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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숲 Apr 17. 2023

단편소설/ 두 겹의 노래(4)

<2023 아르코 문학창작 발표 선정작-박숲>



     은색 꽃 모양 스팽글에 글루 건을 쏘아 조 군의 부직포에 붙여 주었다. 유리코는 활동 시간마다 꽃 모양에 유난히 집착을 보였다. ‘내게 주는 선물’이라는 주제 활동 시간이었다. 뭐든 자유롭게 만든 뒤 각자 작품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주문했다. 노인들은 다양한 모양을 만들어 냈고 자신의 작품에 담긴 추억들을 깊은 수면 아래서 건져 올리듯 즐거워했다. 유리코는 하얀 잎에 노란 수술이 있는 조그만 꽃 모양을 여러 개 만들었다. 조 군이 예쁜 꽃이라고 감탄하며 달라고 했다. 하지만 그녀는 단호히 거절했다. 꽃 이름이 뭐예요? 유리코는 당황한 듯 머뭇거리다 생각이 안 난다고 했다. 이 꽃을 보면 뭐가 생각나세요? 나는 유리코의 기억을 끄집어내려 이것저것 물었다. 하지만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한잠 동안 꼼짝도 하지 않던 그녀가 공포에 찬 표정으로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나는 유리코입니다! 와따시노 나마에와 유리코데스! 그녀는 벌벌 떨면서 똑같은 문장을 우리말과 일본어를 섞어 반복했다. 하얗게 질린 얼굴은 뭉개진 밀가루 반죽처럼 처참했다. 나는 재빨리 유리코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 주며 진정시켰다. 다른 노인들이 아이들처럼 한꺼번에 울음을 터트렸다. 치매 노인들의 집단 활동에서는 종종 비슷한 상황이 발생할 때가 있었다. 그러나 그날은 유난히 심각한 분위기로 흐르는 시간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다독이듯 동요를 불러 주었다. 다행히 분위기는 진정되었고 활동을 다시 이어 갈 수 있었다. 유리코는 김미자라는 본명보다 유리코라고 불러야만 자신을 기억했다. 

    활동 시간이 끝날 때까지 꼼짝하지 않던 유리코가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산카요우! 유리코의 눈동자가 검은 포도알처럼 반짝거렸다. 네? 뭐라구요? 이 꽃 이름 말야, 산카요우라구. 일본 살 때 매일 봤던 꽃이야. 나는 재빨리 물었다. 일본에 사셨어요? 살았던 동네 이름 기억나세요? 그러나 유리코의 얼굴은 다시 어두워졌다. 나를 비껴간 눈동자는 마치 인형에 부착된 까만 플라스틱처럼 변했다. 나는 유리코를 자리에 앉힌 뒤 산카요우를 검색한 뒤 큰소리로 읽어 주었다. 우리 말로는 산하엽이라고 했다. 아유 이름이 어렵네. 일본 지역에 주로 분포된 꽃인데, 비나 이슬을 맞으면 꽃잎이 투명하게 변하는 꽃이래요. 아이구 그런 희한한 꽃도 있어? 몇몇 노인들이 신기한 듯 물었다. 유리꽃이라고도 부른답니다. 유리꼬랑 이름이 비슷하구먼, 심 할머니가 참견했다. 꽃의 색이 빠지고 나면 뼈대만 남은 것 같아 영어권에서는 ‘해골꽃’으로 불리거나 ‘유령꽃’이라 불린다는 말은 생략했다. 노인들은 유리처럼 투명한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꽃 이미지를 검색해 보았다. 꽃잎은 마치 영혼이 탈색되고 껍질만 남은 나비처럼 보이기도 했다. 문득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떠올랐다. 

    지금도 할머니가 왜 요양원을 빠져나와 낯선 도시를 헤매고 다녔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할머니는 일제 강점기 위안부로 끌려가는 걸 막기 위해 어린 나이에 강제 결혼을 했다고 했다. 그러나 둘째 아이를 낳자마자 일본 앞잡이들에게 남편을 잃었다고 했다. 평생 두 아이를 키우느라 자신의 인생을 살아 보지 못한 할머니. 어른이 된 아빠가 지병을 앓다 죽자 나와 동생을 떠맡아야 했다. 고행의 연속이었던 할머니의 삶을 나는 교과서에 등장하는 이야기처럼이나 멀게 느꼈다. 할머니에게 유난히 얼음처럼 차갑고 냉정하게 대하는 동생을 볼 때마다, 집을 나가버린 엄마의 유전자를 재확인하는 것 같아 씁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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