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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진아 Oct 24. 2021

 원나잇 온리 -3-

-하룻밤, 그래서 너는 나에게 더욱 강렬하게 남아있나 보다-

그때, 너는 예감했을까. 어느 날, 우연히 만난 먼 이국땅의 여자애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너를 떠올리며 글을 쓰고 있을 거라는 걸. 상처 받은 밤, 잠 못 들고 뒤척이며 끙끙대다가 문득 너와 보낸 밤을 떠올리며 그저 잠시 함께했다는 것, 서로의 외로움을 조금이나마 채워준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스스로를 위로하며 그들이 행복하길 그리고 너 역시 행복하길 바랄 수 있게 되었다는 걸. 



잠시 걷자는 말이 무색하게도, 우리는 한참을 걸었다. 걸음을 멈추면 헤어짐의 시간이 나타나 내 손목을 덥석 잡을 것만 같았다. 너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는지 대화가 멈추는 순간에도 걸음만은 멈추지 않았다. 


어두운 밤, 어딘지 알 수 없는 곳, 그리고 몇 시간 전에 만난 남자. 

떠나오기 전, 밤에 돌아다니지 말고, 위험한 곳은 가지 말고, 남자를 조심하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는데 그 세 가지 말이 조화롭게 딱 맞아떨어진 상황이었다. 그러나 나는 네가 날 헤칠 거라는, 아니 헤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아서 두려움이라던가 공포라던가 하는 감정은 1g도 첨가되지 않은, 기분 좋은 긴장감과 설렘과 두근거림, 울렁이는 마음, 그런 모든 것들에 잘 버무려져서 그저 어둠도 빛이 나고 낯선 길은 새롭고 너는 선물같이 느껴졌다. 어쩌면 끝이 정해져 있었기에 가능한 일일 지도 몰랐다. 사랑을 시작할 때는 항상 이번 사랑만은 영원할 것만 같아서, 말라비틀어진 마음을 끌어안고 불구덩이로 뛰어들지 않는가. 남들이 보기에는 끝이 훤이 보이는 그 길을 오직 자신만 알아채지 못한 채 스스로를 불태우며 걸어가다 더 이상 태울 것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을 때에야 눈앞에 있는 끝을 마주하고 절망한다. 그러나 우리의 만남은 기한이 정해져 있었고 나는 끝을 잘 알고 있었다. 다 알고 시작했으니 절망할 일도 없었다. 우리에겐 과거나 미래 따윈 없이 다만 현재만이 있어서 나를 태울 일도, 싸울 일도, 서로를 찌르고 상처 입힐 일도 없었다. 그저 함께 하는 1분 1초가 아쉽고 마냥 애틋하고 벅찬 마음만 들 뿐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묻는 너의 말에, 나는 지금 충분히 위험한 상황이 아닐까 생각해고 있었어 라고 웃으면서 대답했다. 너도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야, 아니야. 하지만, 맞아. 조심해야 해. 밤에는 위험하니까."

"밤이 아니어도 위험한 상황인 것 같은데."

"그렇지, 그럴 수 있어. 그렇지만 난 믿어도 돼. 난 나쁜 남자는 아니야."  

"세상의 모든 남자들이 그렇게 말하지."

"응. 부정은 못하겠다."

"우리 엄마가 남자는 아빠 빼고 믿지 말라고 했는데 너는 믿어볼게."


이런 가벼운 농담 끝에 네가 우리의 다음을 이야기했을 때,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사실 오늘이 아르헨티나에서의 마지막 밤이라고 말했다. 너는 걸음을 멈추고 놀람과 당혹감이 섞인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미리 말해주지 않았냐는 조금은 원망이 섞인 듯한 너의 물음에 나는 미안하다고 너도 내가 가야만 한다는 걸 알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고 말했다. 


"알고는 있었지만 그게 오늘일 거라고는 생각 못했어" 


나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고 미안하다고 말하며 시선을 떨궜다. 내가 끝을 생각할 때, 너는 다음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게 기쁘면서도 슬펐다. 그러나 마지막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널 따라나서지 않았을 거고 그랬으면 너도 다음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내 생각을 너에게 전하고 싶었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너는 두 손으로 내 얼굴을 감싸 올렸다. 씁쓸한 미소를 짓고 있는 너의 얼굴이 보였다. 하지만 너는 이내 환하게 웃음을 지어 보이며 말했다.


"마지막을 이렇게 보낼 수는 없지. 우리 탱고를 추자."

"뭐? 지금? 여기서?"

