단의 장소임을 알리지만 세련된 디자인과 위엄을 지닌 장식이 왕가의 위용을 보인다. 입구의 등도 화려하면서 격조가 있다.
버킹엄궁 문
소문대로 영국 근위병이 트레이드 마크인 검은 털모자와 붉은 제복이 당당하다. 관광객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평소에는 꽤 많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나오다 입구에 불을 밝히는 전등이 기품이 있고 디자인도 세련되어 눈길을 끈다. 영국 황실의 뛰어난 미적 수준을 보여주는 듯하다.
주변에 English Tea로 유명한 찻집을 찾아갔다. 9시 못되어서 갔는데 개점 전이어서 기다려야 했다. 소문이 났는지 우리 말고도 다른 이들도 이미 대기 중이었다.
찻집
꽃을 사랑하는 그들답게 거리의 가게도 싱그러운 생화가 머리맡에서 꽃을 한가득 피우고 있다. 적절한 색과 꽃모양이 어우러져 생기를 북돋운다. 제라늄과 페튜니아 그리고 매발톱을 닮은 꽃이주인공이다. 공중에 매단 화분 같은데 저렇게 싱싱하게 관리가 잘되는 게 신기했다.
시간이 되어 찻집에 앉아 영국식 Tea문화를 경험한다. 나는 홍차에 밀크로 스콘을 겸하여 차를 즐겼다.
오전만의 많지 않은 시간에도 많은 것을 보고 느낀다. 새로운 이미지들이 머리를 가득 채운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르게 몰입이 이루어진다. 머리도 쉴 사이가 없지만 몸도 지친다. 많이 걸어 발바닥이 욱신거린다. 그런데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