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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소소 Sep 26. 2019

잊혀져 가는 우리에게

옛날옛적에 할리우드에서

2020년을 앞둔 채 살아가는 20대로서 이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우리가 이 문명의 마지막 세대가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

말하자면 일종의 세기말 병인데, 물론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다. 어쨌든 인간은 살아남으리라는 것. 빙하기도 넘었고 흑사병도 넘었고 세계대전도 넘었고 핵전쟁의 문턱에서도 살아돌아온 인류가 고작 AI와 차오르는 바닷물과 기름 부족 때문에 멸종한다는 건 이상하지 않은가? 물론 아인슈타인이 했다는 말처럼 미래에는 돌과 몽둥이로 싸우게 될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니 내가 알지 못하는 것은 자연물인 지구의 안위도 아니고, 바퀴벌레보다 질기다고 확신하는 인류의 존망도 아니고, 그저 우리 세대인 것이다. 직업을 구해봤자 50까지 버틸 수 있을까? 집을 샀는데 고사포를 맞고 부숴지면 어떡하지? 지구온난화 때문에 더 이상 가을의 서늘한 아침을 만끽할 수 없게 되면 어떡하지? 내 아들 손자는 고래라는 생물을 볼 수 있을까? 노동이 언제까지 가치를 지닐 수 있을까?


이 글은 인류의 미래에 대해 논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쿠엔틴 타란티노의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를 보고, 그 시대와 우리 시대가 그리 다른 것 같지는 않다고 느낀 게 이 주절거림의 시작이었다.


잠시 사족을 달자면, 왜 요즘은 배급사들이 영어 제목의 번역을 포기하는 걸까? 그럴 거면 그냥 영어로 적든지, 굳이 어색하게 또 영어 발음을 한글로 옮기고 있다. 그냥 <옛날옛적에 할리우드에서> 이렇게 쓰면 안 되는 걸까? 아, 이건 안되겠다. 그렇지만 더 좋은 번역도 있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다시 돌아가서, 당연히 나는 1969년을 살아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밥도 못 벌어먹는 인문학을 배운 탓에, 시대상에 대해서 대강은 알고 있다. 베트남 전쟁, 냉전, 핵전쟁의 공포, 환멸, 권위주의적인 기성세대, 철없는 히피들, 대마, LSD, 코카인, 자유연애, 성적 개방, 등등등. 영화의 주인공은 히피가 아니다. 중년의 위기를 겪고 있는 기성 세대다. 이미 사회에 견고히 자리를 잡은, 물론 브래드 피트는 노후가 걱정돼 보이긴 했지만, 이탈리아에 영화를 찍으러 가기 싫다고 찡찡대는 배부른 중년인 것이다. 히피의 말대로, 지금 베트남에서는 실제로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는 와중에, 디카프리오는 새벽에 술 좀 마셨다고 온갖 것들을 집어던지며 분노하는 것이다. 이 영화에서 옳은 말은 히피가 다 한다.


그러나 영화에서 관객들은 디카프리오, 그보다도 브래드 피트에 공감할 것이다. 주인공으로 나와서? 물론. 그렇지만 다른 이유도 있지 않을까? 히피는 젊은이고,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는 중년을 넘어선 이들이다. 히피는 잃을 게 없는 이들이고,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는 잃을 게 많은 이들이다. 히피는 미래를 만들어갈 이들이고, 디카프리오와 브래드 피트는 사라져 갈 이들이다. 히피는 중년의 세계를 파괴하고, 그들을 역사의 뒤안길로 보내버리고, 베트남 전쟁을 끝내고, 사랑과 평화와 신자유주의의 세상을 만들어 갈 이들이다. 히피는 사랑과 평화와 파괴와 혼돈과 망각의 전령이다. 짹과 빵돌이가 얼마나 많은 영화를 함께했고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든, 그들은 모두 사라져 갈 존재인 것이다. 그들은 자신을 파괴하기 위해 쳐들어온 히피들을 물리적으로 묵사발을 내버리고 타란티노는 그런 장면에서 쾌감을 가장 극적으로 연출해낼 줄 아는 감독이지만, 극적인 쾌감을 고조시키는 만큼 그 이면의 씁쓸함도 키울 수 있다는 걸 잘 아는 감독이다. 사건을 알고 가는 관객들은 샤론이 실제로는 살아남지 못한다는 걸 알고, 할리우드의 영광과도 같던 그 가족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알고, 이것이 오직 영화라는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안다. 그리고 디카프리오는 악독한 나치를 태워죽이는 정의의 미군이 아니다. 그가 태우는 건 약에 취한 미친 히피일 뿐이고, 그러한 극단적인 폭력으로도 히피가 몰고오는 파괴와 망각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화염은 발버둥에 불과하다. 그는 사라져 가는 존재다, 우리 모두처럼.


2020년이란, 잊혀져 가는 시대다. 우리 문명이 언제까지 기억에 남을지 누가 알 수 있을까? 손주에게 물려줄 것을 생각하며 아파트를 사지만, 10년 뒤에 그 아파트가 바닷물에 잠기지 않을지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인간이란 종 자체가 AI라는 히피에 밀려나지 않으리라고 누가 확신할 수 있을까? 모든 영화가 그렇지만, 결국 할리우드의 이 괴상한 이야기는 우리 모두에 대한 오마쥬다. 그러나 한결 더 씁쓸한 것은, 이 시대의 젊은이들은, 히피들은, 새로운 세상의 창조자이자 기성세대를 파괴하는 평화의 사도였지만, 지금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은, 가져보지도 못한 채 사라지기만을 두려워하는, 망각의 끄트머리에 놓인 가엾은 어린 양들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늙어버린 젊은이들의 세상에서, 새로운 세상을 누가 이끌 수 있을까? 정말로 인간은 종말에 다다른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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