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대한 분량의 책이다. 600쪽 분량으로 세 권이나 된다. 책을 빨리 읽는 편인데도 진도가 잘 나가지 않았다. 상세한 심리묘사가 내용의 대부분을 차지해서 읽기가 어렵다. 1권을 더디게 읽고나서야 비로소 줄거리에 빠져들어 읽는 속도가 났다.
한 번 읽어서는 이해하기 쉽지 않지만 책을 읽은 소감은 러시아의 진면목을 맛보았다는 것이다. 생생하고 내밀하게 그려 낸 러시아를 가슴으로 느꼈다. 낭만과 광기 그리고 경건과 세속, 고귀함과 저속함 그리고 빛과 어두움의 절묘한 조화가 러시아 문화의 밑바탕에 흐른다.
지극히 종교적인 그들의 삶도 엿볼 수 있다. 소설 전반을 관통하는 것이 러시아 정교다. 러시아 정교는 대중들에게는 결코 떼어낼 수 없는 삶의 근간이자 바탕이다. 광신적이고 미신적인 면모를 보이기도 하지만 종교가 없는 그들의 삶은 상상하기 어렵다. 작가는 기독교의 희생과 사랑을 전면에 내세운다."한 알의 밀이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성경 구절의 서문이 이를 반증한다.
등장인물들은 인간 본성의 다양한 측면을 대표한다. 아버지 표도르는 속물적 인간이다. 물욕과 정욕만을 추구한다. 그는 자신의 욕망을 따라 살며 자녀조차도 유기하는 몰인정한 인간이다.
그 반대편에는 막내 알렉세이가 있다. 그는 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소설을 이끌어 간다. 그는 수도사로 사람들에게 무한한 사랑과 동정과 연민을 가진 따스한 심성의 소유자다. 그를 시기 질투하는 적들이 있지만 결국은 모든 이들이 그를 사랑하게 되는 존재다. 악인들에게는 자신을 돌아보게 만들고 스스로 양심을 돌아보게 해서 누구라도 사랑의 마음을 불러일으키는 정말로 사랑스러운 인물이다.
큰 형 드미트리는 감정적이고 감성적이며 즉흥적이고 충동적인 인물이다. 한 여인을 두고 아버지와 다투면서 극단적인 삶의 행태를 보인다. 그는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누명을 쓰고 이를 둘러싼 치열한 법리 논쟁이 벌어지지만 모든 정황이 그를 살인자로 몰아가고 결국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둘째 이반은 지극히 이성적이다. 냉정하리만큼 차가운 심성의 소유자이고 신의 존재를 부정하는 비관론자다. 그가 평소 미워했던 아버지의 죽음을 스메르자코프로 하여금 교사했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한다.
사생아인 스메르자코프는 출생부터 비천하게 태어나 아들로 인정도 받지 못하고 종으로 살면서 뒤틀리고 비틀어진 사고를 지니며 표도르를 죽인 악행을 저지른다. 드미트리에게 누명을 씌우고 자살하며 생을 마치는 순간까지 철저하게 그 사실을 은폐하는 악인이다.
알렉세이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은 조시마 장로다. 그는 성자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격식과 형식에 얽매인 종교의 허울이 없이 진심으로 사람들을 사랑한다. 알렉세이를 깊이 사랑하여 그로 하여금 환속해서 사람들 속에서 살아가도록 유언을 남긴다. 알렉세이는 세상에 나가서도 구도자의 삶을 살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은 많은 반향을 불러온다. 살아생전에 성자로서 추앙받았지만 사흘도 못되어 시체가 부패한 냄새가 진동했기 때문에 기적을 바랐던 많은 이들은 실망하고 허탈해한다. 대중들은 곧바로 그를 버리고 다른 신앙대상을 찾아 떠난다.
이 소설에서 여성들은 주인공이 되지 못한다. 그저 누구의 연인이고 어머니이고 아내일 따름이다. 드미트리와 아버지 표도르의 여인이었던 그루센카는 극단적인 면모를 지녔다. 남자들을 유혹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마음에 품은 남자가 있는 순정을 지녔다. 결국 드미트리의 사랑을 깨닫고 그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각오를 한다. 등장하는 여인들은 질투와 변덕 그리고 남의 일에 큰 호기심을 갖는 그저 그런 여자일 뿐이다.
돈도 이 소설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아버지 표도르는 돈에 연연하지만 신기하게도 나머지 주인공들은 물질에그다지 관심이 없다. 이기적이라고 볼 수 있는 둘째 이반조차 형을 구명하기 위해 자신이 물려받은 재산을 아끼지 않는다. 알렉세이는 말할 것도 없다. 악의 화신인 스메르자코프도 3천 루블을 훔치지만 이반에게 돌려줄 정도로 돈에 집착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는 서두에 언급했듯이 삶에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들려준다. 속물이었던 표도르도 죽기까지 그루센카에 대한 사랑을 갈구했었다. 드미트리가 집착했던 것은 오로지 사랑이었다. 그 사랑의 일념이 처음부터 끝까지 이어지고 비록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결국 사랑을 쟁취하며 그루센카도 진정한 사랑을 깨닫게 된다. 이반도 한 때 드미트리의 약혼녀였던 카체리나의 사랑을 얻게 된다. 그는 냉소주의자였지만 말미에는 형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는 형제에 대한 사랑을 보여준다. 알렉세이에게는 서로 사랑하는 순수한 리자가 있고 어린 소년들에게도 사랑으로 큰 영향을 끼친다. 병들어 요절하는 일루샤에게 진정한 위로와 소망을 안기고 조숙한 꼴랴의 사랑도 한 몸에 받는다. 일루샤의 죽음으로 못된 소년들이 진실한 마음으로 참된 친구가 되는데 이 구심점은 바로 알렉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