"왜 안 되겠어"


너는 두 손을 내밀었다. 나는 대답 대신 너의 손을 잡았다. 그리고는 또다시 기꺼워하며 네가 만들어낸 공간에 발을 디뎠다. 부끄러움은 어디론가 쏙 숨어버려 털끝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내 머릿속에는 그저 너의 체온과 귓가에 들리는 너의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와 가슴을 타고 전해오는 너의 심장박동, 그리고 오직 너와 너, 너만이 가득했다. 


네가 나에게 한걸음 다가오면 나는 너에게 한걸음 내어주고, 네가 나에게 한걸음 내어주면 나는 너에게 한걸음 다가가는 이 애처로운 몸짓을 끊임없이 변주하면서 우리는 서로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다가가고 있었다. 나는 이 몸짓이 사랑과 크게 다르지 않음을 문득 깨달았다. 상대방에게 오롯이 나를 내 맞기는 행위, 겁내지 않고 서로에게 다가가고 아까워하지 않고 서로에게 자신을 내어주는 행위, 내가 지워지고 우리만 남는, 그리하여 단 둘 뿐인 세상에서 주인공이자 서로의 노예가 되는 행위. 그것이 사랑 아니던가. 쉽게 변질되어 실제로는 좀처럼 마주하지 못하는 순수한 사랑의 원형을 우리는 탱고를 추며 마주했다.

불이 꺼지지 않은 몇몇 건물에서 희미한 빛이 흘러나와 조명처럼 우리를 비쳐주고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지구도 우리를 위해 회전을 멈추고 바다도 태양을 더욱 세게 붙잡아 떠오르지 못하게 했으리라.


탱고가 끝난 후, 우리는 볼을 맞대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포옹을 했다. 그러다가 너는 내 양 볼에 입을 맞췄다. 아주 느리고 조심스러운 그 입맞춤은 따뜻하고 간지러웠다. 나는 아득해져서 우리가 어느 고풍스러운 건물 벽에 붙어있다는 사실도 한참 후에서야 깨달았다. 내가 감고 있던 눈을 떠서 너를 올려다보다가 너의 어깨에 다시 얼굴을 파묻었을 때 너는 말했다.


우리 집에 가지 않을래? 아니면 내가 너의 호텔로 가는 건 어때?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고 지금은 생각한다. 사실 그때도 내심 그 말이 나오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그러나 20대 끝자락의 나는 경험이 많이 없었고 감정에 솔직하지 못했으며 모험심이 부족했다. 만난 지 몇 시간 안된 남자와 조금 다른 의미의 밤을 보낸다는 건, 아무리 상대가 맘에 든다 해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막상 그 말을 마주했을 때, 내 마음엔 한차례 폭풍이 일었으나 그 뒤에 남은 건 두려움뿐이었고 결국 미모사처럼 몸을 움츠려 너를 밀어냈다. 21세기보다 20세기에 머문 시간이 더 많았던 나는 어쩔 수 없이 구식이었다. 

너는 괜찮다고 하며 내 등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그 아름다운 웃음을 지으며 나를 안심시켰다. 우리는 어느 건물 앞 계단에 앉아 서로의 체온에 의지한 채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네가 이야기를 하고 나는 거의 듣고만 있었는데 -한차례 폭풍으로 인해 엉망이 된 내 머리는 더 이상 영어로 문장을 만들어 내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에- 사실 이제 와서 고백하자면 반 이상은 못 알아들었다. 나는 그저 가만히 네 목소리를 들으면서 너희 집으로 갈걸 그랬나, 지금은 너무 늦은 걸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어느덧 멀리, 하늘 한 구석에서 어슴푸레한 빛이 조금씩 고개를 내미는 것이 보였다. 자동차가 이따금씩 우리를 지나쳐갔다. 이제는 진짜 가야만 하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몇 번을 망설인 끝에 택시를 세웠다. 포옹과 가벼운 볼인사가 우리의 마지막이었다. 나는 택시 뒷좌석에 앉아 창 밖의 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택시는 망설임 없이 출발했고 너는 자꾸만 멀어져 갔다. 나는 네가 점점 작아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몸을 한껏 틀어서 창 밖으로 손을 흔들었다. 

숙소에 도착하니 이미 리셉션 직원은 바뀌어 있었다. 직원은 번진 화장과 흐트러진 매무새로 새벽녘에 돌아온 손님에게도 반갑게 인사를 해주었다. 그래서 나도 한껏 들뜬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즐거운 시간을 보냈냐고 묻는 직원에게 네라고 대답하고 가볍게 손을 흔들며 방으로 올라갔다. 

