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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소소 Jun 05. 2019

간단한 기생충 리뷰

왜 기생충이라 부르는가

기생충을 보고 와서 간단히 글을 남긴다. (스포 포함)


인간의 감각 중 가장 끈질긴 건 아마 후각일 것이다. 길가에서 문득 스쳐지나가는 냄새는, 내가 기억하고 있는지도 모르던 어떤 추억을 순식간에 끄집어내곤 한다. 아마도, 시각이나 청각은 기억이 너무 디테일한 형태로 남는 반면, 인간의 감각 중 비교적 뒤떨어지는 후각은 기억 속에 비교적 부정확한 형태로 남게 되고, 그만큼 쉽게 환기가 되는 게 아닐까 싶다.


영화를 보고 온 이들은 왜 이런 잡설로 리뷰를 시작하는지 알 것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감각은 다름 아니라 후각이다. 영화 미학이나 촬영의 기술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나조차도 알아차릴 만큼 이 영화의 미쟝센은 훌륭하지만, 그럼에도 이 영화의 감정과 서사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후각이다. 요 며칠 네이버 메인에 걸려 무척이나 유명해졌던 나 사장의 대사처럼 ㅡ 그, 지하철 타는 사람들에게서 나는 냄새.


송강호의 가족들에겐(이름이 일일이 기억나지 않아 배우의 이름으로 대신한다) 냄새가 난다. 그것은 분명 불쾌한 냄새일 것이다. 습기 찬 방에서 빨래를 말려야 하는 자취생이자 지하철을 자주 타고 다니는 도시인으로서, 불쾌한 냄새 앞에서는 저절로 눈이 찌푸려진다는 것을 안다. 좁은 차 안에서 그의 선을 넘어 풍겨 오는 지하철 냄새는, 이선균에게는 무척이나 거슬릴 것이고, 홍수로 젖은 옷에 제대로 씻지 못한 송강호와 같은 차를 타고 가는 조여정은 자신도 의식하지 못한 채 인상을 찌푸렸을 것이다.


문제는, 그 냄새란 걸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하면 빨래에서 냄새가 나지 않는지 안다. 수건은 삶고, 햇볕에 말리고, 보다 좋은 방법은 건조기를 돌리는 것이다. 뽀송뽀송한 건조의 냄새는 굉장히 기분이 좋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어느 자취생이 그럴 수 있을까? 적어도 일주일에 두 번은 집에서 세탁기를 돌리고, 건조대에 이걸 널 수 있는 나는 운이 좋은 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물론 빨래를 갤 때 미약하게나마 스쳐오는 쿰쿰한 냄새 앞에선 애써 고개를 돌려야겠지만 말이다. 송강호의 가족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선균의 아들이 찾아낸, 송강호의 가족들에게서 풍겨오는 냄새는 그들의 속임수가 들킬지 모른다는 위협처럼 등장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그것이 단순한 폭로의 장치가 아니라, 결코 뛰어넘을 수 없는 구별 ㅡ 이선균의 대사를 빌리자면, '넘을 수 없는 선'으로서 기능하고, 결국 마지막, 칼에 찔린 시체 앞에서 코를 막고 벤츠의 키를 가져가는 그 장면에서는, 경멸의 대상이 된다. 곧 송강호를 향하는 것이기도 한 이선균의 그 표정은, 나이스한 태도와 주말 수당을 챙기는 꼼꼼한 사장님의 외피 속에 감추어져 있던 아주 단순한 메시지를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너는 나와 같은 인간이 아니다 ㅡ 경멸이란 그런 것이다.


이 영화를 비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냄새 때문일 것이다. 송강호와 그의 가족, 그리고 지하실의 그 양반이 결코 지울 수 없던 그 냄새, 그렇기에 인간으로 취급받을 수도 없고, 기생충으로 남을 수밖에 없던 그 냄새. 기생충으로 규정 지어졌고, 결국 기생충으로 남을 그 냄새. 예정된 파국을 가져온 그들의 '결함'은, 바로 그 냄새였던 것이다. 그 비극은 결국 이선균의 죽음으로 끝을 맺는다. 인간을 부정당한 기생충이 할 수 있는 미약한 반항이란 결국, 숙주를 찔러 죽이는 것밖에 없었다. 그것은 아무 것도 바꾸지 못함에도.


그런데, 짧고 사소하지만 무척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다. 지하실로 숨어 들어간 송강호가, 마치 전 주인이 했던 것처럼, 이선균의 사진을 보며 그에게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나 사장님, 죄송합니다."


