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라는 세계(김소영) X 코로나로 아이들이 잃은 것들(김현수)]
( ) 보아야 예쁘다.
( ) 보아야 아름답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풀꽃’
국민 애송시 ‘풀꽃’을 지을 때, 나태주 시인은 저렇게 빈칸을 두고 한참 고민했다고 한다.
‘언제 보아야 예쁠까, 어떻게 보아야 아름다울까.’ 하는 고민이 쌓여갈 무렵, 시인은 두 단어를 집어든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아름답다.
너도 그렇다. - 나태주 ‘풀꽃’
그래서 그런지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에는 자세히 그리고 오래 바라본 시선이 담겨 있다.
오늘 함께 나눌 두 책은 그 따뜻한 시선으로 특별히 ‘어린이’를 바라본다.
김소영 작가님의 에세이, ‘어린이라는 세계’와 김현수 정신건강전문의의 ‘코로나로 아이들이 잃은 것들.’
“어린 시절의 한 부분을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을 아는 것이 저의 큰 영광입니다.”
어린이 독서 교실을 운영하는 김소영 작가님의 머릿말을 읽고 흠칫했다. 어린이들을 알게 되어 ‘영광’이라니..! 저자가 그린 커다란 원이 너무 과한 것 아닐까 조심스러웠으나, 이는 기우에 불과했다. 책장을 넘기면서 어떤 글에서는 깔깔 웃고, 다른 글에서는 핑-하고 눈물을 훔치기도 하면서 저자가 ‘어린이’를 보며 건네는 따스함을 느꼈다.
내가 받은 그 따스함이 무엇이었을까 구체화해보니
‘어린이의 품위’를 지키려는 ‘어른의 품위’였다.
저자는 서점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한다. 아빠와 실랑이 끝에 색칠공부 책을 들고 계산대에 든 어린이는 ‘계산하게 아빠 줘’라는 말에도 고개만 가로짓고 있다. 혹시 아빠의 마음이 변해 책을 사주지 않을까 걱정하는 걸까 생각할 때 저자는 나이 지긋한 사장님의 잊지 못할 말을 듣게 된다.
“아유, 귀여워 몇 살이야? 아빠 드려야지.”
사장님은 그렇게 말씀할 수도 있었지만 어린이의 눈을 들여다보며 정중하게 묻는다.
“따로 계산해 드릴까요?”
저자는 그때부터 낯선 어린이에게는 상황 불문하고 존댓말을 쓴다고 한다. 상대가 어른이라면 하지 않을 말이나 행동은 하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윗집 어린이에게 “안녕하세요?”라고 먼저 인사하고,
마트 무빙워크에서 장난치는 어린이를 보면 아무리 마음이 급해도 “위험해요! 다쳐요!”라고 존댓말로 제지한다.
문을 붙잡아 준 어린이에게 “감사합니다”라고 하고,
강연장에 어머니와 함께 온 어린이에게 인사를 받으면 “실례지만 이름이 뭐예요?” 하고 묻는다. (p.193)
이렇게 어린이에게 반말이 아닌 존댓말을 사용할 때 자기 목소리가 얼마나 어른스럽게 들리는지(!) 알게 된다고 한다. 어린이를 존중한다는 의지가 명확히 표현되는 순간, 어른의 여유가 자연스럽게 흘러 나오기 때문이다. 서로 존댓말을 쓰는 사회적 대화를 어린이도 사양하지 않는다. 마치 그런 대화가 익숙하다는 듯 살짝 긴장하면서도 더욱 예의 바르게 대답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어떤 어린이는 내 인사에 야구 모자를 살짝 들어 올리며 “네, 안녕하세요”라고 답하기도 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 저절로 얼굴이 분홍색이 되고 입꼬리가 올라간다. 그럴 때 조심해야 한다.
절대로 귀여워하는 표정을 지으면 안 된다. 매번 대단한 자제력을 요구하는 일이지만 할 수 있다. 우리는 어른이니까. (p.194)
어린이를 사랑스럽게 보되, 우습게 여기지 않는 기분 좋은 긴장감이랄까.
