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장을 정리하다, 오래도록 방치된 구석에서 먼지 쌓인 앨범 하나를 발견했다. 대학 시절 졸업 앨범이었다. 20년 전엔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해서 앨범을 스스륵 넘겼다. 그러다 색이 바랜 쪽지 하나가 떨어졌다. 학군단 첫 동계 입영 훈련 당시, 동기생들이 적어준 롤링 페이퍼였다. 한 명 한 명 잊고 지냈던 동기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그 시절 나는 어떤 사람이었을지 되짚어본다. 그중 유독 뜨끔한 말 한 줄이 눈에 들어왔다.
"민현아, 너는 참 착하고 모범생 같은데 욕도 많이 하고 침도 뱉어서 놀랐어."
이실직고하자면, 학창 시절부터 이십 대까지 나는 욕을 참 많이 했다.
한때는 이게 평생 습관이 되어버릴까 봐 걱정도 했었다.
욕의 역사는 중학교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학급이나 학교에서 힘 있는 자의 편에 서고 싶어 했다. 공부만 하는 ‘범생이’는 짓밟히기 쉬운 존재였고, 나는 그런 모습이 되고 싶지 않았다. 공부를 잘하던 나는, 거기에 조금만 불량한 색을 덧입히면 힘 있는 무리 안에서 ‘같은 편인 척’할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욕과 침 뱉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어둑해질 무렵, 학원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다 보면 시골 동네에서 가장 번화한 곳에 자리한 광신극장이 보였다. 그 앞에는 어김없이 우리 학교에서 ‘깡패’라고 불리던 친구들이 어슬렁거렸다. 나는 조심스레 그 근처로 다가가고, 그들은 아주 친한 척 어깨동무를 했다. 그러고는 작게 속삭였다. "용돈 좀 빌려줘."
나는 한없이 벌벌 떠는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그 친구가 다가오면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지만, 나는 애써 욕을 했고, 침을 뱉었고, 자연스레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건넸다.
대학 시절의 욕은 조금 다른 맥락이었다. 나는 깡마른 체구에 시커먼 피부를 가진 시골 출신의 촌놈이었다. 왠지 모르게, 늘 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미팅이나 소개팅에 자주 나갔지만, 좀처럼 좋은 관계로 발전되진 않았다. 연약하고 자신감 없어 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럴수록 나는 욕을 입에 달고 살았다. 침을 뱉고, 거칠게 웃고, 센 척을 했다. 그게 나를 보호하는 방법이라고 믿었다. 나는 그렇게 살아남으려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해야 했던 내가 조금 안쓰럽다.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었고, 상대가 먼저 나를 낮게 보지 않도록 선을 긋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욕이나 거친 말투 없이도 사람은 충분히 단단해 보일 수 있다는 걸.
오히려 그런 말이 없어야 진짜 나가 드러난다는 것도.
나는 욕을 하지 않은 지 벌써 십 년이 훌쩍 넘었다. 처음엔 입에 익숙했던 말이 사라진 게 어색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확실한 건, 욕을 하던 그때의 내 모습이 지금 돌아보면 훨씬 더 어색했다는 거다.
거칠게 굴지 않아도, 애써 강한 척하지 않아도,
나는 나를 드러낼 수 있다는 걸 이제는 안다.
그리고,
그런 내가 진짜 나와 가깝다는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