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료마가 간다(시바 료타로) X IB를 말한다(이혜정, 이범 외)]
‘이전 편’에서 이어집니다.
이거 완전 좋은 말 대잔치네.
임용시험을 준비할 때, ‘국가 교육과정 총론’을 외우다가 동기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홍익인간의 이념으로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 창의력과 비판력을 신장하며, 핵심역량들을 두루 갖춘 인재를 키워내는 교육...’ 초중등교육법으로 국가 차원에서 약속한 교육목표를 보면서 ‘좋은 말 대잔치’라니. 문서에 담긴 공허함을 익살스럽게 잘 꼬집은 것 같아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었다.
그 당시에는 묻지 않았지만 무엇이 저 목표들을 어딘가 공허하게 만들었을까 생각해보니, ‘평가의 부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교육학에서는 교육의 뼈대를 세우는 질문으로 세 가지를 꼽는다.
1)무엇을 가르칠 것인가 (교수학습 내용의 선정)
2)어떻게 가르칠 것인가 (교수학습 방법의 선정)
3)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교육평가 방법의 선정)
현행 2015 교육과정에서는 무엇을, 어떻게 가르칠지 과목마다, 학년마다 세세하게 선정되어 있다. 그에 비해 평가에 대한 설명은 간혹 있긴 하지만 중요도가 떨어진다. 교사의 자율성을 보장한다는 취지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수능’이라는 평가의 거대한 보스몹 앞에 다른 평가들이 잡몹이 되어버린 느낌이었다.
정리하면, “창의융합형 인재를 기르고 비판적 사고와 협동심을 기르는 교육을 해야 한다. 일단 수능부터 잘 치르고!”랄까.
창의력이, 협동심이, 4차 산업혁명에 대응할 수 있는 핵심역량이 아무리 중요하다고 말해도, 평가에 대한 고민의 부재 앞에서는 ‘좋은 말 대잔치’일 뿐인 셈이다.
어쩌면 그래서 ‘사카모토 료마’가 좋았는지도 모른다.
공허한 말잔치보다 묵묵한 걸음으로 필요한 변화들을 만들어내는 것이.
그가 칼의 시대에 ‘흑선’을 만난 사무라이가 아니라,
IB라는 ‘흑선’을 만난 교육부의 관료였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본 적이 있다.
나에게 남겼던 세 가지 점(이념이 아닌 이익, 정세의 변화를 읽는 통찰, 상상하게 만드는 힘)을 여전히 남기며
IB를 활용한 새로운 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지 않았을까. 이런 식으로 말이다.
앞서 말했듯, 2015 교육과정의 주요 목표는 ‘핵심역량의 신장’이다. 앞으로 아이들이 사회에 살아가면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6가지 역량 (공동체 역량, 자기관리 역량, 지식정보처리 역량, 창의적 사고 역량, 의사소통 역량, 심미적 감성 역량)을 기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교육의 평가(수능이나 중간 기말 지필고사)는 이러한 역량 향상을 중요시 여긴다고 말하기 조심스럽다.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학생들의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생각들을 ‘꺼내기’보다는, 얼마나 지식들을 많이 ‘집어넣었는지’ 확인하는 데 집중한다. 사실 도입 당시의 수능은 문항의 객관성이나 변별력 등에서 꽤나 좋은 도구였지만, ‘앞으로 미래 인재들을 양성하기에도 적절한가’라는 질문에 긍정적인 답변을 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수능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하자, ‘공정성’이라는 단어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수능이 우리 교육의 보스몹으로 자리 잡을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이 학생들의 미래를 준비하고, 핵심 역량을 기를 수 있어서가 아니라, ‘공정하게 변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대학입학시험은 동일한 문제를 풀고 그 점수로 수험생의 순위를 매기는 방식이었다. 사실, 문제의 출제방식과 배점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지는데도 일본에서는 같은 조건에서의 경쟁만을 공평하다고 여긴다. 같은 조건에서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불공평하다거나 심지어 부정 혹은 사기까지라고 생각한다. (...)
