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엔 많이 무기력했고 아팠다. 뭘 해도 재미있지 않고 마냥 늘어졌다. 왜 우는 지도 모르겠는데 새벽마다 울었다. SNS 속 사람들도 꼴 보기 싫어서 인스타그램을 지웠다 깔았다를 반복하고 방해 금지 모드를 켜뒀다. 아마도 코로나 블루였던 것 같기도 하다. 병명이 뭐든 간에 분명한 건 그때 많이 아팠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진 않았다.
근처에 죽음이 잦아질 나이가 되어가는 걸까, 아니면 모두가 힘든 시기여서 그런 걸까. 주위에 점차 죽음이 많아진다. 사랑하는 누군가를 갑작스럽게 보내기도, 자연스레 떠나보내기도 한다. 이제는 실시간 검색어에 누군가의 이름이 뜨면 덜컥 겁이 난다. 혹여나 이름 모를 누군가 또다시 온다는 기약도 없이 훌쩍 떠나버렸을까 봐. 연고도 없는 사람일지라도 죽음은 언제나 슬프다. 마음이 무너진다.
아픈 사람은 티를 내지 않는다. 내가 아픈 모습이 상대에게 부담이 될까 봐, 또는 그런 연약한 모습이 나중엔 떼어지지 않는 혹처럼 돌아올까 봐 이런저런 이유들로 감추게 된다. 친한 친구들을 만나 맥주 한잔하며 이야기하다 보면 모두 나만큼 힘들던 시기가 있었다는 걸 알게 된다. 그런데 어쩐지 우습게도 그 시간을 통과할 때는 하나같이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다. 도움의 손을 찾아 헤매도 모자랄 판에 손을 숨긴 채 잔뜩 웅크린다. 그러다 마음의 벽이 조금 단단해졌을 땐 먼 과거를 회상하듯 쓴웃음 지으며 그땐 진짜 힘들었는데⋯ 라며 못다 한 말을 털어놓는 것이다.
힘들 땐 누구도 만나기 싫어지고 아무도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거란 생각만 든다. 그래서 이해가 된다. 그때의 나의 마음도, 친구들의 마음도. 그래서인지 소식이 한동안 업데이트되지 않는 친구가 있으면 괜히 마음이 쓰인다. 혼자 웅크리고 있진 않을까 걱정이 된다. 그래서 평소엔 카톡을 잘 읽지도 않는 주제에 안부 문자를 보낸다. 부담스러워 할 수도 있으니 장난스럽게.
‘나 저번에 우리 갔던 카페 지나간다? 뭐해’
무소식이 희소식인 세상은 더 이상 없다. 누군가의 일상을 전부 알 수 있는 이 문명 시대에서 갑자기 연락이 닿지 않을 때, 마냥 희소식이라며 기다리기엔 너무 늦다. 우리는 서로에게 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화분에 물을 주고 강아지를 산책 시키듯 별 탈 없는지 묻고 들여다봐야 한다. 백예린의 노랫말처럼 그러니 우린 손을 잡아야 한다. 우울이라는 바다에 빠지지 않도록. 그러다 보면 아예 아프지 않을 순 없겠지만 조금은 웃을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