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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디디 Aug 01. 2019

한강진행 열차는 한강진까지만 간다

출근길에 찾아든 어떤 기억


어제부로 회사에 출근한 지 딱 한 달이 지났다. 합정에서 안암까지 통학도 힘들었는데, 삼성역까지 어떻게 매일 아침 출근을 하지? 싶었던 걱정이 무색하게도 회사 생활에 완벽히 적응을 마쳤다. 직장 동료들과 얘기를 나눠 보니 1시간 출근길은 먼 것도 아니었다. 돈 주면 역시 안 될 일이 없다.

매일 아침 출근길, 합정에서 당산 방향으로 가는 열차를 탄다. 그 열차를 타고 40분이 넘는 시간을 달리면 회사가 있는 삼성역에 도착한다. 오늘은 특별히 평소보다 조금 이른 시간에 나와 원래 타던 열차보다 이른 열차를 탔다. 그런데 아뿔싸, 하필이면 그 열차가 신도림행이었던 거다. 결국 회사에는 평소보다 더 늦게 도착했다.

서울 사람이라면 'ㅇㅇ행'열차의 의미를 알고 있을 것이다. 신도림행 열차는 신도림까지만 간다는 뜻이다. 이 뜻을 몰랐던 나는, '신도림행 열차'를 '남쪽으로 가는 열차'라는 뜻의 '남행 열차'와 비슷한 것이라 이해했다. 그러니 신도림행 열차는 신도림 방향으로, 신도림을 지나 끝없이 쭉 가야만 했다. 내가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처음 서울 생활을 시작한 대학교 새내기 때다. 자정이 넘은 늦은 밤, 응암순환행 열차를 타야 했던 걸 실수로 한강진행 열차를 탄 적이 있었다. 따지고 보면 실수는 아니었다. 나는 그저 항상 열차를 타던 플랫폼에서 항상 타던 열차를 탔을 뿐이니까. 나의 귀갓길은 안암역에서 출발하여 합정역에서 끝나고, 한강진역은 딱 그 중간에 있다. 평소처럼 합정역에서 내릴 계획으로 텅 빈 열차에서 휴대폰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여기가 종점이니까 내리라는 것이 아닌가. 막차 시간에 가까운 늦은 밤이었기 때문에, 나는 열차에 무슨 문제가 생겨서 더 이상 운행하지 않는 줄로만 알았다. 늦은 밤 한강진역 플랫폼에 덩그러니 남겨진 그때의 감정은 한 마디로 '막막함' 그 자체. 밖으로 나와서 생전 처음 보는 거리를 무작정 걷다가 결국 집까지 택시를 탔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다음 열차가 다시 오는 줄도 모르고.


오늘 아침 외선순환 열차인 줄 알고 탄 신도림행 열차가 갑자기 나를 신도림역에 토해냈을 때, 그러나 약간의 짜증 섞인 욕과 함께 자연스레 다음 열차를 타러 이동했을 때, 문득 그날 한강진역의 밤이 떠오른 것은 왜일까.

보잘것없는 인생의 철로가 막다른 길에 들어선 적이 있다. 나를 목적지로 데려다줄 것이라 굳게 믿었던 열차가 갑자기 내리라고 으름장을 놓을 때 말이다. 그럴 때면 참 억울하고 막막해진다. 10년을 꿔온 꿈이 내 길이 아니란 걸 직감적으로 알게 되었을 때, 여기까지만 오면 다 되었다 생각했는데 막상 와보니 더 큰 산을 넘어야 할 때. 그런 문턱에 이를 때마다 나는 스스로가 참 싫어지곤 했다. 꼭 내가 모자라서 이런 일이 생긴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조금만 기다리면 다음 열차가 올 텐데.' 낯선 순간마다 그 사실을 알았더라면 조금은 스스로를 덜 탓할 수 있었을까.

그날의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어렸고 조금 더 약했다. 이 길이 틀렸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잔뜩 억울해져서 툴툴거리면서도 역무원에게 '이게 막차예요?'하고 물어볼 줄 몰랐다. 그러다가도 지상으로 올라와 적막한 이태원의 밤하늘을 접하고는 서늘함에 마음이 저릿해져 기분과 어울리는 노래를 찾았다. 오랫동안 그날을 내 무지에서 비롯한 부끄러운 일화로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을 잊지 못하는 진짜 이유는 아마 그때 그 노래가 하늘과 너무 잘 어울렸어서, 일지도 모른다.

지금의 나는 내 인생이 보잘것없을 수 있다는 것을 적당히 인정할 줄 안다. 매일의 일과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되었고 그건 아마 사람들이 말하는 '철이 든다'는 것이겠다. 잠깐의 회상으로 스쳐 보낼 수도 있는 생각을 이렇게 글로 옮김은 그날의 내가 조금 보고프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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