수십만 명 혹은 백만 명 규모로 동일한 문제를 풀게 되면, 확보할 수 있는 시간도 제한적이고 다양한 능력을 가진 수험생 전원에게 의미 있는 출제를 할 수 있는 영역도 제한된다. (국제 바칼로레아의 모든 것, p.32)
수능은 정말 공정한가? 일타 강사들의 족집게 과외와 비싼 학원에서의 훈련으로 무장한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이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시험을 보기만 하면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는가? 몇 문제 차이로 사회적 지위가 달라지는 것을 모두가 합리적이라고 여길 만큼 수능은 중요한 요소를 평가하는가?
‘정의란 무엇인가’로 유명한 마이클 센델 교수는 신작 ‘공평하다는 착각’에서 이러한 ‘능력주의의 역설’을 꼬집는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여기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는다.)
칼의 시대에서 벨 수 없는 존재인 ‘흑선’의 등장은 질문을 낳는다. (그래서 그런지 ‘료마가 간다’에서는 료마가 밤길을 걸으며 별을 보고 묻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나는 일본이 준비하는 교육개혁이 ‘IB라는 흑선’을 만나고 던지는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어떤 학생들을 길러내고 있는가.
-공정한 느낌만 받을 수 있다면, 미래 사회에 필요한 준비는 미뤄두어도 괜찮은가.
-무엇이 진짜 아이들의 삶에 ‘이익’이 되는 교육일까.
-이를 ‘공정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그렇기에 수능이라는 보스몹의 무서움은 공정하다는 착각 아래 ‘질문하지 않게 만드는 것’에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어떤 아이들을 길러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미뤄둘 정도로 사소하지 않다.
공정성이라는 이념뿐만 아니라, 아이들에게 필요한 역량을 진짜 길러주어야 한다.
일본이 가졌던 문제의식을 정리하면, ‘지식암기를 통해 선진국을 빠르게 따라가던 지금까지의 교육으로는, 미래사회에서 요구하는 창의적 인재를 길러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일본은 기존의 집어넣는 교육 대신 IB를 통한 꺼내는 교육을 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는 이지성 작가가 ‘에이트’에서 주장하는 것과 맥을 같이 한다. 단순 지식 학습과 같이 인공지능이 훨씬 유리한 영역만 발달시키면 인공지능에 대체될 수 밖에 없으니, 인간 고유의 능력 (창의 융합적 사고, 공감적 협력 등)에 집중해야 한다.
김희삼 교수는 ‘사회자본’이라는 개념을 소개하며, 교육을 통해 아이들이 공동체를 맺고 함께 협력하는 능력의 중요성을 설명한다. 그러나 ‘고등학교의 이미지’에 대한 국제비교는 안타까운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미국과 중국의 과반수의 학생들이 학교를 ‘함께하는 과장’이나 ‘거래하는 시장’으로 여기고, 일본의 대다수의 학생들은 학교를 함께하는 광장으로 여기는 반면, 한국의 80%가 넘는 학생들은 학교를 ‘사활을 건 전장’으로 생각한다.
우리의 교육현장은 성장과 협력이 있는 곳이 아니라, 옆 친구보다 경쟁력이 없으면 밟히고 마는 전쟁터인 것이다.
또 하나의 그래프는 현실의 어려움 뿐만 아니라 미래의 위기 상황을 보여준다.
2018년 OECD 합계출산율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3.09명(1위), 터키 1.99명(3위), 미국이 1.73명(11위)이며, OECD 전체 평균은 1.63이고 심지어 저출산과 고령화로 알려진 일본은 1.42명이다. 이에 반해 한국은 0.98명 (*20년 기준 0.84명으로 계속하여 급감)으로 OECD에서 가장 낮다.
어떤 이는 데이터에서 행간의 메시지를 읽는다고 한다. 나는 이 표에서 ‘한국은 더 이상 그럴 여유가 없다.’라는 경고를 느낀다.
우리는 더 이상 극심한 경쟁으로 아이들을 내몰아 살아남은 이들은 중요한 사람인 듯 대하고, 그렇지 못한 이들은 얼마든지 사회의 들러리로 세우는 만행을 지속할 수 없다.
아직은 조금 먼 미래가 아닐까 하는 안일함을 일깨워주는 사진도 있다. 생각보다 정해진 미래다.
정리하면 가장 빠르게 아이들이 사라지는 나라에서, 가장 강하게 경쟁의 전쟁터로 아이들을 등떠밀고 있다.