최대한 조심해서 방 문을 열었는데 친구가 신음소리와 함께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자기 전에 내가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는지 나를 기다리다가 깜빡 잠든 눈치였다. 친구는 시계를 보더니 설마 지금 들어온 거냐고 물었다. 시계는 새벽 5시 30분쯤을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면서 밤 사이에 있었던 일들을 간결하게 이야기했다. 내가 느꼈던 감정은 숨긴 채 실제 일어났던 사실에 대해서만. 그러나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한껏 흥분되어 있어서 누구라도 내 감정을 알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조금 부끄러웠다.


짐을 싸고 아침을 먹는 동안에는 계속 네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 이후는 예상치 못한 일들의 연속이어서, 다른 생각을 할 겨를이 없었다. 친구와 나는 공항 위치를 잘못 알고 있었고 택시 승차는 계속 거부당했으며 거리에서는 대규모 시위가 일어나고 있었다. 겨우겨우 택시를 잡아타고 공항으로 향했으나 길이 꽉 막혀서 예상시간보다 늦게 도착했고 그 와중에 출국심사에 걸려 공항 뒤편의 어두운 방으로 끌려가 짐을 다 풀어야 했다. 아슬아슬하게 탑승게이트에 도착한 후에도 짐 검사를 다시 한번 더 받아야 했다. 나는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비 향기에 탑승하자마자 위스키를 마시고는 뻗어버렸다. 

환승을 위해 미국 공항에 도착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스캐너에 들어가서 검사를 끝내자마자 별도로 몸수색을 당하는 치욕을 겪었으며 결국 친구와 다른 게이트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가방에 김치가 들어있냐는 말도 안 되는 질문도 들어야 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비행 스케줄이 엉키는 최악의 경우는 면해서 한국행 비행기에 탑승할 수 있었다. 나는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또다시 위스키를 마시고 잠들어버렸다.

너를 다시 떠올린 건 담요 사이를 파고드는 추위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였다. 살짝 열어본 창 사이로 눈부시게 새하얀 극지방의 풍경이 보였다. 뾰족뾰족한 얼음산, 보기만 해도 몸이 덜덜 떨리만큼 춥고 사무치게 쓸쓸한 곳, 그 위에서 홀로 잠에서 깬 나. 나는 그 풍경 속에 있는 것처럼 몹시 춥고 외로워졌다. 그러다 네가 생각이 났고 그날 밤 너와 나눈 온기가 손끝에서부터 가슴속까지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이 정도 온기면 그래도 제법 오래 버틸 수 있을 거라고 뇌되이다, 문득 네가 내 인생의 빛나는 한 페이지가 될 거라는 걸 운명처럼 깨달았다. 언젠가 죽음이 찾아와 살아온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눈앞에 펼쳐질 때, 우리가 함께한 그 밤이 찰나의 순간으로 지나가면 나는 너를 떠올리며 행복한 표정을 짓게 될 것이란 것을.


한국으로 돌아와 인터넷을 뒤져서 탱고 동호회를 가입했다. 한 달 동안 수업에도 참여했다. 강사는 탱고는 몸으로 하는 대화라고, 파트너와의 교감은 춤으로 하는 것이니 탱고를 출 땐 대화를 나누지 않는 것이 보통이라고 했다. 나는 그곳의 룰에 맞춰 춤을 추는 동안은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잘 모르는 사람들과 대화도 나누지 않으면서 춤을 춘다는 게 나에게는 도통 어색하고 불편했다. 또한 안타깝게도 내 몸뚱아리는 몹시 내성적이었고 모든 파트너들과의 대화를 거부했다. 심지어 내 몸뚱아리는 나와의 교감도 거부해서 움직이라 명령해도 도통 움직이지 않았다. 돌아가지 않는 내 허리를 부여잡고 직접 돌려주던 강사님의 당혹스러운 표정이 아직도 떠오른다. 스스로가 뻣뻣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나도 그 정도인 줄은 몰랐다. 

언어로도, 몸으로도 파트너들과 교감할 수 없으니 자연스럽게 탱고를 추는 것이 즐겁지 않게 되었고 한 달, 딱 4번의 수업을 마지막으로 탱고와 작별했다. 

지금도 가끔씩 탱고를 추고 싶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럴 때마다 유튜브에 올라와있는 탱고 영상을 찾아보며 탱고를 추는 상상을 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네가 떠오른다. 나의 첫 탱고 파트너이자 가장 짧은 사랑으로 남은 너. 너와 함께였다면 즐겁게 웃으면서, 쓸쓸함과 외로움을 나누며 탱고를 출 수 있었을 텐데. 


언젠가 다시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밤으로 내가 갈 수 있을까. 그래서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그땐 조금 더 무모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우리가 손을 맞잡았던 그날, 네가 만들어낸 우리 둘만의 세상 속에서, 오롯이 너에게 나를 내맡긴 채 오직 너의 몸짓만을 따라 움직이던 순간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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