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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숲 Apr 17. 2023

단편소설/ 두 겹의 노래(5)

<2023 아르코 문학창작 발표 선정작- 박숲>


     글루 건에 열이 가해져 뜨거워지자 나는 노인들 주머니에 차례로 스팽글을 붙여 주었다. 꽃 모양을 만들어 나비가 날아오게 하거나 별이 떠 있는 하늘을 표현한 노인, 또는 하트만을 가득 채운 노인. 그들의 현재 감정이 작품 하나하나에 여과 없이 드러났다. 나는 전혀 그들의 작품에 간섭하지 않았고 그들이 원하는 곳에 원하는 모양을 붙여 줄 뿐이었다. 허리를 펴고 잠시 창밖을 내다보았다.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오후의 창밖은 더없이 평화로워 보였다. 햇볕이 알맞게 파고든 안쪽에서는 매서운 바깥의 기온을 가늠할 수 없었다. 이곳 노인들 역시 시시각각 퇴화를 향해 줄달음치고 있지만 겉으로 보이는 상태는 여느 노인들처럼 평범했다. 

    창밖을 내다보며 유리코는 왜 나오지 않는 걸까 생각했다. 선생님, 이제 어떻게 해요? 심 할머니가 물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깊은 상념에서 벗어났다. 노인들은 모두 나를 바라보며 완성된 분홍색 미니 가방의 손잡이를 들어 보였다. 나는 자리로 돌아와 웃으며 말했다. 오늘 마지막 활동인 거 아시죠? 그동안 여러분과 함께 해서 많이 즐거웠고 행복했어요. 건강하게 지내셔야 해요. 노인들은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이별이라는 단어 앞에선 너무도 쉽게 무너지는 노인들. 왜애? 어디 가는 거야? 누군가 물었고, 갑자기 왜 마지막이라고 해? 또 누군가 물었고, 가지 마, 누군가 촉촉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심호흡을 해야 했다. 

    마지막이라 생각하자 유리코의 행방이 더욱 궁금했다. 노인들은 겪을 거 다 겪고 살 만큼 다 살아서 모든 거에 익숙한 줄 알지. 우리도 죽는 건 두려워한다는 걸 젊은 애들은 이해 못 해. 언젠가 유리코가 중얼거리듯 했던 말이 떠올랐다. 치매 증상이 심해지면 죽음이 앞당겨질 거라 자식들은 믿는다며 어떤 간병인이 말을 흘린 날이었다. 그럴까? 세상의 많은 자식들이 그들의 두려움을 이해 못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존재 자체를 거부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을 그들은 인정하기 싫은 게 아닐까. 

    유리코를 볼 때마다 할머니의 생전 모습들이 오버랩될 때가 많았다. 유리코의 ‘미자’라는 본명이 할머니와 같은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정에 쉽게 무너지는 다른 노인들과 달리 두 사람의 단단하게 둘러쳐진 ‘냉정’ 또는 ‘냉랭’으로 위장한 방어막 때문이었다. 어린 동생이 매일 엄마를 찾을 때마다 나는 할머니가 엄마를 쫓아냈다고 일러줬다. 그때마다 할머니의 얼음처럼 냉랭한 손바닥이 등짝으로 파고들었다. 할머니는 우리 자매를 키우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할머니가 악다구니를 퍼부으며 엄마를 욕하고 우리를 미워했다면 차라리 덜 미안했을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는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고 억척스러움으로 냉정을 유지했다. 생각해 보면 할머니의 냉정함은 평생 자신을 지탱하려는 힘의 방식이었을 것이다.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에 고모네 식당은 문을 닫았고 우리는 쫓겨났다. 고모네 식당에 딸린 단칸방은 고모 부부의 욕설을 견디는 공간이었다. 할머니는 그동안 공장과 고모네 식당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했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겨우 방 한 칸을 마련했다. 이사 간 첫날 나는 처음으로 할머니의 보일 듯 말 듯 입가를 스치던 미소를 보았다. 나는 지금도 할머니의 그 미소를 한줄기 희미한 빛처럼 가슴에 품고 산다. 마른 꽃잎이 바스러질 듯 스치던 안타까운 미소. 그 희미하고 아스라한 미소의 의미를 헤아리기까지 긴 시간을 건너왔다. 요양원에 모시기로 결정한 날, 할머니의 눈빛은 바닷속 심연처럼 고요하게 잠겨 있었다.      

    노인들이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한 명씩 간병인의 손을 잡고 상담실에서 빠져나갔다. 조 군은 뭔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잠깐 내게 시선을 두었지만 금세 잊어버린 건지 간병인이 이끄는 대로 문을 나섰다. 나는 재빨리 뛰어가 조 군을 안았다.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내 인사가 조 군에겐 아무 의미도 없겠지만 그 순간 조 군의 몸이 가볍게 떨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이 기억하는 방식은 어쩌면 뇌가 아닌 몸에 새겨진 어떤 익숙함의 흔적들이 아닐까. 조 군은 상담실 문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입 모양 만으로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유리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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