심지어 더 큰 문제는 전쟁터 같은 경쟁을 거쳐도 경쟁력을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집어넣는 교육’에서 꽤 좋은 등수를 차지하여 살아남았다고 해도, 세계의 ‘꺼내는 교육’을 받은 이들과 같은 무대에 서야 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일본은 IB라는 국제교육과정을 자신들의 공교육 커리쿨렴에 적용하려 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1) 실력 있는 국내의 학생들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추도록.
-실력 있는 학생들은 ‘다른 학생들에 비해’ 얼마나 월등한지 평가받는 것이 아니다. IB라는 신뢰받는 기구에서 요구하는 핵심역량을 갖추었는지 평가받는다. 이를 통해 단지 국내의 높은 석차가 아니라, 세계 무대에서의 경쟁력을 갖추게 된다.
2) 비교적 낮은 점수를 받은 학생들도 자신의 가능성을 일찍부터 닫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기회를 두드릴 수 있도록.
-IB로 공교육이 가능해지면 국내 입시 이후 해외 대학에 자연스럽게 지원할 수 있게 된다. 길이 하나밖에 없을 때에는 더 촘촘한 서열화가 일어난다. 그 안에서 아이들이 자신의 가능성의 한계를 일찍부터 그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계의 기회에 눈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창의적 사고와 공동체적 협력을 요구하는 시대에, 우리는 여전히 극심한 경쟁을 통한 경쟁력만을 주문한다. 그 사활을 건 전장에서는 더 이상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고, 수많은 잠재력들이 사장된다.
포탄과 탄약이 장전되는 전장에서, 구시대의 칼이 얼마나 예리한지 뽐내는 어리석음이 반복되지 않아야 한다.
앞선 글에서 료마의 탁월함이, ‘단순히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대안’을 마련한다는 데 있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IB는 앞서 이야기한 우리 교육의 많은 문제점들에 대한 비판 이후 (완벽하지는 않겠지만)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그동안 평가제도를 개선하자는 주장은 끊임없이 거론되었다. 그러나 이런 논의가 정책 입안자들의 탁상에 올라오면, 결국 올해 정시와 수시 비중을 어떻게 선정할지의 논의로 회귀할 뿐이다. 수능이 경쟁만 심화할 뿐 경쟁력을 기르지 못하니 수시를 확대하자는 주장은 사실 공정할 수 있을지 불안하다. 그렇다고 공정을 위해 수능만을 유지하면 우리 교육은 성장보다는 변별에 멈춰서게 된다. ‘IB를 말한다’에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타당성을 잃은 공정성 vs 공정함을 잃은 타당성
그런데 이 싸움은 사실 소모적이다. 공정하지 않은 타당성, 타당하지 않은 공정성, 둘 다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객관식 상대 평가로는 미래에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아무리 공정해도 수능이 이길 수 없다. 학종은 더 타당하더라도 모든 학생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 현 상태로는 공정이라는 명분을 이길 수 없다. (...)
수능 혁신의 방향은 서구 선진국들처럼 ‘꺼내는 교육을 평가하는 논술형’으로 움직여야 한다. 내신 혁신의 방향은 교사의 수업 및 평가에 대한 규제를 없애 기존에 비교과로 하던 활동 중 유의미한 핵심 활동을 아예 필수 과정에 포함시키고 시험도 논술형과 수행 평가로 선진화하는 것이어야 한다. (IB를 말한다, p.42-43)
IB가 추구하는 ‘꺼내는 교육을 평가하는 논술형’ 시험은 학생들의 성장을 돕는 평가라는 점에서 타당성이 높다. 동시에 신뢰받는 외부 기관이 이를 평가하고, 절대평가시 점수 부풀리기를 방지하기 위한 견제 장치 등을 통해 ‘공정성’도 확보할 수 있다.
이러한 장점들로 인해 대구교육청과 제주교육청 등 국내에서도 IB 한국어화를 공교육에 도입하려는 준비를 하고 있다. 물론 완전한 제도라는 것은 없기에, 구체적인 도입 과정에서 계획 단계에는 없었던 많은 문제들을 마주할 것이다. 특히, 국제고에서 시행되는 IB 커리큘럼을 모든 학생을 위해 공교육화 할 때, 비용이나 기존 실력 등이 진입장벽이 되지 않도록 섬세한 주의가 필요할 것이다. 대입에 적용될 때에는 ‘공정성’이라는 가치가 확보되지 않으면 아무리 취지가 좋아도 안정적으로 뿌리내릴 수 없을 것이다. (반걸음 앞서 진행되는 일본의 시행착오를 열심히 관찰하여 영리한 발걸음을 딛는 것이 필요하다.)