저자는 이외에도 어린이와 오랫동안 함께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어린이라는 세계에 담긴 환대와 위로를 소개한다. 그 이야기들이 유독 와닿는 이유는 우리 모두가 경험한 ‘어린이’라는 시절을 향해 있어서 그런 것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이야기들을 읽다보면 자연스레 ‘어른이라는 세계’를 떠올리게 된다.
하준이는 ‘정글짐 술래잡기’하는 방법을 내게 가르쳐 주었다.
“떨어져도 술래, 잡혀도 술래예요. 다섯 명이나 여섯 명이 하는 게 제일 좋아요. 더 많으면 정신 없고, 더 적으면 심심해요.”
나는 또 걱정을 버리지 못하고 물었다.
“떨어져서 다치면 어떡해?”
그러자 하준이는 웃는 얼굴로 나를 안심시켰다.
“밑에 모래 있으면 떨어져도 안 아파요.”
-그렇지, 모래가 있었다. 놀이터의 모래 때문에 뛰기 어렵고, 모래가 자꾸만 신발 속에 들어가 불편하다고만 생각했는데.
하준이는 그런 모래를 믿고, 떨어져도 다칠 걱정 없이 아찔한 정글짐을 올랐던 것이다. 나는 마치 격언인 것처럼, 하준이의 말을 그대로 외웠다.
“밑에 모래 있으면 떨어져도 안 아파요.” 이 말을 떠올릴 때마다 어른의 역할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된다. (p.62-63)
두번째 책의 저자 김현수 전문의는 첫 발령지인 ‘소년교도소’에서 소년들을 만나며 의업을 시작하셨다. 이 분의 이름을 알게 된건 학생들이 갖고 있는 ‘공부상처’에 대한 연수를 들을 때였다. ‘어린이라는 세계’를 세심하게 살피는 어른이라는 인상을 받았었다. (지금은 ‘서울시 자살예방센터장’과 ‘서울시 코로나19 심리지원단’ 단장을 맡고 있다고 하신다.)
바이러스가 아이들 몸을 어른들 몸만큼 파괴하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아이들 미래를 파괴할 수는 있다.
-제이슨 드팔(작가, 기자)
코로나로 사회의 많은 것들이 파괴된 오늘, 저자는 코로나가 찾아온 어린이라는 세계에 주목한다.
아이들이 근본적으로 불안해하는 아주 큰 이유 중 하나는 ‘본인이 자라지 않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성장하지 않고 있다는 것, 제자리에 머물러 있다는 것, 몸은 자라지만 머리와 마음은 자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아이에게 하는 것은 ‘아이의 발달이 정지되었다’고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p.69-70)
마스크를 쓰고, 학교에서 친구들도 자유롭게 만나지 못하는 와중에, 어렵지만 일상의 습관들을 지키기 위해 나름 애써온 것들이 의미 없다고 평가되는 것. 이처럼 아이들이 갖게 된 근본적인 불안함은 자신들의 성장이 멈췄음을 확인하는 것에 있다.
“집콕하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스마트폰 보면서 시간을 죽이며 지내니
누군 참 좋겠네.”
아이들을 향한 어른들의 비아냥거림은 더 나아가서 인생을 망치고 있다는 비난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코로나 시기를 이렇게 지내고 있으니 네 인생은 퇴보하고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 코로나 시기에 공부할 시간이 더 많이 생겼는데 그 시간을 유용하게 쓰지 못했다는 꾸중 (...)
사실 부모나 선생님이 그런 말을 아이에게 하고 있다는 것은 스스로를 비난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아이의 성장과 발달이 모두 아이의 책임만은 아니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어른들은 코로나 시기이지만 아이들이 잘 크고, 잘 자라나고, 이 어려움 속에서도 성장하고 있는 모습, 성공하고 있는 면모를 발견해주고 격려해야 합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 막내동생 생각이 많이 났다.
