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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숲 Apr 17. 2023

단편소설/ 두 겹의 노래(8)

<2023 아르코 문학창작 발표 선정작-박숲>


    동생은 끝내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할머니에게 미안하다고 말한 뒤 제사상 앞에 앉아 식어 버린 밥알을 입에 넣고 우물거렸다. 다시 데워 올까? 할머니에게 물었다. 국그릇을 잡았던 손의 힘이 스르르 풀렸다. 급격히 진행된 할머니의 치매 증상 때문에 나와 동생은 삶이 마비될 정도였다. 모든 생활이 엉망이 되었고 동생은 우울증이 심해졌다. 나 역시 수시로 해왔던 할머니 엄마 역할의 감당이 버거웠다. 할머니가 낯선 도시를 떠돌다 사고사를 당한 뒤, 동생의 우울 수치는 심해졌다. 동생은 할머니의 영혼이 자신의 주변을 떠돌며 떠나지 않는다고 했다. 언니가 노인들을 위해 일한다고 할머니를 버린 죄가 가벼워질까? 우린 결코 용서받을 수 없어. 나는 동생의 우울증 치료를 위해 여러 번 상담을 권했고, 그때마다 동생은 소리를 질렀다. 내가 환자로 보여? 

    삼 인분의 식사를 모조리 개수대에 쏟고 제사상을 정리했다. 집안 곳곳에 놓인 작은 소품들이 하나하나 눈에 들었다. 제 자리를 지키는 사물들이 내 시선 안에서 새롭게 빛을 냈다. 집안의 사물들은 오래된 기억의 편린들이었다. 사물마다 시선이 머무는 곳에서 생의 작은 일부들이 환하고 소란스러운 기억들을 피워올렸다. 사물들에서 반짝이는 기억을 끌어내는 동안 내 몸에 품고 있던 빛이 조금씩 밝아졌다가 어느 순간 희미하게 꺼졌다. 할머니는 어떤 기억을 담아 갔을까. 할머니는 죽은 뒤에도 두 눈을 똑바로 뜨고 있었다던 경찰의 말 탓인지 새까맣게 그을린 할머니가 자주 꿈속에 나타났고, 어떨 땐 눈만 감아도 짐승처럼 형형한 빛을 내는 눈동자가 나를 쏘아보았다. 할머니가 떠난 지 이 년이 지났지만 동생은 나보다 훨씬 증상이 심각했다. 어쩌면 우린 둘 다 씻을 수 없는 죄의식과의 싸움을 끝없이 반복하는 중일지 몰랐다. 

    날이 밝자마자 실버타운에 전화를 걸어 복지사 팀장을 바꿔 달라고 했다. 팀장은 오프여서 나오지 않았다고 했다. 유리코는 어떻게 되었을까.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이 점점 더했다. 문득 실버타운 노인들의 얼굴과 표정들이 하나하나 떠올랐다. 빠른 속도로 빠져나가는 기억을 그들은 어떻게 감당할까. 그들에겐 ‘지금-현재’만 존재한다는 것을 의식하긴 할까. 자신의 첫사랑을 실버타운에서 만났다고 좋아하던 조 군. 그는 빠르게 유실되는 기억의 틈 안에서 여자 친구와의 기억을 어떻게 움켜쥘까. 잠깐씩 찾아오는 삶의 기억들이 그들을 한없이 낯설고 이물스러운 나락으로 빠트릴지 몰랐다. 그들이 놓아 버린 크고 작은 순간의 기억들. 

    집안을 서성거리며 동생에게 여러 번 전화를 걸었다. 계속 신호는 갔지만 받지 않았다. 종료 버튼을 누르자마자 낯선 번호의 전화가 걸려왔다. 실버타운 복지사 팀장이었다. 고민 끝에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다고 했다. 그토록 쌀쌀맞던 팀장에게 내 마음의 어떤 면이 전달되었던 걸까. 얼마 전 실버타운 근처에서 할머니 한 분이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혹시 모르니 알아보라고 했다. 몇몇 직원이 실버타운 근처에서 유리코가 돌아다니는 것을 여러 번 목격했다고 했다. 사고 확인 안 해 보셨어요? 강제 퇴소시킨 분을 일부러 확인까지 할 필요가 있나요? 나는 팀장의 몰인정함에 화가 치밀었다. 자본의 논리에 충실할 수밖에 없는 사설 기관의 직원일 뿐이라지만 저토록 매정할 수 있는지 안타까웠다. 팀장은 궁금하면 관할 경찰서로 가보라고 했다. 나는 할머니의 사고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머릿속이 까맣게 변했다.

    가방을 챙겨 집에서 뛰쳐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찬바람이 거세게 몰려들었다. 차를 몰아 동네를 빠져나오긴 했지만 팀장이 말한 경찰서로 가면 유리코의 행방을 찾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사람들은 어깨를 움츠리고 횡단보도를 건넜다. 높은 건물과 앙상한 가로수 사이로 가느다란 햇빛이 차갑게 빛을 내기도 했다. 순간 나는 두 눈을 의심했다. 분홍색 스웨터를 입은 유리코가 내 차 앞을 지나쳐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햇빛이 반사되어 하얀 머리카락이 은회색으로 빛났다. 유리코! 유리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재빨리 차에서 내려 노파의 팔을 붙든 채 유리코를 불렀다. 횡단보도를 가로지르는 사람들이 나와 노파를 쳐다보았다. 노파가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는 사이 신호등이 바뀌었다. 클랙슨 소리와 함께 욕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머리가 하얗게 센 노파가 ‘나는 유리코가 아닙니다’ 하더니 재빨리 횡단보도 너머로 사라졌다. 그 순간 노파의 말은 긴 여운처럼 내게 서늘하게 각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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