왜 기생충이 숙주에게 사과를 하는가? 나 사장이 그를 거둬주었던 은인이기 때문에? 그렇지만 나 사장은 독지가가 아니다. 물론 송강호의 식구들이 이선균의 집에서 일을 하게 된 과정은 떳떳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송강호는 이선균을 태워다줬고, 그의 아내는 조여정을 도와 집안일을 했고, 그의 자식들은 이선균의 자식들을 (엉터리로나마) 가르쳐주었다. 그들은 엄연히 일을 했고, 일의 대가로 돈을 받았다. 그럼에도 우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송강호와 전임 가정부를 기생충으로, 그리고 이선균을 숙주라고 생각한다.


송강호와 지하실 빚쟁이(배우 이름도 모르고 배역도 모르겠다)의 공통점이 하나 있다. 대만 카스테라. 4년 전 사업이 망하고, 빚쟁이는 지하실로 숨어든다. 그리고 귀신이 되어 아들 앞에 나타나 그의 트라우마가 된다. 조여정의 대사는 상징적이다. "그런데 애 아빠는 아무 것도 안 해요. 애들 때는 다 그러고 크는 거라고. 게다가 집에 귀신이 나오면 돈이 잘 들어온다나. 그런데 진짜로, 요 몇 년 사업이 잘 되긴 했어요." 빚쟁이가 되어 몇 년 동안 숨어사는 귀신과 그 몇 년 동안 번창하는 사업, 빚쟁이가 된 소상공인과 사업을 번영시킨 멋진 사업가. 귀신이 나오면 돈이 잘 들어온다. 누구의 돈이 누구에게 흘러갔는지, 너무나 직설적인 비유 아닌가?


이선균이 기생충이라고 단정짓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단순하게 만드는 것은 영화에 대한 예의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 누군가를 기생충이라고 불러야 한다면, 그건 이선균에 더 가까울 것이다. 몇 가지 단서가 있다. 기생충은 감정이 없고(인디언 모자를 쓴 송강호와, 이것도 근무 중인 거라고 말하는 이선균의 표정을 보라), 숙주를 옮겨 다니고(가정부와 운전기사는 너무나 쉽게 해고 당한다, 그들의 말대로 사람은 많으므로), 무엇보다 기생충이라는 사실 자체가 은폐되어 있다는 게 기생충이라는 존재의 강력한 단서가 되는 것이다. 그는 점잖고, 깔끔하고, 큰 집에 살고, 멋진 회사에서 일하고, 돈이 많아서(우리는 언제나 돈 많은 이에게 호감을 가진다) 우리는 그를 기생충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대만 카스테라와 귀신의 메타포는 이선균의 돈이 누구로부터 왔는지를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누가 누구에게 기생하는가? 월급을 받는 실패한 소상공인인가, 아니면 어딘가에서 돈을 긁어모아 그들에게 월급을 줄 수 있는(그리고 분명히 하건데, 그 대가로 그들에게 노동력을 제공 받는) 사업가인가?


대만 카스테라와 귀신과 사업. 언제나 착취는 은폐되어 있다. 기생충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끝으로, 이 영화에 대해서 두 가지만 짚고 넘어 가고 싶다. 첫째는, 봉보로봉봉봉이 인터뷰에서 강조했던, 장르 영화로서의 매력이다. 봉준호는 자신이 장르 영화 감독이라고 말했고, 이 영화 또한 그렇다고 분명히 했다. 이 영화의 주요한 메타포들, 수석이라든가 지하실, 대만 카스테라와 귀신 같은 것들은 너무 분명하게 드러난다. 켄 로치의 영화에서 이런 것들이 나왔으면, 영화는 쉬이 진부해졌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메타포들이 스릴러나 블랙코미디라는 장르적 특성과 섞이면서, 분명한 현실의 대유를 보여주면서도 진부하다기보다는 맛깔나게 느껴졌다.


둘째는, 이 영화의 결말이다. 송강호가 이선균을 칼로 찌르는 모습은, 스티븐연을 칼로 찌르는 <버닝>의 유아인이 생각나게 했다. 송강호와 유아인, 그리고 이선균과 스티븐연은 비슷한 대구를 만든다. 사회의 낙오자 내지는 실패자 - 성공한 사람이자 이른바 "인싸". 세상은 바뀌지 않을 것이고, 낙오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인싸를 칼로 찌르는 것밖에 없다. 그 칼부림은, 무언가를 바꾸고자 하는 게 아니다. 그저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감정을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 표현해내는 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칼부림은 분노의 표현이자, 가장 지극한 절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편지를 쓴다. 돈을 모아 그 집을 사겠다고, 볕이 좋은 정원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우리는 그런 일은 없으리란 걸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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