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한 신입이 남긴 잡플래닛을 발견했을 때
최근들어 회사는 조용해졌다. 예고 있는 격렬한 이별 이후에 인원 수는 적어졌고, 일은 여전히 많았지만 마음은 편하다는 동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니고 있다. 연차 차이가 많이 나는 회사일수록 남는 건 씁쓸한 뒷 이야기와 여전히 찜찜하게 흘러가는 알 수 없는 무언가들이 차고 넘친다.
때 되니까 알게 되는 것들
당시에 나도 몰랐던 것들을 연차가 10년 가까이 되어가는 요즘, 알게 되었다. 글 쓴지 제법 오래 되었지만 아직은 주변에 내노라 하는 기라성 같은 선배들 덕에 여전히 애기인 나는 선배들이 당시에 했었던 얘기들을 꼰대처럼 느껴져 몸부림을 치면서 싫어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때 되니까 알게 되었다.
"생각보다 어떤 조직이든 보수적이고.."
"네가 모르는 일들을 누군가는 하고 있단다"
"네 생각대로 하지마"
"어차피 네 생각은 맞는게 하나도 없어"
"시킬 때까지 기다려서 할거면 회사는 왜 다니냐"
폭언 아닌 폭언을 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 지나서보니 신기하리만큼 뼈와 살이 되어 내 몸에 잘도 붙어있었다. 선배들은 나약해질 때쯤에 나에게 단비같은 잔소리를 잘도 퍼부어줬고, 기세가 등등해질라고 하면 폭격기처럼 내 머리 위에 폭탄을 던지곤 갔다. 원고를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을정도로 우는 날에는 등을 토닥이다가도 욕을 하기도 했다. 그 모든게 괴로웠던 시절 내 글 짬밥도, 어리숙한 생각들도 조금씩은 영글어갔다. 그렇게 이 작은 대행사에서 파트장이라는 직함을 달고 산지 어언 2년 째.
원체 작은 회사에 오고가는 인물이 많은 터라 고인물이 이제야 내가 된 마당에 (2년째 있는 사람이 고인물로 표현된 것도 웃기지만) 근래 퇴사자들이 남긴 잡플래닛 후기를 보고 나는 하루종일 깔깔 배를 잡고 웃었다.
내 말이 맞지?
너도 그랬어 임마
선배들은 시간이 지나면 너도 알게 될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그 보수적인 집단에서 말도 안되는 머리들이랑 허구헌날 싸우는 모습을 보면서 나 역시 종종 한심하다고 생각했었다. 엄마나 아빠한테 가서 얘기하면 다 이유가 있어서 그럴것이니 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꼰대 스러운 잔소리를 듣고 나면 입을 비죽이곤 했다. 그럴때마다 친구들에게 하소연을 하거나 동기들에게 욕을 하면서 버텼던 날들. 요즘은 참 뭔가 좋아져서 그런지 회사에 대한 아쉬운 마음이나 상처를 받으면 이렇게 직접적으로 쓰는걸 보니.. 시대가 참 많이 변했다는걸 느꼈다.
< 팀장님이 말해주지 않아서 몰랐던 것들이 많았었습니다. (중략) 고인물들을 치워내면 회사가 잘 될것입니다. (중략) 비단 MZ세대만의 문제라고 보시지 말고, 직원들에게 맞는 일을 주셨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상사에게 상처 받았지만 훗날 다음에 오시는 분들이 좋은 경험을 하시길 바랍니다. >
누군지 알법한 얘기와 나에 대한 완벽한 비방이 적혀있어서 깔깔거리며 온동네 사람들에게 보여주면서 웃었다. 제법 화도 나기도 했지만 너무나도 어린 시절 모습이 담겨 있어서 작성자의 말대로 먼훗날 이걸 보면서 본인도 웃어넘겼으면 하는 마음이 생겼다. 선배들은 이런글을 보면서 욕먹는거 보니 일을 제법 했다 라는 소리를 했고, 비슷한 업종에 있는 친구들은 너도 나도 자신들의 이야기를 꺼냈다. 거봐, 내말이 맞지? 너도 그랬어 임마 라면서 나를 타박했지만 나를 가장 강하게 키워준 사람들이 맞장구를 치니 눈물이 맺힐정도로 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한 일이 누군가에게는 업무적으로 큰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 상사를 대상으로 와전된 이야기가 들리는 일에 휘말려 있다는 것. 본인이 스스로 업무를 해결해보지 않고, 그대로 똑같은 자료를 복사 붙여넣기 한 것, 졸리니까 집에 가겠다면서 협업하는 과정에서 모두가 들리게 얘기한 것. 야근을 하는 사람들을 보며 눈치를 줬다고 생각한 것....하나씩 짚으면서 얘기하자면 머리가 아플정도로 '민폐'가 될만한 일들이 수차례 있었다. 상처 받을 일이라는 건 알았지만, 지금 이 순간을 잡지 않으면 영원히 계속 핑계를 만들면서 일을 해올게 뻔했다. 어차피 아닌걸 아니라고 말해서 나쁜사람이 된다면 난 징그러워서 짜증이 날정도의 나쁜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나아갈 수 없으니까.
어차피 다 지나봐야 알 일.
그래서, 나는 부끄럽지도 화나지도 않는단다 아가야
비단 회사가 다 맞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부당한 조건으로 사람을 괴롭히거나 힘들게 하는 잘못된 회사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그게 사람일수도 있고, 사측의 규칙일수도 있다. 하지만 일을 원만하게 하는 사람들의 기준에서 즉, 일을 책임지고 자신의 이름을 달고 보고하는 입장에서는 어떤 방향이든 경험이 전무한 저연차들에게는 고압적으로 느껴질 수 밖에 없다. 당시엔 몰랐던 것들이 지금 보인다면 당신은 고인물.. 아니 고연차임이 틀림없다.
한참을 읽어보면서 부끄럽지도 화나지도 않는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깔깔 거리며 웃었다. 부디 이 작성자가 아 어느 회사에 가서든 짤리지 않고 일을 잘 해내길 바라면서 말이다. 나와 같은 사람을 만나게 될지도 혹은 그 이상의 사람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아이에게 나는 먼훗날 시간이 지나서 봤을 때는 그 때 그사람이 어쩌면 최악은 아니였을수도 있다 라는 생각을 하는 날이 올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왜냐면 나도 그랬으니까. 그 새끼가 개새끼라고 욕을 하고 다녔던 그 선배는 지금 나에게 최고의 선배가 되었다. 저년은 아주 그냥 죽일년이다 라고 했던 동기는 지금 나에겐 없어선 안되는 최고의 파트너가 되어있었다. 안 맞고 모난 것들은 결국 나를 죽이는 게 아니라 때론 성장시킨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참으로 밉게만 느꼈었는데 나의 어린 모습들을 거울처럼 돌아보는 순간이 오고 나서야, 제대로 깨달았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정말이지 삶의 이치에서 틀리지 않았다. 뒤돌아봤을 때 나는 꼭 작성자가 나를 한번쯤은 기억해주길 소망했다. 그리고 꼭 이말을 전해주고 싶다.
그래서 여전히 부끄럽지 않고 화도 나지 않는단다 아가야.
어차피 다 지나보면, 그 땐 틀린 말이 지금은 맞는 말이 되기도 하니까.
먼 훗날 우리가 어디서 보든 한번쯤은 잘 살고 있는지 물어봐줄게. 아가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