많은 난관들이 있겠으나 IB 도입을 논의할 때 생기는 긍정적인 변화는, 우리 사회가 기존의 평가 체제 외에 다른 대안을 ‘상상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 고민하는 과정에서 이 상상은 조금씩 구체화 될 것이다.
책 ‘국제 바칼로레아(IB)의 모든 것’(후쿠타 세이지)의 맺음 말에는 2011년 동북대지진 이후 엄청난 쓰나미 속에서, 이와테 현의 가마이시 초등학교 전교생 184명 전원이 모두 대피한 ‘가마이시의 기적’을 소개한다.
ㅇ‘쓰나미 텐텐코’ :쓰나미가 덮치면 혼자서라도 고지대로 대피하라는 구전
ㅇ산의 경사면 곳곳 대피도로와 계단 등 사회적 인프라가 있었고, 지진 발생 시 대피요령을 숙지했다.
-타마다 스케 군(초등학교 4학년)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몇 번이나 호소하면서 같이 대피하자고 했다. 가마이시초등학교는 높고 안전하지만 앞을 거의 보지 못하는 할머니와 함께 10분 이상 걷는 것은 무리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할머니를 이끌고 학교에서 배운 대피장소를 떠올리며 절로 올라갔다. 계단을 다 올라가자 높은 쓰나미가 들이닥쳤다.
-나가세 다이키 군(초등학교 3학년)은 게임을 하다 지진이 일어났고, 주변에 가구가 없어 이불로 머리를 가리고 진동이 멈추기를 기다렸다. 엄마와 연락하려 했지만 시간이 지나버려 ‘이대로 엄마를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하여 대피장소인 ‘아오바공원’으로 도망쳤다. ‘살아있다면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거야’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대피하던 엄마를 이후에 만난다.
-나카타니 가와기 군(초등학교 6학년)은 2학년 동생과 함께 게임을 하다가 지진발생 사이렌을 들었다. 신발을 신고 밖에 나가보니 이미 물이 흘러오고 있었다. 높이 50센티의 파도에도 성인이 떠내려가는 영상을 본 기억이 떠올라 대피도로보다 집의 지붕 위가 더 안전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가와기 군과 동생은 철근콘크리트로 된 지붕 위의 울타리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면서 물에 떠내려가지 않도록 버텼다.
-처음 지진 발생 시 8층으로 된 긴급대피 건물로 피신한 6학년 아이들은 어른들이 전혀 대피하지 않는 모습들을 보고, 바닷가에 놓고 온 낚싯대를 가지러 가자고 말한다. 그러나 테라사키 코우키는 바닷물이 빠지면 쓰나미는 반드시 올 것이라고 판단해 “어른들의 지시를 따르지 말고 우리는 다른 곳으로 대피하자”고 제안한다. 이 건물은 외진 곳에 있어서 더 높은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대피도로로 갔다.
(출처 : 국제 바칼로레아의 모든 것, 맺음 말, 일부 수정 및 발췌)
재난이라는 위기 상황에서 아이들이 스스로 판단하고 대처하는 일화가 구체적이었다. 예시가 너무나 생생한 바람에 떠올리기 싫었던 한 기억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물이 차오르기 직전까지도 ‘가만히 있으라’던 우리의 교육.
퍼포먼스(performance)가 예견된 상황에서 실천할 수 있는 힘이라면, / 컴피턴스, 역량 (competence)은 예상치 못한 낯선 상황이나 복잡한 조건들이 뒤얽혀 있을 때, 몸에 익힌 지식이나 기능을 종합적으로 적용해나가는 힘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역량’을 기른다는 것은 그저 좋은 말 대잔치가 아니라, 아이들이 살아갈 삶에 관한 것이다.
사카모토 료마는 한을 설득할 때마다 이야기한다. ‘지금 이 결정을 이후 후세가 어떻게 평가하겠냐고.’
마찬가지로 질문해본다.
세월이 지나 우리 교육은 어떤 평가를 받게 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