띠동갑이 넘게 차이나는 이 막둥이 녀석은, 다운증후군을 갖고 있는 조금 특별한 동생이다. 온라인 수업을 들을 때는 다리를 꼬며 지루해하다가도, 스마트폰 게임은 몇 시간이고 거뜬히 해낸다. 점점 늘어나는 스마트폰 사용량이 걱정되어, 게임 시간을 정하거나 동생이 하는 게임(브롤스타즈)을 30분만 같이 하고 이후에는 실내운동을 하는 등 여러 노력들을 해보고 있다. 그러나 실외 활동이 제한된 상태에서는 확실히 한계가 크다.
요즘은 그마저도 시큰둥해져서 '이제 게임 그만하고 다른 걸 하자'라는 제안은 감정 소모가 커지는 실랑이가 되어서야 끝이 난다. '너 그렇게 스마트폰만 해서 나중에 어떡하려고 그래.' 라는 말을 삼킬 때는 유독 따끔거린다. 아마 그 안에는 저자가 말했듯, 아이의 성장이 멈춰버린 것 같다는 데서 오는 자책이 섞여있겠지.
(오늘도 가정과 학교에서 '어린이라는 세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애쓰시는 부모님들과 선생님들께 새삼스레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
"같은 코로나 시대를 겪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불평등하고 다양한 중첩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았기에 섬세하고 입체적인 대책이 필요하다"는 김현수 저자의 생각을 읽으며 톨스토이의 문장이 떠올랐다.
작년 한 해를 돌아보면 쉽지 않은 시간들이 있었다. 온라인 수업은 동생에게 큰 장벽이었고,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추상적인 대상을 설명하며 마스크를 씌우는 것은 어려웠으며, 돌봄교실 마저 문을 닫는 기간에는 가족 중 누군가가 자신의 하루를 온전히 비워내야 했다.
그러나 동생을 둘러싼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를 커다란 불행으로 여기지 않을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주양육자인 어머님이 돌봄 목적의 휴가를 사용할 수 있는 고용안정성이 있었고, 지자체에서 지원하는 활동보조 선생님과 나를 비롯한 다른 가족 구성원들의 도움이 가능했으며, 2021년부터 2.5단계까지는 특수학교의 등교를 중단하지 않는 방안이 마련되었다. (마스크를 스스로 써주고, 아침에 학교 가자는 말에도 순순히 TV를 꺼주기 시작한 막내의 노력도 빼먹으면 섭섭할 것이다.)
동시에 이 고통스런 시기를 유난히 길게 보내고 있을 어떤 이들을 떠올린다. '코로나'라는 고통은 절대로 모두에게 같은 무게가 아니다. 그렇기에 이 아픔을 회복하고, 피해를 지원하는 방안들이 저자의 말대로 입체적이고 섬세했으면 좋겠다.
2.5단계가 시행된 작년 말, '목욕탕 영업'을 제한적으로 허용한 정부의 발표를 보고 의아했던 적이 있었다. 마스크도 없이 비말로 인한 감염 위험이 높을텐데.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는지 문의가 늘어나자, 방역당국은 설명한다.
"겨울철을 맞아 집에 온수가 나오지 않는 취약계층이 있을 수 있고 현장 노동자 등은 목욕시설이 없어 생활에서 피해를 볼 가능성이 있기에 제한적으로 운영하도록 한 것"
(2.5단계에도 목욕탕 운영 이유는..."취약층, 노동자 등 고려" - 연합뉴스(2020.12.10) )
나는 이러한 결정이 앞에서 이야기한 '입체적'이고, '섬세한'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집에서 온수를 이용할 수 없는 어떤 이의 겨울을 떠올리는 것.
이는 '자세히' 보고, '오래' 보아야 가능한 일이다.
백신 접종이 원활하게 진행되고,
모두가 마스크를 벗게 되었을 때.
수고하고 헌신하신 분들에게 감사하고,
서로의 감내의 끝을 기뻐할 때.
지난 과오들을 돌아보고,
사회의 상처들을 회복할 방안을 마련할 때.
여기 '어린이라는 세계'가 있었음을 모두가 기억했으면 좋겠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이 시기를 함께 견뎌냈던 어린이들의 마음도 들여다봤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 아이들이 코로나로 많은 것들을 상실한
'코로나 세대'로 남는 것이 아니라,
여러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를 함께 이겨낸
'코로나를 극복한 세대'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아름답다.
너도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